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쇄골 부근, 얇은 실크 블라우스 자락 위로 툭 떨어져 번졌다. 차가운 지하실의 공기 속에서 그 온기만이 기이할 정도로 선명했다. 그와 동시에 벽면 구석, 정교하게 조각된 백령 가문의 가작(佳作) 문양 틈새에서 파르르 떨리는 푸른 불꽃이 일었다. 한태오 회장이 심어둔 고대 도청 서약 마진이 마침내 두 사람의 감정적 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임계치를 넘겨 버린 것이다. 지직, 지지직. 스파크가 튀는 소리가 자축하는 비명처럼 어두운 공간을 갈랐다.
“형수님, 얼굴이 아주 볼만하네. 그 대단한 백령의 후계자가 겨우 이딴 저주 하나 때문에 벌벌 떨고 있었다니.”
모니터 속 강선우의 비열한 음성이 노이즈를 뚫고 고막을 찔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승리감에 도취된 자의 얇은 떨림이 묻어 있었다.
여진은 턱을 치켜들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입술 끝에 닿아 짠맛을 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심장 붕괴의 통증이 갈비뼈 안쪽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듯했지만, 그녀는 단 한 줌의 신음도 밖으로 새어 나가게 두지 않았다. 포커페이스는 그녀가 지옥 같은 백령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운 최초의 기술이었다.
“강선우.”
세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바닥을 짚은 그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진은 세현의 떨림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었다. 오감 공명은 그들의 고통마저 하나로 묶어 두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심장의 압박, 찢어질 듯한 두통이 여진의 뇌리로 고스란히 역류했다.
여진은 세현의 손을 꽉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손끝에 딱딱하고 차가운 유리병이 걸렸다.
세현의 침실 서랍 깊숙한 곳에서 찾아내었던, 감각 과부하 완화제였다.
그동안 세현이 가문의 감시를 속이고 자신의 통증을 은폐하기 위해 복용해 왔던 약물. 여진은 손에 쥔 약병의 뚜껑을 엄지손가락으로 툭 밀어 열었다. 머릿속 구석에서 정교한 계산식이 빠르게 맞춰지기 시작했다. 이 약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용도지만, 역설적으로 공명 계약의 흐름을 본래의 궤도에서 이탈시키는 강력한 교란 물질이기도 했다.
‘도청 장치는 주파수와 생체 마진의 공명으로 작동해. 그렇다면.’
여진은 모니터 너머의 강선우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네가 한태오 회장의 눈을 피해 이 시스템에 무단으로 침입했을 때,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어.”
- “뭐? 이 상황에서도 허세를 부리시겠다?”
“허세인지 아닌지는 보면 알겠지.”
여진은 약병에 담긴 푸른빛의 액체를 자신의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혀끝을 마비시키는 강렬한 쓴맛과 함께 머릿속을 지배하던 공명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뚝 끊기듯 일그러졌다. 비정상적인 감각의 단절. 그것은 공명 계약의 대상인 세현에게도 즉각적인 충격으로 다가갔다.
“하윽……!”
세현이 짧은 신음을 뱉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진은 그의 옷자락을 움켜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세현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흔들리며 여진의 시선과 맞부딪쳤다. 지독한 원망과,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도사린 서로를 향한 갈망이 그 짧은 찰나에 교차했다.
“세현아.”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망가질 준비 해.”
“……기꺼이.”
세현이 마른 입술을 열어 대답함과 동시에, 여진은 그의 목덜미를 감싸 안으며 입술을 포개었다.
그것은 단순한 접촉이 아니었다. 쇼윈도 부부의 완벽한 이중생활 속에서, 가문의 감시를 속이기 위해 연출했던 그 어떤 가짜 키스와도 달랐다. 심장을 짓누르는 저주의 공포를 넘어선, 가공할 만한 진심이 담긴 영혼의 충돌이었다.
쿠르릉!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소월재 지하실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계약 반사가 즉각적으로 작동했다. 가슴 속에서 불꽃이 일어 심장근육을 통째로 태워버리는 듯한 극렬한 물리적 통증이 두 사람을 덮쳤다. 하지만 여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세현의 안쪽을 더 깊숙이 탐하며, 자신의 뇌리로 쏟아지는 감각의 파도를 받아들였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금기라면, 그 금기를 태워 도청 경로 자체를 폭파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소월재의 증폭 마법진이 그들의 감각 과부하 파동을 3배로 부풀렸다. 완화제 약물이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주파수의 뒤틀림과,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된 폭발적인 생체 에너지가 하나로 융합되었다. 이 거대한 파동은 벽면에 심겨 있던 고대 도청 서약 마진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구리빛 주파수 대역이 붉게 타오르며 역추적 경로를 만들어냈다. 여진의 머릿속에 수신기의 위치가 선명한 좌표로 떠올랐다.
