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을 강제로 활성화하는 석판이라니요.”
로잘린이 토해내듯 뱉은 음성이 넓은 알현실의 대리석 바닥을 차갑게 굴러다녔다.
화롯가에서 타오르던 장작이 튄 것도 아닌데, 리네의 뺨이 화끈거렸다.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리네는 자신의 작은 손을 치맛자락 속에 숨기며, 맞은편에 앉은 디트리히의 눈치를 살폈다.
탁자 위에는 여전히 붉은 마력이 실핏줄처럼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가짜 혈맥 축복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서 금이 간 채 위태롭게 서 있는 고대 영약병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디트리히의 손가락이 옥좌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규칙적인 타격음이 침묵을 가를 때마다 알현실의 촛불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엘리안이 드디어 제 목줄을 쥐고 흔들려 하는군.”
디트리히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더 서늘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만약 건국 연회에서 그 석판이 작동해 리네가 가짜 혈통임이 만천하에 드러난다면, 제국의 신성한 ‘혈맥의 맹세’는 곧바로 격발된다. 황제가 직접 가짜를 참수하지 않으면 황실의 결계가 무너지고 제국 전체가 파멸에 이르는 저주가 내린다. 디트리히가 아무리 군대를 쥐고 흔드는 폭군이라 한들, 세계의 근원적인 시스템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리네는 마른침을 삼켰다.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그녀가 처음으로 얻은, 따뜻한 온기가 있는 집이었다. 비록 오해로 시작된 가짜 황녀의 삶이었지만, 매일 밤 앓아누울 때마다 제 이마를 짚어주던 로잘린의 손길과, 무심한 척 곁을 지키던 디트리히의 붉은 눈동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아바마마.”
리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밤바람에 흔들리는 얇은 유리 종소리처럼 가냘팠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결의가 박혀 있었다.
“그 석판이 제단에 닿기 전에, 엘리안이 꾸미고 있는 진짜 계획을 알아내야 해요. 그가 어떤 경로로 석판을 들여오는지, 그리고 제단을 어떻게 조작하려는지 미리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연회장에서 꼼짝없이 덫에 걸릴 거예요.”
로잘린이 리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나섰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폐하. 엘리안 후작은 치밀한 자입니다. 분명 황궁 내부에 그를 돕는 첩자가 있을 것이며, 그들과 주고받은 밀서나 마법 회로도가 어딘가에 존재할 것입니다.”
디트리히는 대답 대신 탁자 위의 영약병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비친 액체는 검붉은 빛을 띠며 일렁이고 있었다. 정령의 침식을 억누르기 위해 마시는 영약이었지만, 병의 균열이 깊어질수록 그의 몸속에 쌓이는 정령의 독소 역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디트리히가 가볍게 기침을 하자, 그의 입술 틈새로 라벤더빛 마력 연기가 아주 미세하게 뿜어져 나왔다.
“황궁 마법 도서관.”
디트리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곳 지하 깊은 서실에, 엘리안이 과거에 기증했던 고대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다. 황실의 감시를 피해 기밀을 주고받기에 가장 완벽한 음지제.”
그의 눈길이 리네에게 닿았다. 그것은 딸을 걱정하는 아비의 시선이자, 동시에 가짜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절대자의 차가운 시선이기도 했다.
“알아내 오겠습니다.”
리네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가거라. 하지만 명심해라.”
디트리히가 검은 칼자루를 쥐며 낮게 읊조렸다.
“내 눈앞에서 네가 부정한 피라는 증거가 들이밀어지는 순간, 내 손이 먼저 움직일 것이다. 그것이 맹세의 규칙이니까.”
* * *
깊은 밤, 황궁 마법 도서관의 지하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발소리를 완벽하게 집어삼켰고, 공기 중에는 오래된 종이 냄새와 눅눅한 먼지 냄새가 섞여 표류하고 있었다. 로잘린이 입구에서 경비를 서는 동안, 리네는 홀로 지하 깊은 서실의 벽면을 더듬었다.
