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무겁게 닫힌 소월재의 참나무 문 뒤로 세상을 삼켜버릴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혼식은 화려했으나 지독하게 건조했다. 백령그룹과 태성그룹의 원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치러진 식은 결합이라기보다는 두 맹수가 서로의 목줄을 쥐고 벌이는 조인식에 가까웠다. 화려하게 반짝이던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거칠게 벗어 던진 한여진은 침실 한가운데에 서서 가만히 숨을 골랐다.

사방이 차단된 기이한 저택, 소월재. 이곳의 공기는 숲속 깊은 곳의 습기와 얼어붙은 대리석의 금속성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스스슥, 가슬거리는 실크 웨딩드레스의 자락이 바닥을 쓸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여진은 화장대 거울을 통해 방 안의 온도를 가늠했다. 차갑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는 이 냉기가 가문의 도구로 살아온 그녀에게는 익숙한 종류의 안전지대였다.

백령그룹의 유일무이한 독점 승계자.

그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악마와의 계약도 기꺼이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악마의 대리인이 지금, 문 너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단정하면서도 위협적인 발소리가 다가왔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강세현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내리며 셔츠 깃을 벌렸다. 단단한 빗장뼈 위로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가 보였다. 세현의 몸에서 풍기는 마른 시더우드 향과 옅은 위스키 냄새가 소월재의 차가운 습기와 뒤섞였다.

여진은 거울 속에서 그의 시선을 먼저 붙잡았다.

첫 단계는 가차 없는 탐색이었다. 여진의 검은 눈동자가 세현의 깊고 시린 눈빛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세현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두 번째 단계는 집요한 추적이었다. 세현의 시선이 여진의 드러난 어깨선을 타고 내려가 가늘게 떨리는 손끝에 머물렀다. 여진은 지지 않으려는 듯 턱을 치켜올렸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잔인한 회피였다. 세현은 눈길을 툭 꺾어 창밖의 어둠으로 던져 버리며, 마치 흥미를 잃은 맹수처럼 여진을 지나쳐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쇼윈도 부부의 첫날밤치고는 지나치게 엄숙하군, 한여진 씨.”

세현의 목소리는 낮고 낮게 깔리며 방 안의 공기감을 단숨에 장악했다.

“격식을 차리는 건 오늘까지야. 내일부터는 서로의 숨통을 겨눠야 할 테니까.”

여진이 몸을 돌려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태성그룹의 황태자께서 벌써 약한 소리를 하시는 건 아니겠지? 가문을 통째로 찢어발기겠다는 야심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얌전해?”

“얌전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 드레스 같은데.”

세현이 길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침대 시트를 쓸어내렸다.

“백령의 구습을 깨부수고 독점 승계를 하겠다며 나를 이용하려 드는 그 당당함은 마음에 들어. 하지만 착각하지 마. 나 역시 너를 딛고 내 가문을 전복시킬 생각이니까.”

대등하게 맞부딪치는 티키타카 속에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좁혀졌다. 여진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긴장감으로 인해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표정만큼은 대리석처럼 굳건하게 유지했다.

“이용하든 밟고 올라서든 상관없어. 결과적으로 살아남는 쪽이 전부를 가지면 되니까.”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우리 계약의 ‘진짜’ 효능을 시험해 볼 시간이지.”

세현이 손을 뻗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여진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나 도망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쿵-!

머릿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것 같은 충격이 여진의 전신을 관통했다. 단순한 신체 접촉이 아니었다. 손목을 타고 올라온 온도는 순식간에 끓는점까지 치솟았고, 차가운 혈관 속에 뜨거운 용암이 흘러드는 듯한 극심한 전율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여진은 숨을 들이켰다. 너무나 강력한 자극에 턱관절이 딱딱하게 맞물렸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압도적인 감각의 폭풍이었다.

동시에 세현의 머릿속에 도사리고 있는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여진의 신경망을 타고 고스란히 흘러들어왔다. 태성그룹이라는 멍에에 갇혀 자라온 그의 뼈아픈 열등감, 가문을 향한 맹렬한 증오, 그리고 자신을 도구로 취급하는 세상을 향한 차가운 분노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이게…… 공명인가?’

숨이 가빠왔다. 여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놀라운 것은 세현의 상태도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세현의 단단한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섰고, 여진을 쥔 손귀에 엄청난 힘이 들어갔다. 그 역시 여진의 상처와 독기, 타인의 호의를 절대 믿지 못하는 얼어붙은 내면의 고통을 고스란히 공유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 윽.”

세현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여진의 얼굴을 바짝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엉키는 거리에서, 두 사람의 호흡은 하나의 궤적을 그리며 가쁘게 요동쳤다.

오감 및 행운 공명의 법칙.

서로를 향한 적의와 증오가 깊을수록, 비즈니스적 직감과 행운이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한다는 잔혹한 신들의 놀이터.

여진은 세현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거뭇한 불꽃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한 적대감이었고, 동시에 상대를 집어삼키고야 말겠다는 지독한 정복욕이었다. 그 감정이 여진의 전신을 타고 흐르는 순간, 기이할 정도로 맑고 투명한 영감이 뇌리를 스쳤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복잡한 경영 구상도들이 순식간에 한 줄기로 꿰어지며 완벽한 해답을 찾아갔다. 백령그룹 원로회가 숨겨둔 비자금 루트, 다음 주에 있을 바이오 기업 인수합병의 핵심 취약점들이 마치 눈앞에 그려지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짜릿했다. 지독한 고통 뒤에 찾아온 이 압도적인 전율과 쾌감은 여진의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었다.

