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소월재의 안방을 지배한 것은 벼려진 칼날 같은 한기였다.
여진은 눈을 뜨자마자 허공을 응시했다. 시야가 흐릿한 와중에도 머릿속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명징했다. 뇌리의 가장 깊은 곳, 어두운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정보들이 사슬처럼 엮여 떠올랐다.
태성그룹이 극비리에 추진하던 차세대 우주항공 설계도. 수백 개의 수치와 복잡한 입체 궤도 도면, 그리고 단 한 사람에게만 허용되었던 입찰 하한선 금액이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전날 밤, 세현의 입술이 귓가에 닿았던 그 찰나의 접촉이 남긴 전리품이었다.
여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실크 가운을 걸쳤다. 맨발이 닿는 대리석 바닥에서 서늘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지만, 그녀의 신경은 다른 곳으로 쏠려 있었다.
어깨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욱신거림.
그것은 여진 자신의 통증이 아니었다. 공명 계약이 강제로 연결해 놓은 타인의 고통. 전날 밤 세현의 몸을 감쌌던 그 둔탁한 열감과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여진의 어깨와 오른쪽 옆구리 부근에 고스란히 이식되어 있었다.
여진은 서늘한 소나무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복도를 지나 세현의 독방으로 향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무겁고 탁했다. 커튼이 처진 어둠 속에서, 세현은 긴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누워 있었다.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는 간데없고, 미간을 찌푸린 그의 얼굴은 밀랍 인형처럼 창백했다.
여진이 소리 없이 다가갔다. 세현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녀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여진은 주저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손끝이 그의 오른쪽 옆구리, 정확히 갈비뼈 아래쪽의 단단한 근육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읍……!"
세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순식간에 여진의 손목을 낚아챘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악력 속에서도 여진은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세현의 시선이 먼저 여진의 침범해 온 손가락 끝에 머물렀다. 이윽고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가파르게 치솟아 그녀의 쇄골을 거쳤고, 최종적으로는 조소로 가득 찬 여진의 눈동자에 날카롭게 고정되었다.
"손버릇이 나쁘군, 한여진. 남의 침실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어딜 만지는 거지?"
세현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목소리가 긁히는 듯 거칠었다.
"아픈 곳을 감추려면 포커페이스를 더 정교하게 다듬었어야지, 강세현."
여진이 붙잡힌 손목에 힘을 주어 팽팽한 대치를 만들었다.
"전날 밤에 닿았을 때 알았어. 네 오른쪽 옆구리에 가해지던 그 찢어지는 듯한 통증. 가문의 개들에게 물려 뜯기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사냥개 노릇을 하다가 덜미라도 잡힌 건가?"
"글쎄. 미련하게 남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받아 가며 분석하는 네 취미에 장단을 맞춰줘야 할지 모르겠군."
세현이 실소를 흘리며 손목을 쥔 힘을 툭 풀었다. 하지만 그의 호흡은 여전히 가빴다. 여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방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침대 옆에 놓인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협탁. 그 서랍이 아주 미세하게,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열려 있었다. 여진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협탁으로 향했다.
"남의 방 물건에 멋대로 손대지 않는 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예의 아닌가?"
세현이 경고하듯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갈비뼈 부근의 통증 때문에 다시 소파 가죽 위로 무너졌다.
여진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손가락을 서랍 틈새로 밀어 넣었다. 손끝에 걸리는 작은 유리 병. 꺼내어 빛에 비추어 보자, 투명한 병 안에서 푸른빛을 띠는 액체가 흔들렸다. 라벨에는 아무런 글씨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여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감각 과부하 완화제.
공명 계약으로 인해 폭등하는 감각의 압박을 억지로 억누르는 금기적 약물이었다.
"이걸 숨겨두고 복용할 정도로 뇌가 타들어 가고 있었나 보네."
여진이 약병을 가볍게 흔들며 속삭였다. 푸른 액체가 벽면을 따라 흘러내리는 모습이 기괴하도록 아름다웠다.
"태성그룹의 그 위대하신 후계자가, 고작 쇼윈도 부부 생활 하루 만에 마약성 완화제에 의존하는 처지라니. 원로회 노인네들이 알면 아주 기뻐하겠어."
세현의 눈빛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소파 시트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걸 알아내서 어쩌시려고. 한태오 회장에게 바쳐서 네 효용 가치라도 증명할 셈인가?"
"아니. 난 그런 시시한 짓은 안 해."
여진이 약병을 서랍 안으로 툭 던져 넣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서랍이 닫혔다.
"난 네 약점을 쥐고 흔들 생각은 없어. 다만, 네가 이 고통 때문에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꼴은 못 본다는 거지. 네가 무너지면, 내 승계 계획도 같이 엉망이 되니까."
그때였다. 소월재 복도 끝에서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차갑고 규칙적인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한태오가 보낸 감시자이자 소월재의 집사, 이 집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늙은 가신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동시에 세현의 안색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의 관자놀이 부근의 혈관이 터질 듯 팽창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공명 계약의 부작용인 초감각적 과부하가 하필 이 타이밍에 극심한 편두통으로 그를 덮친 것이었다.