살구빛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걸음을 옮기던 리네는 마침내 서재 뒤편의 막다른 벽에 다다랐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대리석 벽이었으나, 영성 소통 능력을 지닌 리네의 눈에는 미세한 마력의 흐름이 보였다.
‘여기야.’
리네는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긴장감을 억눌렀다. 숲의 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듯한 불안이 영혼을 잠식해 왔지만,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벽에 손을 얹었다.
일반적인 침입 탐지 마법이 겹겹이 쳐진 곳이었다. 마법사들이 설치한 경보 장치는 인간의 마력이나 물리적인 접촉에는 가차 없이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연의 순수한 힘인 정령들의 움직임까지 완벽하게 막아내지는 못했다. 특히 인간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주 미세한 정령들이라면 더욱더 그랬다.
“얘들아, 도와줘.”
리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부름에 응하듯, 공기 중에서 먼지처럼 떠돌던 빛과 불의 극미소 정령들이 웅성거리며 나타났다. 반짝이는 파스텔톤의 민트빛 이슬방울 같은 정령들과, 아기자기한 연분홍빛 불꽃 송이들이 리네의 손가락 끝을 맴돌았다.
- 리네! 부른다! 리네가 우리를 불렀어! - 벽 너머에 뭐가 있어? 가볼래! 가볼래!
정령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 쫑알거렸다. 리네는 이 귀여운 녀석들이 한순간에 폭주하면 마법 도서관 전체를 날려버릴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령은 본질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자연재해의 불씨였다. 리네는 부드러우면서도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그들을 타이르고 통제했다.
“조용히 해야 해. 저 벽 너머에 있는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와 주겠니? 상자의 열쇠 구멍 모양과, 그 안에 든 종이의 내용을 내게 보여줘.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해.”
- 응! 리네가 조용히 하래! - 살금살금, 바람처럼!
극미소 정령들이 벽의 미세한 틈새와 마법 결계의 틈을 타고 스며들었다. 어떤 경보 마법도 자연의 일부인 정령들의 부드러운 침투를 감지해내지 못했다.
리네는 눈을 감았다. 순간, 정령들의 시야가 그녀의 뇌리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벽 너머, 어두운 비밀 금고 공간이 보였다. 그곳에는 엘리안의 인장이 찍힌 푸른색 기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의 자물쇠는 복잡한 기하학적 무늬로 얽혀 있었는데, 불의 미세 정령들이 자물쇠 내부를 핥으며 그 열쇠 무늬를 온전히 기억해 리네에게 전달했다.
‘찾았다.’
리네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번지려는 찰나, 온몸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들이쳤다.
“으윽…….”
기적을 부릴 때마다 찾아오는 가혹한 생체 에너지 소모의 대가였다. 머릿속이 펄펄 끓는 용광로처럼 뜨거워졌고,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몸의 모든 기력이 급격히 빠져나가며 무릎이 꺾이려 했다.
리네는 벽을 짚으며 간신히 버텼다. 하지만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령들의 힘을 과도하게 연결한 부작용으로, 그녀의 왼쪽 눈가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손가락으로 뺨을 훔쳐보니 붉은 피였다.
리네는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눈가의 피를 닦아냈다. 하얀 천 위로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번져나갔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만약 지금 혼절한다면, 건국 연회에서 찾아올 파멸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리네는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억눌렀고, 정령들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보여줘.”
빛의 정령들이 상자 내부의 기밀 계약서 사본을 비추었다. 가공할 정령력의 왜곡장을 시각화한 마법 회로도가 리네의 머릿속에 완벽히 복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석판의 도면이 아니었다. 황실 제단의 ‘혈맥의 맹세’ 규칙을 강제로 흐트러뜨려 폭파시킬 거대한 뇌관 장치의 설계도였다.
그리고 그 회로도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 즉 제단을 강제로 폭주시키기 위한 기폭제 역할을 하는 마력의 원천이 표기되어 있었다.
[아르카디아의 얼어붙은 원천 (凍結源)]
리네의 눈이 크게 써졌다.
