릴로

플래시 불빛이 망막을 찌를 때마다 하얀 잔상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사방에서 들이치는 마이크와 기자들의 숨소리가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 중심에서 한여진은 강세현의 탄탄한 허리춤을 감싸 안은 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완벽한 승리를 거둔 백령그룹의 후계자, 그리고 그녀를 든든하게 보좌하는 태성그룹의 재벌 3세. 세상이 원하는 쇼윈도 부부의 완벽한 정석이었다.

하지만 여진의 손가락 끝이 그의 슈트 원단을 파고드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척추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차가운 전류가 솟구쳤다. 찌릿, 하는 미세한 진동이 갈비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더니, 이내 심장 판막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압박감으로 변했다. 단순한 접촉 사고가 아니었다. 가슴뼈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열기가 피어오르며 심장을 꽉 쥐어짜는 듯한 감각에 여진은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손바닥에 닿은 세현의 허리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몸 안에서 일어난 파동이 그대로 여진의 신경망을 타고 역류했다. 그 역시 똑같은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의 고통을 고스란히 공유하는 오감 공명의 족쇄가 그들의 가슴속에서 날카롭게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여진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바닥에 어지럽게 엉킨 카메라 케이블들이 보였다. 이어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려 그의 턱 끝에 맺힌 팽팽한 긴장감을 훑었다. 마지막으로, 흔들림 없이 정면을 응시하는 듯하지만 미세하게 초점이 흐려진 세현의 짙은 눈동자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시선이 얽히는 짧은 찰나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고등이 켜졌다.

"참아."

여진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오직 세현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읊조렸다.

"너나 잘해, 한여진. 손에 힘 풀리는 거 다 티 나니까."

세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여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기자들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중의 눈에는 눈부시게 다정한 부부의 포옹이었지만, 두 사람의 내부에서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의 조율이 음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설마…….’*

서로를 증오해야만 가문의 비즈니스적 행운과 초감각이 극대화되는 계약의 법칙. 마음을 여는 순간, 심장이 타들어 가는 저주가 시작된다는 그 잔혹한 메커니즘이, 지금 그들의 가슴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여진은 이를 악물며 세현의 품에서 상체를 슬며시 뒤로 뺐다. 쇼윈도의 막이 내릴 시간이었다.

***

그날 밤, 소월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부터 시작된 기묘한 공기는 저택의 두꺼운 참나무 문이 닫힌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깊은 산속에 고립된 소월재는 외부의 모든 소음을 차단하는 침묵의 감옥과 같았다. 거실의 공기는 서늘했고, 낮 동안 내린 비 때문에 눅눅한 흙 내음이 창틀 사이로 스며들었다.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안개가 대리석 바닥 위로 낮게 깔렸다.

여진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태블릿 PC의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에 떠 있는 우주항공 입찰 결과 수치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입찰장에서 느꼈던 그 기이한 통증. 가슴을 쥐어짜던 그 불쾌한 감각의 정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유발하는 계약 반사.

여진은 스스로 그 단어를 떠올린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감정은 삶을 파멸시키는 버그에 불과했다. 자신에게 그런 나약한 버그가 생겼을 리 없다. 그녀는 백령을 독점하기 위해 세현을 도구로 선택했을 뿐이고, 세현 역시 태성을 찢어발기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했다.

그때, 서재에서 나온 세현이 거실로 걸어 들어왔다. 은은한 숲 향이 감도는 거실의 공기 속으로 그의 체취가 섞여 들었다. 묵직한 가죽 냄새와 씁쓸한 시트러스 향. 여진은 미세하게 코끝을 씰룩였다가 이내 표정을 지웠다.

세현이 반대편 소파에 털석 주저앉으며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입찰은 끝났는데, 표정은 꼭 나라라도 잃은 것 같네."

"당신 얼굴을 보고 있으니 흥이 깨져서 그래."

여진이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냉랭하게 대꾸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언제나 대등한 칼끝과 같았다. 어느 한쪽도 밀리지 않는 팽팽한 핑퐁.

