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익, 치이익.
살갗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리네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살구빛으로 보드랍던 손목 위가 순식간에 시커먼 잿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황제의 수호각인인 스티그마가 새겨진 자리였다.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야 할 문양 위로, 끈적하고 어두운 암청색 불꽃이 피어오르며 낙인을 사정없이 좀먹어 들어갔다.
"리네!"
디트리히가 거친 손길로 그녀의 팔목을 낚아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사납게 일렁였다. 황제의 손길이 닿자마자 스티그마가 더욱 격렬하게 요동쳤다. 엘리안이 보낸 가짜 혈맥의 축복 상자, 그 안에서 스며 나왔던 붉은 독소가 황제의 신성한 마력과 반응해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암청색 불꽃은 단순한 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제단과 연결된 혈맥의 결계를 강제로 두드리는 신호였다. 이대로 독소가 온몸에 퍼지면, 리네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황실의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이 제단의 소멸 맹세에 고스란히 보고될 터였다.
"큭…… 아바, 마마……."
손목뼈가 통째로 으스러지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얼음 송곳이 돋아나 심장을 찌르는 기분이었다. 창밖의 하늘은 리네의 고통을 대변하듯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였고, 정원의 마른 나뭇가지들이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때려댔다.
"기다려라. 어전의를 부르겠다. 당장 황실 마법사들을—"
"안 돼요!"
리네가 디트리히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법사들이 오면…… 들켜요. 이 독소는 제 피를…… 제단의 맹세를 자극하고 있어요. 마법으로 억누르려 하면 오히려 제단이 먼저 깨어날 거예요."
스스로를 감정적으로 고립시키던 오래된 방어 기제가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렸다. 여기서 들키면 끝장이다. 따뜻한 이불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 걱정 어린 눈빛도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차가운 단두대만이 남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아르카디아로 가야 해요. 정령들의 힘으로…… 이 고열을 가두어야 해요."
디트리히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몸으로 정원에 가겠다고? 정령들의 야성이 너를 집어삼킬 거다. 허락 못 한다."
"제가 해요. 제 집이잖아요."
리네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단단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해 살아남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스스로 증명해 내지 않으면 언제든 내버려진다는 것을, 보육원의 차가운 바닥에서 뼈저리게 배웠으니까.
디트리히는 그녀의 눈속에서 타오르는 지독한 생존 의지를 읽었다. 그것은 갓 태어난 새끼 맹수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황제는 천천히 손을 놓아주었다.
"……가라. 내 기사들이 정원 입구를 봉쇄할 것이다. 단 한 놈의 쥐새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지."
리네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곧바로 황제의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복도를 달리는 내내 손목에서 시작된 열기가 온몸을 불태웠다. 숨을 쉴 때마다 허파가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황궁의 화려한 회랑을 지나, 어둠이 짙게 깔린 아르카디아 정원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리네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아, 하아……."
정원의 공기는 평소와 달랐다.
라벤더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던 안개는 간데없고, 탁한 회색빛 기류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침입자의 기척을 느낀 정원의 수목들이 잎사귀를 바스락거리며 경계의 이빨을 드러냈다. 어설프게 다가갔다가는 바람의 칼날에 온몸이 찢기거나 흙더미에 파묻힐 판국이었다.
리네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손을 뻗었다.
"애들아…… 도와줘."
그녀의 부름에, 공기 중에 부유하던 민트색 바람의 정령들과 크림빛 흙의 정령들이 잉잉거리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리네의 손목에서 품어져 나오는 암청색 오염 마력을 보자, 정령들은 포식자를 만난 짐승처럼 털을 바짝 세우며 날카로운 파동을 뿜어냈다.
[더러워! 차가워! 싫어!] [이건 저 아래 불길한 뱀의 냄새야!]