그것은 과거 2화에서 아르카디아 정원 뒤편, 가장 깊고 은밀한 구석에 숨겨져 있던 ‘차가웁게 얼어붙은 불씨’였다. 당시 정원의 왜곡장을 정화할 때 미처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하고 봉인해 두었던 그 기묘한 불씨가, 사실은 엘리안이 제단 폭주를 위해 심어둔 거대한 산불 대재앙의 도화선이었던 것이다.
‘그 차가운 불씨가…… 제단을 통째로 폭파해 황실을 소멸시킬 기폭제였다니.’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엘리안은 처음부터 아르카디아 정원을 오염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곳에 심어둔 불씨를 도화선 삼아 제국의 중심인 제단 자체를 날려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복선과 음모의 퍼즐이 하나로 맞춰지는 전율이 리네의 척추를 관통했다.
- 리네, 다 읽었어! 이제 돌아갈래! - 뜨거워, 리네 몸이 너무 뜨거워!
정령들이 걱정스레 리네의 주변을 맴돌았다. 리네는 떨리는 손으로 기밀 문서의 마법 회로도를 머릿속에 완벽히 각인한 뒤, 정령들과의 연결을 끊었다.
스르륵, 벽 너머에서 흘러나오던 마력의 기운이 사라졌다. 침입 탐지 마법의 그물망을 완벽하게 우회해, 제국의 최고 등급 국가 기밀을 단 한 조각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복제해낸 순간이었다.
리네는 벽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은 마치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고, 고열로 인해 시야가 흐릿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했다. 적들의 패를 쥐었으니, 이제 이 도화선을 역으로 이용해 그들을 일망타진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아, 하아…….”
리네는 피 묻은 손수건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 벽을 짚으며 천천히 서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지하 서실을 벗어나 본성으로 통하는 긴 어둠의 통로로 들어섰을 때였다.
사위는 적막했고, 오직 창밖으로 비치는 차가운 달빛만이 대리석 바닥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리네는 로잘린이 기다리고 있을 입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툭.
어둠 속에서 무거운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리네는 멈칫했다.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통로 끝, 달빛조차 닿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둠을 투과하듯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의 주인의 손은, 허리에 찬 검은 칼자루를 천천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바마마.”
리네의 목소리가 철렁 내려앉았다.
디트리히였다. 그는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일까. 리네가 비밀 기밀을 사취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본 것일까. 만약 그가 리네의 행동을 의심해 검을 뽑아 든다면, 그녀는 이 자리에서 즉형을 면치 못할 터였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반쯤 비추었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입가에는 여전히 영약의 쓴맛과 정령의 침식으로 인한 미세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디트리히는 아무 말 없이 리네에게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리네의 심장은 파멸의 카운트다운을 듣는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마침내 디트리히가 리네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리네의 작은 몸을 완전히 덮었다. 디트리히는 검을 뽑는 대신, 천천히 품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꺼내든 것은 눈이 부시도록 정교하게 세공된, 은빛과 청색의 보석이 박힌 훈장이었다. 제국에서 오직 황제와 그가 인정하는 최고의 영웅만이 가질 수 있다는, 제국의 국권 기사 훈장이었다.
디트리히는 거친 손길로 리네의 얇은 옷춉에 그 묵직한 훈장을 달아주었다. 은빛 핀이 옷감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 리네는 숨을 죽였다.
그의 손가락이 리네의 뺨에 닿았다. 눈가의 피는 닦아냈지만,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남아 있는 뺨이었다. 디트리히의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것은 차갑게 얼어붙은 황제의 가면 뒤에 숨겨진, 오직 딸을 잃고 싶지 않은 한 아비의 처절한 갈망이었다.
“아프지 마라.”
디트리히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억누를 수 없는 정령의 침식 독소 때문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 손으로 너를 베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 마라, 리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리네의 이마에 닿았다. 그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제발 살아남아 달라는, 제국의 잔혹한 규칙 앞에서도 딸을 지키고자 하는 폭군의 비명에 가까운 애원이었다.
리네는 가슴 깊은 곳이 찌르르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가 달아준 은빛 훈장을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