세현의 증오가 깊어질수록, 그녀의 비즈니스적 직감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벼려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소월재의 사방 벽면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진동인 동시에 파동이었다. 소월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서늘한 삼나무 향이 돌연 습기를 머금고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오래된 가구의 빈틈을 파고드는 마른바람 속에서, 서로의 맞닿은 살결에서 흘러나오는 체온만이 비정상적으로 뜨겁게 들끊었다.

여진은 자신을 포획한 세현의 긴 손가락을 응시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시작된 미약한 떨림은 살을 타고 고스란히 여진의 손목뼈를 지나 뇌수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이 비정상적인 전율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듯, 여진이 먼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세현의 깊게 가라앉은 갈색 눈동자가 여진의 집요한 시선을 받자마자 거칠게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 그의 시선이 여진의 붉게 물든 귓가로, 그리고 가쁘게 들썩이는 목덜미로 미끄러지듯 하강하며 회피하듯 감추어졌다. 그러나 세현은 이내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마치 그녀의 영혼까지 낱낱이 파헤치겠다는 듯이 여진의 눈동자 정중앙을 꿰뚫어 오듯 직시했다.

“이 손 떼지 그래, 강세현. 숨 막혀.”

여진이 호흡을 고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먼저 내 멱살을 잡고 당긴 게 누군지 잊은 모양이군, 한여진.”

세현이 여진의 손목을 조금 더 가깝게 끌어당기며 낮게 받아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낮게 일렁이는 분노와 함께, 기이한 열감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방어기제야. 네 거친 맥박이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게 소름 끼치도록 싫을 뿐이지.”

“싫다라. 그런데 네 머릿속에서 도는 그 완벽한 승계 구도는 왜 내 심장을 이리 뛰게 만드는 걸까?”

세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더운 숨결이 여진의 뺨을 스쳤다.

스치는 공감의 자극이 강해질수록, 여진의 머릿속은 더욱 명징해졌다. 맞닿은 손끝에서 찌르르한 전류가 흐르며, 심장이 조여드는 통증과 함께 말초신경이 예리하게 곤두섰다. 태성그룹 내부의 자금 흐름, 그들이 우주항공 입찰에서 제시하려던 비공개 투찰가의 범위가 안개 너머의 풍경처럼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남자가 품은 극도의 경계심과 적대감이 여진에게는 가장 완벽한 정보의 열쇠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두 사람의 발밑에서부터 시작된 기괴한 울림은 이제 뼈마디를 흔들 기세로 거세어졌다. 밀폐된 공간의 산소가 일시에 희박해지는 듯한 압박감이 두 사람 사이의 틈새를 빽빽하게 메웠다. 소월재의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작동하고 있었다.

웅-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고대 마법진의 붉은 문양들이 벽면 장식을 따라 은밀하게 피어올랐다. 붉은 빛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고동치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듯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소월재 안에서는 공명 계약의 작용력이 평소보다 3배 이상 증폭된다는 경고는 사실이었다.

붉은 빛이 점멸할 때마다 여진의 피부 위로 세현의 심장 박동이 그대로 전이되어 쿵쾅거렸다. 뇌가 타들어 가는 것 같은 자극 속에서 여진은 세현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멱살을 잡고 더 깊은 수렁으로 끌어당기듯 자신에게 밀착시켰다.

“아파?”

여진이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열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고통을 넘어서는 기이한 희열이 서려 있었다.

“아파 죽을 것 같아. 그런데…… 너무 선명해. 네 그 더러운 적개심 덕분에, 내가 백령을 어떻게 집어삼켜야 할지 이제야 똑똑히 보여.”

세현이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의 눈빛이 한층 더 집요해졌다.

“독한 여자군. 보통은 이 정도 자극이면 미쳐버리거나 도망치기 마련인데.”

“도망칠 곳 따위 없어. 난 이 지옥의 가장 높은 곳에 앉을 거니까.”

“그래, 기꺼이 그 지옥의 동반자가 되어 주지.”

세현이 여진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실크 드레스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단단한 체온과 서늘한 손길이 여진의 척추를 마비시킬 듯 짜릿한 고통을 선사했다.

서로를 증오할수록 강해지는 계약.

사랑이라는 버그를 허용하는 순간 심장이 붕괴하여 파멸에 이르는 잔혹한 저주.

그렇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철저히 미워해야만 했다. 가장 완벽한 가짜 부부가 되어, 서로의 목에 칼날을 겨눈 채 왈츠를 추어야 했다.

세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여진의 목덜미를 스치고, 이윽고 그의 입술이 여진의 부드러운 귓가에 아주 느리게 닿았다.

단순한 접촉이었으나 3배로 증폭된 공명은 여진의 뇌하수체를 직접 타격했다.

그 찰나의 순간, 여진의 눈앞에 선광과도 같은 거대한 홀로그램이 펼쳐졌다. 그것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세현의 뇌 속에 깊이 비공개로 감추어져 있던 태성그룹의 극비 차세대 항공우주 사업 설계도와 입찰 하한선 금액이 숫자의 나열과 입체 도면 형태로 여진의 머릿속에 실시간으로 전송되어 완벽하게 각인되었다.

여진의 동공이 급격히 확장되었다. 이것은 태성의 심장을 단숨에 도려낼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였다.

귓가에 닿은 세현의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리며 속삭였다.

“첫날밤 선물치고는 꽤 쓸만할 텐데, 한여진.”

그의 목소리가 뇌리를 흔들며 암전되었다. 여진은 세현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과연 자신은 이 파멸적인 힘을 쥐고 가문의 단독 왕좌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세현의 손에 먼저 심장이 찢겨 발겨질 것인가.

붉게 타오르는 소월재의 마법진 속에서, 잔혹한 동맹의 첫 페이지가 피로 쓰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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