정령들의 목소리가 뇌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정령은 귀여운 요정이 아니었다. 통제력을 잃으면 제국 전체를 삼킬 대재앙이었다. 리네는 혀를 깨물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생체 에너지가 격렬하게 소모되면서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았지만, 그녀는 정령들과의 외교적 협상 테이블을 걷어차지 않았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리네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아프면, 너희에게 줄 정화의 이슬도 없어. 이 오염을 내 손목 안에 가두어 줘. 바람으로 묶고, 흙으로 덮어.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사랑하는 이 정원이 통째로 썩어 들어갈 테니까."
정령들이 멈칫했다. 그들은 리네의 눈에 서린 서슬 퍼런 결의를 보았다. 자신들을 도구로 부리려는 인간의 오만이 아닌, 대등한 거래를 제안하는 지배자의 눈빛이었다.
이윽고, 바람의 정령들이 리네의 손목 주위를 둥글게 감싸 안았다. 민트색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암청색 독소를 압축하기 시작했고, 흙의 정령들이 파우더블루빛 고운 흙먼지를 피워 올려 그 위를 단단히 덮어씌웠다.
"윽……!"
지밀 결계가 완성되는 순간, 터질 듯한 고열이 손목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 강제로 갇혔다.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동시에 독소가 전신으로 퍼지는 것은 막아낼 수 있었다. 리네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정원의 깊은 안쪽에서 불길한 파동이 감지되었다.
흙의 정령들이 리네의 발가락을 간지럽히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나쁜 인간들! 저기 뒤쪽에서 둥지를 부수고 있어!] [차가운 불씨를 깨우려고 해! 정원이 아파!]
리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르카디아 정원 뒤편, 그곳에는 고대부터 봉인되어 온 '차가운 불씨'가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겉보기에는 얼어붙은 푸른 보석 같지만, 아주 미세한 자극만으로도 숲 전체를 태워버리는 대재앙급 산불의 촉매였다.
과거 엘리안이 이 불씨를 노리고 있다는 첩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결국 이곳까지 잠입한 것이 분명했다.
"감히…… 어디라고 손을 대."
리네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정원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정원의 수풀들이 모세혈관처럼 그녀에게 주변의 정보를 전달했다. 정령들의 감각망이 리네의 신경과 동조되어, 침입자들의 위치가 머릿속에 선명한 지도로 그려졌다.
아르카디아 뒤편의 은밀한 지하실 입구.
검은 사제복을 입은 정령사회학회의 요원 서너 명이 고대의 마법진을 그린 사슬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파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얼음 결정 모양의 불씨가 공중에 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이 불씨를 확보할 수 있다. 황실의 결계를 무너뜨릴 최고의 도화선이지."
"서둘러라. 황녀의 스티그마에 심어둔 독소가 발현되었으니, 지금쯤 황궁은 발칵 뒤집혔을 터—"
그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서늘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누구 마음대로 발칵 뒤집혔다는 거지?"
나뭇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리네의 모습은, 마치 숲을 지배하는 어린 여신 같았다. 땀에 젖어 살구빛 뺨에 붙은 머리카락, 그리고 손목에 감긴 흙과 바람의 결계가 기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황녀?! 어떻게 벌써…… 윽, 이 기운은 뭐냐!"
학회 마도사들이 서둘러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리네가 더 빨랐다. 그녀는 정령들의 분노를 억누르는 대신, 그들의 파괴적인 야성을 침입자들에게로 돌렸다.
"바람아."
리네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쿠우웅—!
보이지 않는 거대한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민트색 기류가 폭풍처럼 몰아치며 마도사들이 들고 있던 침투 병기와 봉인 사슬들을 가차 없이 토막 냈다. 챙강, 챙그랑! 강철 사슬이 맥없이 잘려 나가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이, 이럴 수가! 정령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다룬다고?! 고작 어린 계집이—"
"입 조심해."
리네의 발밑에서 흙더미가 솟구쳐 올랐다. 크림빛 고운 흙들은 순식간에 거대한 늪으로 변해 마도사들의 발목을 집어삼켰다. 흙의 정령들이 그들의 다리를 물어뜯듯 꽉 움켜쥐었다. 사방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자랑하던 마법 장벽은 정령들의 무지막지한 자연재해 앞에서는 터진 풍선 인형에 불과했다. 황녀의 권위를 깎아내리고 가짜 혈통을 폭로하려던 적들의 기습 부대는, 단 몇 초 만에 정령들의 거대한 포식 아래 처참하게 무릎을 꿇었다.
