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덜미를 엄습하는 서늘한 쇠붙이의 감각이 척수를 타고 뇌리를 찔렀다. 서쪽 방에서 칼날을 마주한 세현의 차가운 피부 온도가 동기화된 오감을 통해 여진의 목덜미로 고스란히 복사되었다. 눈앞에는 수트를 칼날처럼 가다듬어 입은 한태오가 먹구름 같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서 있었고, 수신 상태가 불량한 라디오처럼 머릿속에선 세현의 가쁜 호흡음이 지직거리며 섞여 들었다. 그 숨 막히는 압박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현의 침실 바닥을 부유하던 여진의 유령 같은 의식 끝자락에 번뜩이는 금빛 계시가 포착되었다.
바닥재 틈새, 세현의 피가 튀어 번진 나무 옹이 안쪽에 백령과 태성의 고대 동맹 비망록에나 존재할 법한 면책 문양이 숨겨져 있었다. 가문의 구습과 규정 전체를 단번에 무력화할 수 있는, 가문 규정 전복 보증 면책 영문 장식이었다.
여진은 턱 끝을 바르르 떨면서도 한태오를 향해 시선을 똑바로 치켜올렸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투명한 안구 위로 푸른 불꽃이 이는 듯했다.
“여전히 험악한 등장이시네요, 아버지.”
여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한태오는 구두 굽으로 바닥에 쓰러진 집행관의 손목을 가차 없이 짓밟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가죽 굽이 뼈를 으스러뜨리는 둔탁한 마찰음이 소월재의 정적을 갈랐다. 가문 원로들의 눈과 귀가 되어 소월재 벽면 장식 틈새에 박혀 있던 고대마법 도청 및 생체 감시 마진들이, 침입자의 기운에 반응하며 붉은 안광을 미세하게 깜빡였다.
“감히 내 감시망을 태워버리고 쥐새끼처럼 구는구나.”
한태오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그의 손가락 끝이 여진의 뺨을 스치듯 지나갔다. 호의가 아닌, 언제든 목을 꺾어버릴 수 있다는 포식자의 무언의 경고였다.
“세현이 놈은 이미 태성의 원로들에게 목줄이 잡혔다. 이 소월재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건 오직 가문의 승리만을 입증하는 자뿐이다. 네가 무너지면, 백령은 태성의 자산을 완전히 흡수하고 너를 폐기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세현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날카로운 감각 전송이 여진의 심장을 찢어발겼다. 세현의 목을 겨눈 칼날이 살갗을 파고들어 붉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고통은 공명 계약을 통해 여진의 목에도 고스란히 붉은 진물처럼 타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심장이 비틀려 짜이는 듯한 수축이 일어났다. 서로를 향한 진심이 깊어질수록 심장을 붕괴시키는 계약 반사의 저주가 본격적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안 돼. 이대로 무너지면 둘 다 가문의 제물이 될 뿐이야.’
여진은 숨을 들이마셨다. 허파 깊숙이 들어오는 공기는 소월재 특유의 곰팡이 핀 서늘함과 한태오가 몰고 온 독한 타르 냄새로 오염되어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한태오의 구두 끝을 지나, 벽면에 정교하게 부착된 동제 환풍 구로 눈길을 옮겼다. 3단계의 정밀한 시선 이동 끝에, 그녀는 환풍구 안쪽 깊은 곳에 가문 내부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비서 윤지은이 심어둔 수신기 마진이 작동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여진은 오른손 손가락을 등 뒤로 돌려 숨겼다. 그리고 벽면의 통풍 마진에 닿도록 손끝을 뻗었다.
손끝이 금속 슬릿에 닿자마자, 차가운 정전기 같은 파동이 손가락을 타고 올랐다. 윤지은과의 은밀한 외부 채널이 마침내 개통된 것이다.
[상무님, 듣고 계십니까. 외부 병력 대기 중입니다. 원로원의 차단막을 뚫을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지은의 지직거리는 음성이 여진의 귓가를 직접 울리는 환청처럼 들려왔다. 여진은 한태오의 형형한 안광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등 뒤로 벽면을 아주 미세하게 두드렸다. 검지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리는 진동이 통풍구를 타고 지은의 수신기로 전달되었다.
그 순간, 서쪽 방의 세현에게서 기묘한 박동이 공명을 타고 넘어왔다.
지독한 통증 속에서도 세현은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의 서랍 속에 감춰져 있던, 푸른빛이 도는 감각 과부하 완화제 약 병이 떠올랐다. 세현은 그 약 병을 쥐어짜며 통증을 억지로 마비시키고 있었다. 여진에게 자신의 끔찍한 비명이 전송되어 그녀의 포커페이스가 깨질까 봐, 스스로 감각을 마비시키는 은밀한 독약을 삼킨 것이다.
