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조차 찢어발길 듯한 폭포수 아래에서, 사방을 얼려버리던 푸른 불꽃은 마침내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기적의 대가는 잔혹하도록 선명했다. 황제 디트리히의 품에 안긴 리네의 몸은 이미 온기를 잃은 채 투명한 얼음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다. 네가 나를 두고 이렇게 갈 리가 없어!"
제국을 공포로 무릎 꿇리던 학살자의 눈에서 일평생 단 한 번도 흐른 적 없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뜨거운 물방울이 아이의 뺨에 닿아 얼어붙은 서리를 녹여냈지만, 리네의 가슴은 여전히 고요했다. 숨결이 완전히 멎어버린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황제는 피가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절규했다.
"기어코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신이여! 대답해라!"
그의 야수 같은 절규가 빗소리를 뚫고 밤하늘을 찢어발겼다.
디트리히의 붉은 눈동자에 어려 있던 절망은 이내 광기 어린 결연함으로 번뜩였다. 그는 품 안의 리네를 바닥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춤에서 흑철로 제련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칼날이 그의 단단한 손바닥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서걱, 가죽이 찢어지는 서늘한 소리와 함께 황실의 순수한 혈통만이 지닌 금빛 도는 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디트리히는 피가 뚝뚝 흐르는 손바닥을 리네의 가느다란 왼쪽 손목 위로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이 아이의 살결을 짚자, 얼어붙어 있던 리네의 피부가 황제의 끓어오르는 마력에 데여 치익 소리를 내며 그슬렸다.
"내 피를 마시고, 내 혼을 취해라. 네가 저승의 문턱을 넘었다면 그 문을 부수고서라도 너를 끌어내릴 것이다."
디트리히의 낮고 거친 주문이 고요한 아르카디아 정원에 울려 퍼졌다. 그는 자신의 피로 리네의 손목 위에 황실 고유의 수호각인, '스티그마'를 강제로 아로새기기 시작했다. 황실의 방어 마법이자 영혼을 묶는 속박의 저주이기도 한 붉은 문양이 아이의 하얀 살결 위로 파고들었다.
황제의 생체 에너지와 마력이 피를 매개로 하여 리네의 텅 빈 심장으로 사정없이 역류했다. 그것은 억지로 생명을 주입하는 포악한 행위였다. 리네의 손목에 새겨지는 스티그마는 찬란한 금빛과 핏빛이 뒤섞여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형상으로 요동쳤다.
그 순간, 아르카디아 정원 뒤편의 은밀한 구릉지에서 푸른 한기를 뿜어내던 근원이 마침내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그것은 엘리안 후작이 황실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르카디아의 가장 깊은 음지에 숨겨두었던, '차갑게 얼어붙은 불씨'였다. 대재앙급 산불을 일으켰던 그 서늘한 기운의 잔재가 황제의 가공할 피의 각인에 밀려나 흔적도 없이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커흑……!"
디트리히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영혼을 나누어 결계를 동조시키는 대가는 황제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리네를 안은 손을 결코 놓지 않았다.
아이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 * *
눈을 가린 커튼 틈새로 부드러운 살구빛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리네는 가늘게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고, 온몸의 뼈마디가 으스러진 듯 무거웠다. 하지만 언제나 자기를 괴롭히던 지독한 얼음 같은 한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몸 깊은 곳에서부터 은은하고 따뜻한 민트색 온기가 맴돌며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평소처럼 정령의 힘을 과도하게 쓰고 나면 찾아오던 그 끔찍한 탈진과 혼수가 아니었다.
"……치료된 건가?"
리네는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손끝에 닿는 침구는 파우더블루 빛깔의 고급 실크였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침대 머리맡에 놓인 연보랏빛 라벤더 화병이 눈에 들어왔다. 황녀의 침실이었다.
"공주님……! 세상에, 공주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쟁반을 들고 들어오던 로잘린이 바닥에 쟁반을 떨어뜨렸다. 은제 대야가 바닥을 구르며 맑은 소리를 냈지만, 로잘린은 개의치 않고 리네의 침대 곁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가는 이미 붉게 짓물러 있었다.
"깨어나셨군요……! 무려 사흘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계셨습니다. 이대로 정령들의 저주에 삼켜지시는 줄 알고 제 가슴이 얼마나 조여들었는지 모릅니다."
로잘린은 리네의 가냘픈 손을 꼭 쥐며 눈물을 흘렸다. 리네는 목이 메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로잘린…… 폐하는요? 그리고 정원은……?"
"정원은 이제 안전합니다. 공주님께서 목숨을 걸고 그 혹한의 산불을 정화하신 덕분에, 아르카디아의 오염된 구역이 완전히 맑은 안개로 가득 찼습니다. 제국의 가뭄도 서서히 걷히고 있어요."
로잘린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안도감과 함께 깊은 경외심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공주님이 잠드신 사흘 내내 침상 곁을 지키셨습니다. 어젯밤 늦게야 겨우 정무를 보러 가셨지요."
"폐하가…… 제 곁을요?"
