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황궁의 피비린내를 견디며 내 곁에 남겠느냐?"
디트리히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리네의 귓가를 무겁게 파고들었다. 볼에 닿은 그의 커다란 손가락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가냘픈 목뼈를 부러뜨릴 수 있을 만큼 단단했으나, 동시에 주체할 수 없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단을 속인 가짜라면 그 즉시 손수 목을 베어 소멸시켜야 하는 혈맥의 맹세. 그 무시무시한 시스템의 칼날 위에 서 있으면서도, 폭군이라 불리는 사내는 눈앞의 아이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리네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보육원에서 가죽 채찍이 날아올 때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던 버릇이 튀어나오려 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가슴 깊은 곳에서 얼음 가시처럼 돋아났다. 하지만 리네는 도망치는 대신, 오히려 뺨을 그의 거친 손바닥에 조금 더 깊숙이 묻었다.
따스했다. 살을 베어 물 것 같은 황궁의 칼바람 속에서, 디트리히의 손바닥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뜨거웠다.
"네, 아버지."
리네는 억지로 떨림을 누르며, 가장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아버지가 계신 이곳이 좋아요. 아무리 춥고 무서워도, 아버지가 계신다면 어디든 제 집이에요."
아이의 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올곧은 대답에 디트리히의 붉은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잔인한 맹세의 제단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가짜를 단죄하라며 음산한 울림을 토해내고 있었지만, 디트리히는 들끓는 경고를 짓누르듯 리네를 품에 안았다. 부서질까 염려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포옹이었다.
그 애틋한 온기를 깨뜨린 것은 정원 입구에서 들려온 다급한 발소리였다.
"폐하! 리네 황녀 전하!"
황실의 규율을 목숨처럼 여기는 수석 시녀 로잘린이 예법도 잊은 채 허겁지겁 정원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의 단정한 머리칼은 흙먼지로 푸석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늘 침착하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슨 무례냐, 로잘린."
디트리히가 리네를 제 품 뒤로 숨기며 싸늘하게 물었다. 로잘린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죽여주옵소서, 폐하! 하나 바깥의 상황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남부 영지에서 시작된 가뭄이 수도까지 들이닥쳐, 황궁 외곽의 우물마저 전부 말라붙었나이다. 성난 백성들이 궁문 앞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이고 있사옵니다!"
"가뭄이라니? 황실의 결계가 버티고 있는 한 수도의 젖줄은 마르지 않는다."
"그것이…… 엘리안 후작의 사절단이 흘린 소문 때문에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옵니다. 황실에 '부정한 피'가 들어와 제단의 분노를 샀고, 그 때문에 대지가 저주를 받아 물을 거두었다는 유언비어가 온 도성에 퍼졌나이다!"
로잘린의 시선이 디트리히의 등 뒤에 숨은 리네에게로 향했다. 걱정과 초조함이 한데 뒤섞인 눈빛이었다.
리네는 마른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엘리안 후작. 황실을 전복하려는 그 영리하고 잔인한 독사가 결국 움직인 것이다. 백성들의 생존과 직결된 가뭄을 이용해 가짜 황녀인 자신을 끌어내리고, 디트리히마저 파멸시키려는 간계였다.
"하늘이 타들어 가는 것 같사옵니다. 지금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면 백성들이 폭도로 돌변해 궁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옵니다."
로잘린의 말대로 정원 너머 먼 도성의 하늘은 불길한 살구빛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먼지바람이 코끝을 매캐하게 찔렀다. 대지가 갈증으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리네의 영성 감각을 타고 찌르르하게 전해졌다.
'이건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야.'
리네는 아르카디아 정원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파동에 집중했다. 정원의 물을 관장하는 물의 정령, 로렐라이의 영역에서 터무니없는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비명은 맑은 물소리가 아니라, 찐득하고 더러운 진흙이 끓는 듯한 탁한 파동이었다.
"아버지, 잠시만요."
리네는 디트리히의 옷자락을 살포시 쥐었다가 놓았다.
"제가 가봐야 할 곳이 있어요. 정원의 정령들이 아파하고 있어요."
