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
날카로운 파열음이 어두운 회랑의 침묵을 찢어발겼다. 엘리안 후작의 은빛 검끝이 차가운 불씨의 푸른 심장을 정확히 꿰뚫은 순간이었다. 쩍, 가늘게 갈라진 틈새로 살얼음 같은 한기를 머금은 푸른 마력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와 밤공기를 적셨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었으나, 황궁 앞마당은 여전히 가뭄을 해소한 기적에 도취되어 축제의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환호하는 군중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아득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디트리히의 품에 안겨 있던 리네의 은빛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아이의 뺨은 여전히 불덩이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녀의 영혼을 짓누르는 감각은 뼛속 깊은 곳까지 송곳을 찔러 넣는 듯한 혹한이었다.
"으, 으윽……."
리네의 입술 사이로 가녀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연분홍빛 벚꽃잎 같던 입술은 이미 핏기를 잃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리네! 정신 차려라!"
디트리히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의 거친 손길이 아이의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열기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뜨거웠는데, 신기하게도 리네의 호흡 끝에서는 서리 낀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상반된 두 가지 기운이 아이의 작은 몸 안에서 사납게 충돌하는 중이었다.
쿵! 쿵! 쿵!
그 순간, 황궁 깊은 곳, 아르카디아 정원 뒤편의 깊은 골짜기에서 땅을 울리는 거대한 고동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정령들의 비명이었다.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리네의 뇌리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리네의 정령 소통 능력이 강제로 깨어나며 아르카디아 정원 전체의 공포가 그녀의 감각으로 고스란히 흘러들었다. 정원의 민트색 어린잎들이 일제히 검게 변하며 사시나무 떨듯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전하! 폐하! 아르카디아 뒤편 골짜기에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근위대장이 빗속을 뚫고 달려와 디트리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투구 위로 흘러내리는 빗물은 어째서인지 차가운 얼음 알갱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디트리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주위를 감돌던 부드러운 미풍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칼바람으로 변해 정원의 장미 줄기들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황제의 분노에 조응하듯 황실의 결계가 거칠게 출렁였다.
"불이…… 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불길이 뜨겁지 않고 온 세상을 얼려버리고 있습니다!"
"뭐라?"
디트리히는 리네를 단단히 고쳐 안고 아르카디아 정원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골짜기 너머에서, 기이한 빛깔의 불꽃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것은 붉은 화염이 아니었다. 라벤더빛을 띤 차가운 파란색 불꽃이었다. 파란 불길이 닿는 곳마다 나무와 바위가 타들어 가는 대신, 꽁꽁 얼어붙으며 산산조각이 났다. 빗방울조차 그 불꽃에 닿는 순간 날카로운 고드름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이전 화에서 엘리안이 찔러 넣은 차가운 불씨의 중심핵이 마침내 아르카디아의 왜곡장과 반응하여 폭발한 것이었다. 차가운 산불은 굶주린 야수처럼 아르카디아의 핵심 구역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침식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마법병단과 성기사단을 즉시 투입해라! 당장 불길을 잡아!"
디트리히의 엄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실 마법사들과 성기사들이 골짜기로 달려갔다.
"수류 마법을 준비하라! 물로 불길을 덮어버리는 거다!"
마법병단장의 지휘 아래, 수십 명의 마법사가 일제히 거대한 물줄기를 소환했다. 쏟아지는 폭우에 더해진 엄청난 양의 물이 파란 불길을 향해 쏟아졌다. 일반적인 산불이라면 단숨에 꺼졌을 터였다.
파아앗!
그러나 물줄기가 파란 불꽃에 닿는 순간, 기이한 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채웠다. 물은 증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파란 불꽃의 마력을 흡수하며 순식간에 거대한 얼음 기둥으로 변해 버렸다.
"어, 얼어붙는다! 물이 통하지 않아!"
"안 돼! 뒤로 물러서라!"
얼음은 물줄기를 타고 역류하며 마법사들의 손끝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타고 올라왔다. 미처 마력을 끊지 못한 마법사들의 손가락이 살구빛 피부에서 순식간에 투명한 청백색으로 변해 갔다.
"아아악! 내 손이! 내 손이 얼어 터진다!"