리네는 공중에 부유하는 '차가운 불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독하게 서늘하지만 속은 타오르는 불꽃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리네는 정령력을 흘려보내 불씨의 광포한 활성화를 잠재웠다. 적들이 악용하려던 촉매를 완벽하게 회수한 순간이었다.
그때, 정원 입구 쪽에서 묵직한 갑옷 소리가 들려왔다.
디트리히가 보낸 황실 직속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장인 로잘린이 검을 뽑아 들고 선두에서 달려왔다. 그녀는 바닥에 처참하게 구르고 있는 학회 마도사들과, 그들의 사슬을 토막 낸 채 차가운 불씨를 손에 쥔 리네를 번갈아 보았다. 로잘린의 눈에 깊은 경외심과 안도가 스쳤다.
"황녀 전하를 호위하라! 잔당들은 모조리 생포한다!"
기사들이 달려들어 비명을 지르는 마도사들의 사지를 꺾고 밧줄로 묶었다. 도망치려던 자들의 다리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정원에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전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로잘린이 리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리네의 손목에 감긴 이상한 결계를 보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직 눈빛으로만 황녀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굳은 맹세를 전할 뿐이었다.
리네는 차가운 불씨를 로잘린에게 건넸다.
"이걸 아바마마께 전해 주세요. 그리고…… 적들이 노리던 것이 이것이었다고."
"예, 전하. 즉시 고문실로 끌고 가 배후를 낱낱이 밝히겠습니다."
기사들이 적들을 끌고 사라지자, 아르카디아 정원은 이내 고요를 되찾았다.
리네는 긴장이 풀리자마자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목의 고열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제단을 자극하던 폭주는 멈춘 상태였다.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황궁 본성으로 향했다.
황제의 알현실에 도착했을 때, 디트리히는 홀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탁자 위에는 붉은 마력이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가짜 혈맥 축복의 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실금이 가 있는 고대 영약병이 놓여 있었다. 디트리히는 가볍게 기침을 토해내며 영약을 들이켰다. 그의 안색이 평소보다 미세하게 창백했다. 영약병의 균열이 커질수록, 그의 몸속에 누적된 정령의 침식 독소도 짙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리네는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제국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보였기 때문이다.
"해결했느냐."
디트리히가 영약병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엄숙했지만,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는 숨길 수 없는 안도가 서려 있었다.
"네, 아바마마. 침입자들을 생포했고, 불씨도 안전하게 회수했어요."
리네가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알현실의 문이 급하게 열리며 로잘린이 들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방금 고문실에서 정 전령을 통해 입수한 밀서가 들려 있었다. 로잘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폐하, 황녀 전하. 방금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학회 수장 엘리안이 보낸 비밀 연통을 확보했습니다."
로잘린이 떨리는 손으로 밀서를 바쳤다.
디트리히가 밀서를 낚아채 펼쳤다. 그의 눈이 순식간에 차갑게 침전되었다. 리네 역시 로잘린이 흘린 나지막한 목소리에 숨을 멈추고 말았다.
"엘리안이…… 사흘 뒤 제국 건국 연회에 직접 참석한다고 합니다. 그때 그가 황실에 바칠 헌상품은……."
로잘린이 침을 삼켰다.
"가짜 혈통을 감지하는 즉시 강제로 제단을 가동해, 그 자리에서 황녀 전하를 소멸시키는 '혈맥의 제단 강제 활성화 석판'이라고 합니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디트리히의 손안에서 밀서가 바스러져 재가 되었다. 리네는 손목의 결계를 꽉 움켜쥐었다. 엘리안이 마침내 황실의 목줄을 죄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석판이 제단과 반응하는 순간, 리네가 가짜라는 사실은 온 천하에 폭로되고 만다.
피할 수 없는 종막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