리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냉혹하고 잔인한 폭군 황제가, 가짜일지도 모르는 자신을 위해 사흘 동안이나 간호를 했다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잘린이 주위를 살피듯 목소리를 낮추며 리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짙은 공포와 경외가 서렸다.
"공주님이 쓰러지신 그날 밤, 황성 전체에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폐하께서 아르카디아 정원 뒤편에 '차갑게 얼어붙은 불씨'를 심어 정령들을 폭주시키고 공주님을 해하려 한 간첩들을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색출해 내셨습니다."
"색출…… 했다고요?"
"예. 엘리안 후작의 사절단 중 상당수와 황궁 내부에 숨어 있던 마계의 세작들이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들의 목을 베어 황성 정문에 걸어두셨지요. 감히 내 딸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는 자는 영혼까지 찢어발기겠노라 선포하시면서 말입니다."
리네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엘리안의 음모를 이토록 잔인하고 신속하게 짓밟아 버릴 줄은 몰랐다. 이것은 단순한 반역자 처단이 아니었다. 제국 전체를 향해, 리네가 자신의 아킬레스건이자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유일한 역린임을 피로써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침실의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렸다.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을 찍는 묵직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로잘린은 깜짝 놀라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문가에 서 있는 사내는 거무스름한 망토를 걸친 디트리히였다. 그의 옷자락에서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비린 피비린내가 미세하게 풍겨왔다. 사흘 밤낮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붉은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고, 턱선은 평소보다 날카롭게 깎여 있었다.
그는 침대로 다가와 리네를 내려다보았다.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리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과거의 학대받던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며,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했다. 리네는 황급히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황녀의 미소를 지어 보이려 애썼다.
"아바…… 바마…… 걱정 끼쳐드려 죄송……."
"연기하지 마라."
디트리히의 낮고 잠긴 목소리가 리네의 말을 가로막았다.
황제는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거친 손으로 리네의 하얀 뺨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는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네가 가짜든, 진짜든, 혹은 어느 이름 모를 보육원의 시궁창에서 굴러먹던 쥐새끼든 상관없다."
"……!"
리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황제는 이미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었다. 제단의 규칙과 혈맥의 맹세가 자신들을 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리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네가 내 앞을 속이고 제단을 기만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늦었다."
디트리히가 리네의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소매가 걷혀 올라가며, 그곳에 새겨진 선명한 황금빛과 핏빛의 '스티그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의 마력과 리네의 생명력이 완벽하게 동조되어 숨 쉬고 있는 증거였다.
"내 피가 네 몸속에 흐르고 있고, 내 혼이 너를 묶고 있다. 네가 나를 속인 대가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집착과 독점욕으로 타올랐다. 그것은 부성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잔혹한 구속이었다.
"내 옆에서 평생 가짜 황녀로 살아라. 죽어서도 내 허락 없이는 이 황궁을 나갈 수 없다. 내 옆을 영원히 더럽히고, 내 피를 탐해라. 그 누구도, 심지어 하늘의 신이라 할지라도 너를 내게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리네는 숨을 멈췄다.
두려움 속에서 피어오른 것은 기묘한 안도감이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가짜임이 탄로 나 목이 베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무시무시한 선언 아래에서 사그라들었다. 이 폭군은 규칙을 깨부수고서라도 자신을 곁에 두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안전한 안식처가, 가장 위험한 남자의 품 안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네, 아바마마."
리네는 떨리는 손으로 디트리히의 커다란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입가에 피어난 미소는 더 이상 가짜 연기가 아니었다.
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더라도 자신을 지키겠다는 황제의 광적인 사랑이, 리네의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여내고 있었다. 대내외적으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불가침의 존재가 된 순간이었다. 엘리안이 보낸 간첩들의 목이 제단 위에 올려진 지금, 리네의 지위는 그 어떤 진짜 황녀보다도 공고해졌다.
디트리히는 만족스러운 듯 나지막이 웃으며 리네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화기애애한 온기가 방 안을 채우던 순간, 리네의 손목바닥에서 찌릿한 극통이 느껴졌다.
"앗……!"
리네가 신음하며 손목을 움켜쥐었다.
디트리히의 안색끝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리네의 손목목뼈 위에 새겨진 아름다운 스티그마 문양이 갑자기 기괴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황실의 수호각인 위로, 정체 모를 붉은 마력이 미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연회 때 엘리안이 외교 사절을 통해 황실에 전달했던 '가짜 혈맥의 축복' 상자에서 새어 나왔던 독소의 반응이었다.
스티그마의 신성한 힘과 엘리안이 뿌려둔 붉은 탐지 독소가 격렬하게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치익, 치익 소리와 함께 리네의 살결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금빛이었던 문양은 순식간에 탁하고 어두운 암청색으로 격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혈맥의 결계가 오염되었음을 알리는, 그리고 가짜 혈통의 존재를 제단에 강제로 보고하려는 불길한 징조였다.
"이것은……!"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격노로 뒤덮였다. 리네는 밀려오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비밀이 제단의 맹세에 의해 강제로 폭로되기 직전이라는 최악의 위기를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