두근. 두근. 두근.
세현의 심장 박동이 일정한 주기로 벽을 두드리는 모스 신호가 되어 여진의 뇌리에 직접 박혔다.
‘여진아.’
공유된 감각 너머로 세현의 나직한 음성이 환각처럼 고막을 간지럽혔다.
‘내 걱정은 하지 마. 저들이 나를 죽이진 못해. 난 태성의 후계자니까. 하지만 너는 달라. 한태오는 널 도구로만 본다. 오직 너의 승리만을 선포해. 나를 짓밟고 일어서서, 네가 원하던 백령의 왕좌를 차지해.’
세현의 신호는 명확했다. 자신을 희생양 삼아 여진이 독점 승계권을 쟁취하라는 눈물겨운 종용이었다.
하지만 여진의 턱 끝이 단호하게 굳어졌다. 타인의 호의를 믿지 않던 그녀였지만, 세현의 이 지독한 헌신은 그녀의 얼어붙은 내면에 균열을 내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계약 반사의 불길이 치솟아 심장을 까맣게 태우기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대가는 이토록 선뜩하고 아팠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강세현.’
여진은 벽면을 두드려 답신을 보냈다.
‘널 죽이고 얻는 왕좌 따위, 내 계획에는 없어. 난 둘 다 가질 거야. 백령도, 그리고 너도.’
여진은 한태오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녀의 체취에 섞인 소월재의 서늘한 공기가 한태오의 위압적인 기운과 충돌하며 팽팽한 불꽃을 튀겼다.
“아버지, 당신들이 대대로 지켜온 그 ‘독점 승계의 룰’이라는 게 얼마나 허술한 모순 덩어리인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한태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냐.”
“백령과 태성이 맺은 고대 계약은 외견상으로는 한쪽이 다른 쪽을 완벽하게 파멸시켜야만 독점 승계권을 쟁취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원초적인 오류를 품고 있죠.”
여진은 세현의 의식 끝자락에서 포착했던 면책 영문 장식의 텍스트와, 원로원 밀실 서고에서 엿보았던 고대 계약 원본 뒷면의 예외 조항 문양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조합했다. 그녀의 탁월한 비즈니스적 직감이 폭발적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공명 계약이 최고조에 달하며 그녀의 두뇌는 컴퓨터보다 훨씬 정밀하고 차갑게 작동하고 있었다.
“계약서 제7조 3항에 명시된 자멸적 양가 계약의 조항에 따르면, 한쪽 가문이 완전히 파멸하여 자산이 이양될 때, ‘피인수 가문의 채무와 법적 리스크 역시 무조건 승계 가문으로 무제한 귀속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태성그룹이 지금 원로원과 강선우의 공작으로 인해 안고 있는 잠재적 부실채권과 해외 소송 리스크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여진은 조롱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약 120억 달러입니다. 만약 제가 세현이를 짓밟고 태성을 무너뜨려 강제 합병을 시도하는 순간, 백령은 태성의 독소 조항과 천문학적인 벌금 폭탄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됩니다. 독점 승계가 아니라, 동반 자살이죠. 원로원들이 노리는 게 바로 이 지점입니다. 후계자들을 싸우게 만들어 양가를 모두 파산시킨 뒤, 자신들이 실권을 장악하려는 음모.”
한태오의 안색이 처음으로 차갑게 굳어졌다. 그 역시 몰랐던 계약의 맹점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진은 벽면 장식에 숨겨진 한태오의 생체 감시 마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 감시 장치, 아버지가 직접 심으신 거죠? 하지만 이 장치는 고대 마법의 공명 주파수를 기반으로 작동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드리죠.”
여진은 세현과의 공명 감각을 극대화했다. 세현이 삼킨 완화제 약 병의 잔여 성분이 오감 공유를 통해 여진의 혈관으로도 흘러드는 듯했다. 그녀는 고통을 억누르는 동시에, 자신의 정신력을 증폭시켜 벽면의 감시 마진으로 강한 ‘적의’의 주파수를 쏘아 보냈다.
파앗!
벽면 장식에서 찌릿한 스파크가 튀겼다. 감시 장치와 연결되어 있던 한태오의 개인 수신기가 고주파 피드백 루프를 일으키며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윽……!”
한태오가 귀를 움켜쥐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고막을 찢을 듯한 이명과 고통이 역류하여 그의 뇌를 타격한 것이다. 여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통풍구 너머의 윤지은에게 최종 지시를 내렸다.