"구해 줘! 몸이 움직이지 않아!"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성기사들이 검을 휘둘러 얼어붙은 동료들을 구하려 했지만, 그들의 철제 검 역시 파란 불꽃의 냉기에 닿자마자 유리창처럼 전면적으로 바스러졌다. 물을 뿌릴수록 불길은 오히려 얼음의 장벽을 만들며 더 거대하게 타올랐다. 마법병단과 성기사단은 제각각 흩어져 비명을 지르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와해 상태였다.
"이런 멍청한 것들……."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직접 검을 뽑아 들려던 그의 품 안에서, 작은 몸뚱이가 다시 한번 크게 들썩였다.
"하아, 하아……."
리네가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의 맑은 빛을 잃고, 아르카디아를 집어삼키고 있는 저 파란 불꽃과 닮은 라벤더빛 마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리네? 정신이 드느냐?"
"폐, 폐하…… 정령들이…… 정령들이 울고 있어요. 아파하고 있어요……."
리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디트리히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학대받던 시절의 기억이 그녀의 무의식을 스치고 지나갔다. 쓸모없어지면 버려진다. 이 정원이 타버리고 황실의 결계가 무너지면, 자신은 가짜 황녀로 낙인찍혀 이 차가운 불꽃보다 더 잔혹한 소멸의 제단 위에 서게 될 터였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 주는 이 품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을 내쫓지 않는 진짜 집을 지켜내야만 했다.
'내가 해야 해. 나만이 저 정령들을 멈출 수 있어.'
리네는 속으로 울부짖으며 자신의 심상 안으로 깊숙이 침잠했다. 그곳에는 붉은 불꽃의 형상을 한 정령, 이그니스가 지루하다는 듯 웅크리고 있었다.
'이그니스!'
리네가 영혼의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흥, 꼬맹이. 바깥이 아주 난장판이더군. 저 시퍼런 불꽃은 내 동포의 찌꺼기다. 아주 비열하고 차가운 놈이지. 저 녀석은 평범한 방법으로는 꺼지지 않아. 사방의 생명력을 다 얼려 죽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다.]
'방법이 있잖아. 네 힘을 빌려줘.'
[내 힘? 난 불의 정령이다. 저 차가운 불꽃을 먹어 치우려면 내 본래의 파괴적인 야성을 해방해야 해. 그렇게 되면 이 정원뿐만 아니라 황궁 전체가 잿더미가 될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그니스의 붉은 눈동자가 리네의 영혼을 꿰뚫어 보듯 빛났다.
[그 대가로 네 빈약한 생체 에너지를 전부 받아 가야 할 텐데? 넌 지금도 고열로 죽어가고 있잖아. 내 힘을 더 쓰면 네 영혼 자체가 저 정화의 불꽃 속에서 녹아 없어질지도 몰른다고.]
리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영혼이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지만, 눈앞의 디트리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가짜라 의심하면서도, 쓰러진 자신을 안고 "바보 같은 녀석"이라며 진심으로 슬퍼해 주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처음으로 받아본 온기였다. 이 온기를 잃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었다.
'상관없어. 내 마기와 생명력을 전부 가져가도 좋아. 대신 저 푸른 화기를 네 안으로 흡수해 정화해 줘. 영혼의 방패막을 만들어서, 정원이 다치지 않게 가두는 거야.'
[정말 미련한 인간 꼬맹이로군. 하지만…… 그 지독한 고집은 마음에 들어. 거래는 성립이다.]
쿠우웅!
리네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은빛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디트리히가 만류할 틈도 없이, 리네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바닥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아이의 작은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그녀의 주위로 은빛과 파란색이 뒤섞인 영혼의 융합 방패막이 반구 형태로 거대하게 펼쳐졌다.
"리네! 안 된다!"
디트리히가 손을 뻗었지만, 리네의 몸을 감싼 방패막의 반발력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다. 황제의 가공할 마력조차 정령과 영혼이 융합된 절대적인 결계 앞에서는 튕겨 나갔다.
사박, 사박.
리네는 비틀거리면서도 똑바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작은 뒷모습은 마치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한 송이 은빛 장미 같았다.
골짜기 중심부, 엘리안이 심어 놓은 차가운 불씨의 심장이 시퍼런 빛을 내뿜으며 요동치고 있었다. 그 주위로 수십 명의 마법사가 얼어 죽어 가며 만든 얼음 조각들이 기괴하게 널려 있었다. 제국의 정예병들이 단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던 그 파멸적인 재앙의 중심지로, 겨우 일곱 살 남짓한 어린 소녀가 홀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오지 마…… 아르카디아를 아프게 하지 마……."