그 순간이었다.

거실 한편,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청동 벽면 장식 부근에서 기묘한 이변이 감지되었다.

웅-.

아주 미세한 주파수의 변동이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결코 인지할 수 없는 초고주파의 소음. 그러나 오감 공명 계약으로 인해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두 사람의 고막에는 마치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으로 들려왔다.

여진의 눈썹 끝이 움찔했다. 동시에 태블릿을 쥐고 있던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반대편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세현 역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빠르게 청동 벽면 장식 쪽을 향했다가 이내 여진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직감했다.

한태오.

백령그룹의 회장이자 여진의 잔혹한 아버지가 움직인 것이다. 소월재 벽면 장식에 숨겨진 고대마법 도청 및 생체 감시 마진이 마침내 작동하기 시작했다. 벽면의 보이지 않는 틈새로 붉은 먼지 같은 마력의 파동이 은밀하게 흘러나와 거실 전체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세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은 여유로웠지만, 그의 눈동자는 여진의 시선을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세현은 여진을 바라보며 시선을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1단계). 이어 자신의 손가락으로 테이블 밑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가리키며(2단계), 다시 여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경고의 빛을 보냈다(3단계).

'감시가 시작됐다.'

그의 무언의 신호를 여진은 완벽하게 이해했다. 감시망을 속여야 했다. 저 마진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한태오가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거나 혹은 두 사람의 계약 상태를 테스트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공명 계약의 법칙상, 두 사람이 서로를 증오할수록 가문의 번영과 초감각이 극대화된다. 그렇다면 이 감시망이 측정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했다.

두 사람의 '불신 지수'.

세현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차가운 헛웃음을 흘렸다. 눈물겨울 정도로 차갑고 모욕적인 어조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번 우주항공 입찰 건으로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한여진 씨?"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배는 더 날카로웠다. 여진의 자존심을 정확히 후벼 파는 가시 돋친 어조.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은밀히 벽면 장식을 가리키며 여진의 대답을 유도하고 있었다.

여진은 그의 장단에 즉각 맞추어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그녀의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눈에 뵈는 게 없다니. 팩트를 말했을 뿐이야. 당신이 내 발판이 되어준 덕분에 백령의 주가가 폭등했지. 고마워해야 할까, 아니면 무능한 파트너를 둔 내 불행을 탓해야 할까?"

"무능?"

세현이 성큼성큼 다가와 여진이 앉은 소파 앞 테이블을 거칠게 짚었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여진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숨결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담배 향과 체온이 여진의 콧날을 자극했다.

"주제파악 좀 하지. 내 우주항공 설계도가 없었다면 넌 그 자리에서 임 전무의 덫에 걸려 발가벗겨졌을 텐데. 기생충처럼 내 능력을 빨아먹고선 이제 와서 독자적인 승리인 척 연기를 해? 백령이 대단하긴 한가 봐. 사람을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만드는 걸 보니."

"기생충?"

여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 뼘도 채 되지 않게 좁혀졌다. 서로의 가파른 호흡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말은 바로 해, 강세현. 당신이 설계도를 넘긴 건 당신의 그 빌어먹을 태성그룹을 무너뜨릴 균열을 만들기 위해서였잖아. 날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당신의 그 사악한 사리사욕을 위해서! 내가 당신 손을 잡아준 걸 감사하게 생각하진 못할망정 어디서 훈계질이야?"

"잡아줬다고? 네가 날 이용해 먹은 거지."

세현이 여진의 턱 끝을 강하게 쥐어 올릴 듯 손을 가깝게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 끝이 여진의 하얀 목덜미 근처에서 멈춘 채 부들부들 떨렸다.

"똑똑히 알아둬. 난 언제든 이 판을 엎을 수 있어. 네가 그토록 갈망하는 백령의 왕좌?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어 줄 테니까."

"해 봐, 그럼."

여진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세현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쳤다.

"당신이 날 무너뜨리기 전에, 내가 먼저 당신 목줄을 끊어놓을 테니까. 태성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이 아까울 정도로 저열한 수준이군."