백령그룹 본사, 회장실 안쪽의 밀실.
그곳에서 고성능 무선 수신기를 귀에 걸친 채, 두 사람의 파멸을 실시간으로 감상하고 있던 한태오가 있었다.
* * *
백령그룹 회장실 밀실.
한태오는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소월재에서 전송되는 생체 신호와 음성을 음미하듯 듣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차가운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딸자식을 도구로 써서 태성그룹을 집어삼키는 계획이 마침내 종착지에 다다랐다고 믿었다.
“겨우 이 정도인가, 여진아.”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수신기의 볼륨을 높인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갑자기 수신기 안쪽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고온의 열기와 함께 기이한 고주파 비명이 터져 나왔다.
“……!!”
한태오는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었다.
두 사람의 진정한 교감이 만들어낸 계약 반사의 힘과, 소월재의 3배 증폭 파동, 그리고 완화제로 교란된 생체 전류가 도청 신호선을 타고 그의 고막으로 다이렉트로 내리꽂혔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인간의 뇌가 감당할 수 없는 초감각적 폭력의 실체화였다.
콰아아앙!
수신기가 한태오의 귀 옆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며 폭발했다.
“아아악! 내, 내 귀가……!”
한태오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오른쪽 귀에서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와 값비싼 페르시아 카펫을 붉게 적셨다. 고막이 파열되는 고통 속에서,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소월재에 심어둔 고대 도청 서약 마진이 완전히 불타 없어지며 발생한 역류 피드백 루프였다. 한태오가 자랑하던 완벽한 감시 체계는, 그가 그토록 멸시하던 딸의 ‘진심’을 담은 일격에 의해 영원히 복구 불가능한 폐기물로 전락해 버렸다.
* * *
지하실의 모니터 화면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이내 퍽 소리와 함께 암전되었다. 강선우의 비열한 얼굴도, 그가 재생하던 비디오 파일도 모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소월재 지하를 가득 채우고 있던 푸른색 마법 문양들이 맥없이 빛을 잃으며 바스라졌다. 탈출구를 가로막고 있던 강철 셔터의 제어 장치 역시 과전류로 타버려, 덜커덩 소리를 내며 위로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완벽한 사이다 같은 해방감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떼어냈다.
“하아, 하아…….”
여진은 세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속 심장은 여전히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불규칙하게 날뛰고 있었지만, 귀를 찌르던 도청기의 이명은 완벽히 사라진 뒤였다.
세현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버텨주었다. 그의 입술 끝에도 붉은 피가 살짝 맺혀 있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증명할 때마다 치러야 하는 대가. 하지만 두 사람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져 있었다.
“미친 짓이었어.”
세현이 낮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사냥감을 포착한 야수처럼 빛났다.
“하지만 마음에 들어. 아주 완벽하게 태워버렸네.”
“한태오는 이제 다신 소월재를 들여다보지 못할 거야.”
여진이 가쁜 숨 사이로 차갑게 대답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벽면을 짚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직거리는 잔류 마법의 불빛이 완전히 꺼지기 직전, 여진의 시선이 지하실 가장 깊은 곳의 석조 벽면에 머물렀다. 강렬한 충격으로 인해 벽면의 오래된 석고 고정이 떨어져 나가면서, 그 안쪽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형상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원로원의 밀실 서고에서 훔쳐보았던, 계약 원본 뒷면의 예외 조항적 문양과 완벽히 일치하는 고대 가문의 회전식 원판 구조였다.
여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저 깊은 어둠 속에서, 가문의 잔혹한 저주를 완전히 깨부술 수 있는 마지막 열쇠가 그녀를 향해 기괴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듯했다.
여진은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돌벽 앞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금이 가고 부서진 석고 잔해 사이로 매캐한 오존 냄새와 수백 년 동안 갇혀 있던 침침한 흙먼지 향이 뒤섞여 밀려왔다. 지하의 차가운 냉기가 땀에 젖은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며 소름을 돋웠다.
세현의 손이 여진의 손목을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감싸 쥐었다. 여전히 공유되고 있는 그의 손바닥 온기는 기이할 정도로 뜨거웠고, 그 온기를 타고 심장을 짓누르는 둔탁한 통증의 여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기다려.”