세현의 고통은 고스란히 여진의 뇌로 역류했다. 머릿속이 송곳으로 헤집어지는 듯한 통증에 여진의 턱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대로 감시자가 방 안으로 들어와 세현의 나약한 모습을 목격한다면, 태성과 백령 양가 원로회에 즉각 보고될 터였다. 후계자의 결함은 곧 폐위와 파멸을 의미했다.
여진은 심호흡을 하며 통증을 억눌렀다. 그녀는 주저 없이 세현에게 다가갔다.
"비켜."
세현이 이마를 짚으며 읊조렸으나, 여진은 그의 어깨를 짚고 소파 위로 올라타듯 몸을 밀착시켰다.
그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씁쓸한 타바코 향과 차가운 체온이 여진의 감각을 자극했다. 여진은 양손으로 세현의 거친 턱선과 관자놀이를 강하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를 그의 차가운 이마에 단단히 맞대었다.
"하……!"
세현의 숨결이 여진의 입술 바로 위에서 흩어졌다.
접촉이 긴밀해질수록, 3배로 증폭된 공명이 작동했다. 여진은 자신의 정신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세현의 뇌를 지배하는 고통의 파동을 자신의 머릿속으로 강제로 끌어당겼다. 고통의 극점을 분산시키고 조율하는 작업이었다.
세현의 찌푸려졌던 미간이 기적처럼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를 짓누르던 끔찍한 압박이 순식간에 걷히고, 그 자리에 여진의 서늘하고 명징한 정신이 침투해 들어왔다.
바로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후계자님, 아침 식사 준비가……."
들어선 늙은 집사의 눈에 비친 것은, 소파 위에서 아슬아슬할 정도로 밀착해 서로를 탐닉하듯 이마를 맞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여진은 세현의 목덜미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고개만 살짝 돌려 집사를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노크하는 법을 잊었나 보군요, 김 집사."
여진의 목소리는 흐트러짐 없이 차분했고, 오히려 방해받아 불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쇼윈도 부부라고 해서 아침의 사적인 시간까지 당신에게 전시해야 할 의무는 없을 텐데요. 한태오 회장님이 부부의 침실 사생활까지 보고하라고 지시하셨습니까?"
집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 쳤다.
"송구합니다, 상무님. 제 불찰입니다."
"나가세요. 다시는 문을 벌컥 여는 무례를 범하지 마시길."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두 사람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긴장감이 걷힌 방 안에 오직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세현의 편두통은 완벽히 가라앉아 있었고, 여진의 머릿속을 맴돌던 고통 역시 서서히 잦아들었다.
세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여진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손이 어느새 여진의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제법이군, 한여진. 고통을 나누어 갖는 법까지 터득한 건가?"
"나눈 게 아니라 조율한 거야."
여진이 그의 가슴을 밀치며 소파에서 내려왔다. 가운의 매무새를 정리하는 그녀의 손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정했다.
"우리가 완벽하게 서로를 증오할수록 이 공명 계약의 비즈니스 행운이 극대화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까 가장 달콤한 쇼윈도 부부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가장 완벽하게 서로를 증오해야 해."
여진이 세현을 내려다보았다.
"가문의 단독 왕좌에 오를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가장 위험한 동반자이자 가장 확실한 적이어야 해. 동의해?"
세현이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여진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큰 그림자가 여진을 덮쳤다.
"기꺼이."
세현이 손을 내밀었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여진은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맞물리고 손가락이 얽히는 순간, 소월재 바닥에 새겨진 붉은 마법진이 일시적으로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공기 중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며 가공할 만한 에너지가 두 사람의 신경망을 타고 흘렀다.
서로를 삼켜버리겠다는 적의와 팽팽한 긴장감이 결합되어, 가문의 상업적 행운을 증폭시키는 럭키 드로우가 최고조로 가동된 것이었다.
삐리리리릭—!
여진의 가운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이 찢어질 듯한 경고음을 울렸다.
여진이 화면을 확인하자, 윤지은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쏟아져 나왔다.
[상무님! 지금 당장 뉴스 확인하셔야 합니다! 방금 전 태성그룹이 우주항공 차세대 사업 입찰을 공식 포기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백령그룹이 단독 계약권을 확보했다는 속보가 뜨면서, 현재 백령의 주가가 폭발적으로 폭등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스마트폰의 주식 앱 화면이 온통 붉은색 상승 곡선으로 도배되며 숫자가 가파르게 치솟고 있었다. 백령의 주가가 상한가를 치며 시장의 모든 자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손잡음이 가져온, 상상을 초월하는 비즈니스적 폭발이었다.
여진은 화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승리의 전율이 전신을 감쌌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여진과 세현의 가슴 바로 아래, 심장 언저리에서 타들어 가는 듯한 미세하고 날카로운 통증이 동시에 찌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작지만, 분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불길한 궤적.
두 사람은 서로의 맞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서로를 속이고 증오해야만 살 수 있는 계약의 룰 위에서, 그들의 심장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