두 사람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공명 계약의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여진은 등 뒤로 소름이 돋는 것과 동시에, 척수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냉기를 느꼈다. 그것은 가슴의 통증이 아니었다. 오히려 머릿속이 번뜩이며 소월재 내부의 모든 정보가 한눈에 들어오는 초감각의 영역이었다.

'역시…….'

여진은 확증했다.

벽면의 청동 장식에서 뻗어 나오던 붉은 신호가 두 사람의 폭언과 적대감이 극에 달할 때마다 급격히 흔들리더니, 이내 안정적인 녹색 빛으로 변해 가라앉고 있었다. 가문의 고대 감시망이 두 사람의 '불신 지수'만을 측정하고 있음을 공명 상태의 수치적 반사를 통해 완벽하게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다. 감시망은 이 거짓 없는(?) 적대감을 그대로 흡수하여 한태오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여진은 속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더는 당신의 그 오만한 낯짝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여진이 쐐기를 박듯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등을 돌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백령의 인형 노릇이나 하는 여자와 한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니까."

세현의 마지막 폭언이 거실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벽면 장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청동 장식에서 풍기던 고주파의 진동이 완전히 멈추었다. 감시망이 완벽한 안도감과 함께 슬립 모드로 전환된 것이다.

도청기를 작동시킨 한태오는 지금쯤 삼청동 밀실에서 두 사람의 완벽한 불화를 전해 듣고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을 터였다. 딸과 사위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상태. 가문의 행운이 가장 극대화되는 그 완벽한 혐오의 상태를 확인했으니, 당분간 소월재에 대한 감시의 고삐를 늦출 것이 분명했다.

적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역이용해 그들의 눈을 가려버린, 완벽한 책략의 승리였다.

***

거실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연기가 끝났음을 알리듯, 청동 장식의 붉은 빛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지자, 여진은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며 몸이 옆으로 크게 휘청였다.

"어이."

짧은 파열음과 함께 세현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여진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 부축했다.

넓고 두꺼운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실크 셔츠를 뚫고 여진의 살결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숨결이 여진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스쳤다.

"……놓아."

여진이 숨을 몰아쉬며 읊조렸다.

상황은 끝났다. 한태오의 감시망은 꺼졌고, 연기를 계속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이 손을 놓아야 했다.

하지만 세현의 손길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끝이 여진의 어깨뼈를 쥔 채, 단 1초의 시간이 더 흘러갔다. 그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여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억누르려 해도 삐져나오는 기묘한 염려와, 소유욕에 가까운 집요한 시선.

그 찰나의 지체.

쿠우웅-.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두 사람의 뇌리를 동시에 강타했다.

단순한 심장의 압박이 아니었다. 두개골 안쪽이 불길로 뒤덮이는 듯한, 뇌수가 끓어오르는 듯한 계약 반사의 잔혹한 저주가 그들의 이성을 사정없이 흔들기 시작했다.

"아윽……!"

여진은 비명을 삼키며 세현의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 세현의 얼굴 역시 고통으로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의 턱밑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적막한 거실에 울려 퍼졌다.

서로의 심장과 머리를 태워버릴 듯한 이 잔혹한 통증의 원인은 단 하나였다.

방금 전, 감시망을 속이기 위해 연출했던 그 혐오의 대화 속에서, 그리고 연기가 끝난 직후의 이 짧은 접촉 속에서, 그들의 내면에 존재해서는 안 될 기묘한 '감정'이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들이밀었다는 증거였다.

"세현…… 아……."

여진은 고통 속에서 세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일그러진 눈동자 속에서, 여진은 자신과 똑같은 의문과 거대한 공포를 읽어내고 있었다.

벽 너머의 도청자를 속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자신들의 내면에서 싹트기 시작한 이 파멸의 징조를 어떻게 덮어야 할 것인가. 서로의 숨소리마저 고통이 되는 지옥 같은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잔인하게 얽혀 들어갔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