리네가 양손을 뻗어 푸른 불꽃의 심장을 감싸 안았다.
화아아악!
푸른 불꽃이 리네의 몸을 덮쳤다. 뜨거움이 아닌, 영혼까지 얼려버릴 듯한 극독의 냉기가 리네의 혈관을 타고 급격히 흘러들었다.
"아, 아아……!"
리네의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그녀의 살구빛 피부가 순식간에 청백색으로 물들며, 손끝에서부터 딱딱한 얼음이 덮여 오기 시작했다. 푸른 화기를 온몸으로 직접 흡수하는 정화 의식의 대가였다. 아이의 몸은 정령들의 폭주를 막기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
"리네――!!"
디트리히의 눈이 붉게 뒤집혔다.
그의 눈앞에서 아이가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가짜 황녀일지도 모른다고, 늘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 아이가, 지금 제국의 파멸을 막기 위해 제 한 몸을 아낌없이 던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디트리히의 가슴 속에 깊이 박혀 있던 잔인한 의구심을 단숨에 부수어 버렸다. 가짜든 진짜든 상관없었다. 이 아이는 그의 딸이었다. 그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야 할 유일한 존재였다.
"감히 내 앞에서 내 딸을 빼앗아가려 하느냐!"
디트리히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에 깃든 대지 파괴의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쿠구구구궁!
황제가 검을 내휘두르자, 아르카디아 정령림의 거대한 고목들이 단숨에 베어져 나가며 불씨의 심장을 향한 일직선의 길이 뚫렸다. 대지를 가르는 지진과도 같은 위세였다. 디트리히는 무너져 내리는 얼음 파편과 칼날 같은 냉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리네가 있는 불꽃의 심장부를 향해 미친 듯이 난입했다.
"비켜라, 정령들이여!"
그의 포효가 정원을 뒤흔들었다. 정령들이 황제의 가공할 살기에 겁을 먹고 주춤하는 사이, 디트리히는 마침내 푸른 불꽃의 중심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리네가 있었다.
리네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푸른 불씨의 핵심을 자신의 가슴 속으로 완전히 끌어안았다. 쉭, 소리와 함께 사방을 얼려버리던 파란 산불이 거짓말처럼 리네의 몸 안으로 흡수되며 소멸했다. 혹한의 불이 사라진 자리에는, 완전한 정화의 기운이 깃든 맑고 포근한 민트색 정령의 안개가 아르카디아 정원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기 시작했다. 정원의 오염된 핵심 구역이 마침내 완벽하게 정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적의 대가는 가혹했다.
"……폐, 하……."
리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푸른 불꽃을 모두 흡수한 그녀의 몸은 마치 정교하게 조각된 얼음 인형처럼 투명하고 차갑게 굳어 가고 있었다. 아이의 호흡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툭.
리네의 힘없는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 디트리히가 그녀를 품에 받아안았다.
"리네! 정신 차려라! 눈을 떠라!"
디트리히는 리네의 뺨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촉감은 시신처럼 차가웠다. 아이의 가슴은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았다. 숨이 멎은 것이었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다. 네가 나를 두고 이렇게 갈 리가 없어!"
제국을 공포로 지배하던 냉혹한 폭군 황제의 눈에서, 일평생 단 한 번도 흐른 적 없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리네의 차가운 뺨을 적셨다. 눈물이 닿은 자리의 얼음이 미세하게 녹아내렸지만, 아이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디트리히는 리네의 식어버린 몸을 품에 터질 듯이 꼭 껴안았다. 그의 가슴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절망과 분노가 황궁 전체를 뒤흔드는 마력의 폭풍이 되어 울부짖었다.
황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신을 향한 잔혹한 살기와 형언할 수 없는 격분이 서려 있었다.
"기어코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신이여! 대답해라!"
그의 야수 같은 절규가 빗소리를 뚫고 밤하늘을 찢어발겼다. 냉혈한 폭군의 완벽한 공포와 절망이 아르카디아 정원의 깊은 어둠 속으로 메아리쳤다. 숨이 멎어가는 아이를 안은 황제의 통곡 속에서, 정화된 정원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