“지은아, 지금이야. 준비한 법적 사문화 문서와 자본 회인 합의서를 금융감독원과 원로원 이사회에 동시 송출해. 태성의 부실을 백령의 사모펀드로 우회 인수하여, 계약의 ‘파멸 조건’을 원천 무효화한다.”
[네, 상무님. 즉시 실행합니다!]
지은의 다급하지만 신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소월재 외부의 통신망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완벽한 법적 사문화 논리와 상업적 자본 회인 해법이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갔다. 감시 원로원들의 목줄을 죄어오는 여진의 완벽한 반격이었다. 한태오는 귀에서 피를 흘리며 격노한 눈으로 여진을 노려보았지만, 이미 전세는 역전되어 있었다.
“네놈이…… 감히 가문을 배신하고 이런 짓을……!”
“배신이 아닙니다, 아버지. 진정한 지배자가 되려는 것뿐이지.”
여진은 지은이 전송한 태블릿 화면 위에 최종 승인 서명을 날인하기 위해 스타일러스 펜을 쥐었다. 이 서명만 끝나면, 백령과 태성을 묶고 있던 고대의 사슬은 완전히 해체되고 두 사람은 자유를 얻게 된다.
스윽, 화면 위에 여진의 서명이 완성되어 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공유되던 세현의 심장 박동 신호가, 마치 절벽 아래로 떨어지듯 급격하게 뚝 떨어졌다.
구두 굽 소리보다 더 서늘한 침묵이 여진의 뇌리를 잠식했다. 세현이 고통을 감추기 위해 과다 복용한 감각 완화제의 부작용과, 원로원 자객들의 습격으로 인한 물리적 타격이 겹쳐 그의 심장이 정지해 가고 있었다.
두근……
두근……
그리고, 이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진의 손에 쥐여 있던 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녀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조임과 함께, 머릿속이 새하얀 소음으로 가득 찼다.
세현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은색 스타일러스 펜이 데굴데굴 구르며 가죽 구두 끝에 닿았다.
여진의 시선이 가장 먼저 바닥에 떨어진 펜의 끝에 머물렀다. 이어 천천히 고개를 올려 한태오의 잔인하게 비틀린 입매를 관찰했다. 마침내 서쪽 방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복도 끝, 보이지 않는 세현의 침실을 향해 떨리는 눈길을 고정했다. 시선이 이동할 때마다 목구멍 안쪽에서 시큼하고도 뜨거운 금속성 비린내가 치밀어 올랐다.
정적. 그것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가 아니었다.
뇌를 찌르던 세현의 가쁜 숨소리도, 옷자락이 쓸리는 미세한 마찰음도, 그가 억지로 집어삼키던 고통의 신음마저도 단번에 소거된 진공의 상태였다. 소월재를 가득 채운 것은 타버린 구리선의 매캐한 냄새와 뼈를 얼려버릴 듯한 서늘한 빙벽의 공기뿐이었다.
쿵.
여진의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세현의 심장이 멈추자, 공명 계약의 사슬은 그의 정지된 생체 신호를 여진의 신체로 강제 복사하기 시작했다. 가슴 중앙이 거대한 프레스기에 눌린 것처럼 짓눌리며 숨이 턱 막혔다. 허파가 쪼그라들고 손끝부터 급격하게 온기가 빠져나갔다.
“결국 그 엷은 동정심이 네 발목을 잡는구나.”
한태오가 낮게 비웃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독한 타르 냄새가 여진의 호흡기를 마비시킬 듯 밀려들었다.
“태성의 후계자가 숨을 거두면 공명 계약은 소멸한다. 백령이 누릴 행운도, 네가 그토록 갈망하던 독점 승계권도 모두 물거품이 된다는 뜻이지. 네가 겨우 이딴 시체에 마음을 주어 가문을 파멸로 이끌 줄이야.”
여진은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벽을 짚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차가운 벽면 장식에서 여전히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윤지은과의 통신 채널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안 돼. 여기서 멈추면 모든 게 끝장이야.’
세현을 향해 뻗어 가던 마음의 끝자락이 잔혹한 저주(계약 반사)를 건드려 심장을 타오르게 만들었지만, 여진은 그 고통을 분노로 치환했다. 타인의 호의를 믿지 않던 그녀가 유일하게 곁을 허락한 존재였다. 가문의 도구로 살아가던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고, 자신을 위해 기꺼이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던 유일한 동반자.
그를 이대로 차가운 소월재의 바닥에 버려둘 수는 없었다.