세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입술 끝에 맺힌 핏방울이 그의 턱선을 타고 흘러내려 셔츠 깃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진은 멈추어 서서 손목을 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첫 번째로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심연처럼 어두웠고, 방금 전 나누었던 격렬한 입맞춤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채 타오르고 있었다. 두 번째로, 여진의 시선이 그의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과 그 아래 새겨진 고통의 흔적을 훑었을 때, 세현의 눈동자에 언뜻 스친 것은 가공할 만한 소유욕과 깊은 우려였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여진은 그의 시선이 주는 기묘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길을 피해 돌벽의 문양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강세현. 한태오의 귀가 멀었다면, 백령의 원로원도 곧 이 비정상적인 주파수 단절을 감지할 거야.”
“알아. 하지만 이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야.”
세현이 손을 뻗어 석판의 가장자리를 쓸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문양의 파인 홈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여진의 머릿속에는 기이한 울림이 전해졌다. 오감 공명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단순한 촉각을 넘어선 비즈니스적 직감의 폭발이었다.
머릿속에서 정교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환영이 보였다. 이 원판은 백령과 태성, 두 가문의 거대한 부와 행운을 묶어두는 거대한 족쇄이자 심장이었다.
“원로원 밀실에서 봤던 그 문양이야.”
여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계약 원본 뒷면에 새겨져 있던 예외 조항. ‘진정한 희생의 공명이 저주를 파괴하리라.’ 그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어.”
“희생이라.”
세현이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목소리에 서린 냉소는 여진의 심장을 따끔하게 찔렀다.
“그들이 말하는 희생이 무엇일지 짐작이 가? 가문의 행운을 대가로 바치는 삶이야. 우리가 이 저주를 깨부수면, 백령과 태성이 누리던 그 무소불위의 상업적 행운도 완전히 소멸해. 껍데기만 남은 가문을 독점 승계하는 게 네 목표였나, 한여진?”
“껍데기뿐이라도 상관없어. 타인의 손에 쥐여 흔들리는 꼭두각시 왕좌보다는, 내 힘으로 일궈낸 황야가 훨씬 가치 있으니까.”
여진의 단호한 대꾸에 세현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짙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의 팽팽한 대치 속에서 실내의 공기가 얼어붙듯 무거워졌다.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궁…….
지하실 바닥 깊은 곳에서부터 불길한 진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두 사람의 감정적 동요 때문이 아니었다. 돌벽 내부의 기계 장치가 스스로 움직이는 소리였다.
회전식 원판의 중앙에 새겨진 붉은 눈동자 모양의 보석이 기괴한 빛을 발하며 스스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완전히 맞물린 원판이 멈추어 서자, 석판 틈새로 검붉은 액체 같은 마법 장막이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지하실 사방의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경고. 소월재 내부 생체 신호 및 공명 주파수 비정상적 이탈 감지. 원로원 공동 보안 프로토콜 03단계 가동.]
여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한태오의 도청 장치가 파괴되자마자, 양가 원로원의 통합 감시 시스템이 즉각 비상 체제에 돌입한 것이다.
지이잉-.
여진의 재킷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 제한 표시.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폰을 타고 흘러나온 것은 백령 원로원의 대리인이자 냉혹한 집행관의 건조한 목소리였다.
- “한여진 후계자. 그리고 강세현 후계자. 두 분의 공명 상태에 심각한 왜곡이 발생한 것이 감지되었습니다. 계약 위반 및 가문 손실 초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72시간 내로 원로원 통합 심판소로 자진 출두하십시오. 불응 시, 독점 승계권 영구 박탈 및 지하 감금 형벌이 집행됩니다.”
뚝.
자비 없는 통보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72시간.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단 사흘뿐이었다.
“결국 쥐새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군.”
세현이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벽을 짚었다.
그러나 위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돌벽의 원판이 완전히 멈추어 서자, 그 중앙에서 뿜어져 나온 기이한 검은 안개가 세현의 가슴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끄윽……!”
세현이 돌연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가슴팍을 움켜쥔 손가락이 미친 듯이 떨렸다.
그와 동시에 여진의 심장 역시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극심한 통증에 휩싸였다. 공명 능력으로 인해 그의 고통이 실시간으로 동기화된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원판의 메커니즘이 강제로 작동하며, 두 사람의 생명력과 비즈니스적 행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현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흐려지며 그가 여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고통 섞인 목소리가 지하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여진아…… 원판이…… 내 안의 무언가를…… 통째로 뜯어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