여진은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악물며 등 뒤의 벽면을 강하게 두드렸다. 세 번의 짧은 타격, 그리고 한 번의 긴 타격. 윤지은에게 보내는 극비 비상 신호였다.
[상무님! 설마 강세현 씨의 신호가……!]
수신기 너머 지은의 목소리에 전에 없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여진은 한태오의 서늘한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턱 끝을 치켜올렸다. 목덜미의 핏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니요, 끝을 결정하는 건 나예요, 아버지.”
“감정이 개입된 거래는 반드시 망한다. 그것이 이 바닥의 생리다.”
“이건 거래가 아니라, 내 승리 공식입니다.”
여진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오감 공명의 법칙. 상대와 신체적 접촉이 긴밀할수록 감각과 통증이 증폭되며 공유된다. 그렇다면, 이 소월재라는 거대한 증폭기 안에서 신체 접촉 없이도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 흐름을 ‘역류’시키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여진은 자신의 심장 박동을 억지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세현의 서랍 속에 있던 감각 완화제의 푸른 빛깔을 떠올렸다. 그 약물이 세포 하나하나를 마비시키던 감각을 역으로 모방했다. 차갑게 식어가는 세현의 몸속에 남아 있을 약물의 잔해를 자신의 신경망으로 강제로 끌어당겼다.
‘강세현, 내 소리 들어.’
여진은 자신의 심장을 강제로 쥐어짜듯 박동을 만들어냈다. 쿵, 쿵, 쿵. 그녀의 가슴에서 일어난 진동이 공명 주파수를 타고 소월재의 벽면을 흔들며 서쪽 방으로 흘러 전송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감각의 공유가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력을 세현의 멈춘 심장에 강제로 주입하는, 죽음을 무릅쓴 동기화였다.
“크윽……!”
순간, 여진의 입술 틈새로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내렸다.
서로를 향한 진심 어린 구원의 갈망이 선을 넘는 순간 작동하는 ‘계약 반사’의 저주. 심장이 불에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물리적 통증이 여진의 상체를 가차 없이 짓밟았다. 눈앞이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번갈아 점멸했다. 척추가 끊어질 듯한 고통에 무릎이 꺾이려 했지만, 여진은 한태오의 앞에서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벽을 짚은 그녀의 손끝에서 손톱이 깨져 피가 흘렀다. 그 피가 벽면의 고대 마진을 적시자, 청색 불꽃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치솟았다.
‘뛰어. 제발 뛰어, 강세현!’
그녀의 처절한 내면의 비명이 공명 주파수의 파고를 타고 소월재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때였다.
두근.
아주 미세하고, 터질 듯이 약하지만 명확한 박동이 여진의 뇌리에 다시 잡혔다. 세현의 심장이 여진의 박동에 반응해 기적적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차갑게 식어가던 그의 체온이 아주 느리게 상승하는 것이 여진의 피부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진은 핏방울이 맺힌 입술을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보이십니까, 아버지. 당신들이 만든 그 가혹한 규칙조차, 내 의지 앞에서는 한낱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한태오의 얼굴이 분노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품에서 검은색 인장이 찍힌 또 다른 계약 문서를 꺼내 들려 했다. 여진의 서명이 끝나기 전에 백령의 독점권을 강제로 회수하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하지만 여진의 손가락은 이미 태블릿 화면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최종 승인 날인의 마지막 획이 완성되려는 그 찰나.
철컥.
서쪽 방이 아닌, 여진이 서 있는 방의 뒤편 유리창이 거칠게 깨지며 검은 그림자들이 들이닥쳤다. 한태오의 사가 병력이 아니었다. 그들의 수트 깃에 새겨진 문양은 태성의 원로원, 그리고 강선우의 직속 심복들이 사용하는 표식이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소음기 달린 권총의 총구가 여진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었다.
그와 동시에 수신기 너머로 윤지은의 다급한 비명이 들려왔다.
[상무님! 안 됩니다! 강선우가 원로원의 최종 승인권을 가로채기 위해 소월재의 방어벽을 강제로 무너뜨렸습니다! 그들이 지금—]
치직, 소리와 함께 통신이 완전히 끊겼다.
눈앞의 자객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여진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세현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리쳤다. 그것은 이전의 동기화와는 전혀 다른, 기이할 정도로 차갑고 이질적인 주파수였다.
‘여진아, 뒤를 봐.’
그 나직한 경고와 함께, 여진의 시야가 급격히 뒤틀리며 서쪽 방에 있던 세현의 시야로 강제 전환되었다. 세현의 눈에 비친 것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자객들의 시체 사이로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또 다른 인물의 그림자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백령과 태성의 고대 계약서 원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