"리네, 위험하다. 지금 아르카디아의 왜곡장은 극도로 불안정해."
디트리히가 만류하려 손을 뻗었으나, 리네는 이미 은빛 장미 덩굴 사이로 몸을 날린 뒤였다. 리네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뿐인 갈망이 번뜩였다. 어렵게 찾은 이 따뜻한 집을, 자신을 안아준 아버지를 절대 잃지 않겠다는 처절한 의지였다.
아르카디아의 가장 깊은 구역, '속삭임의 호수'에 도달한 리네는 숨을 들이켰다.
아름다운 크림빛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있던 호수는 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검붉은 오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대한 수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호수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는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매캐한 악취를 풍겼다.
샤아아아아—!
수면 위로 거대한 물줄기가 솟구쳤다. 그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온몸이 시커먼 진흙과 오물로 뒤덮여 괴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의 정령 로렐라이였다. 그녀는 고통에 겨워 울부짖으며 주변의 나무들을 닥치는 대로 꺾어발기고 있었다. 통제력을 잃은 정령은 그 자체로 거대한 홍수이자 재앙이었다.
"로렐라이!"
리네가 호숫가로 다가서며 소리쳤다.
로렐라이의 텅 빈 눈동자가 리네를 향했다. 정령은 가차 없이 거대한 진흙 폭풍을 일으켜 리네를 쓸어버리려 했다. 날카로운 물줄기가 뺨을 스치며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 아파! 숨을 쉴 수 없어! 검은 독극물이 내 심장을 찌르고 있어! ]
정령의 비명이 뇌리를 강타하자 리네는 비틀거렸다. 동시에 골든핑거인 영성 소통 능력을 가동한 대가가 그녀의 몸을 덮쳤다.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려지며 연보랏빛 환각이 아른거렸다. 생체 에너지가 급격히 빠져나가며 무릎이 꺾이려 했다.
'정신 차려야 해. 여기서 쓰러지면 모두가 죽어.'
리네는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호수 바닥을 노려보았다. 로렐라이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호수 깊은 곳에, 기이하게 번쩍이는 검은 고대 마도구가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던져놓은 오물 마법의 원천이었다. 엘리안이 심어놓은 덫이 분명했다.
[ 저리 가! 인간들은 모두 비열해! 우리를 가두고, 오염시키고! ]
로렐라이가 더욱 광포하게 날뛰며 날카로운 얼음 창들을 허공에 만들어냈다. 그것들이 리네를 향해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리네는 도망치는 대신, 오히려 차가운 오물 호수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로렐라이, 날 봐!"
리네의 목소리에 깃든 영성의 힘이 잔잔하게 전진했다.
"나도 너처럼 갇혀 있었어. 어두운 곳에서 매일 매질을 당하며 숨도 쉬지 못했지. 아무도 날 구하러 오지 않았어."
얼음 창들이 리네의 코앞에서 멈칫하며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나에겐 지키고 싶은 안식처가 생겼어. 널 아프게 한 건 내가 반드시 치워줄게. 그러니까 제발, 나를 믿어줘."
리네는 깊은 수렁 속으로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오염된 독기가 리네의 하얗고 고운 팔을 검게 물들이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리네는 이가 깨질 정도로 입술을 사려 물었다. 온몸을 불태우는 듯한 고열이 솟구쳤다. 뺨은 발갛게 상기되었고, 눈가에는 고통 어린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빛 정화의 온기는 멈추지 않았다.
스스스스……!
리네의 손이 마침내 호수 바닥의 검은 마도구에 닿았다. 그녀는 악력을 다해 그 부정한 쇠붙이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극통 속에서도, 온 힘을 다해 정령의 마력을 체내로 이끌어내어 마도구의 결계를 부수어 나갔다.
"흐읍……!"
마침내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마도구가 산산조각 나며 파괴되었다.
동시에 리네의 손끝에서 시작된 눈부신 은빛 마력이 오염된 호수 전체로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검은 진흙들이 기적처럼 맑고 영롱한 하늘빛 물방울로 정화되기 시작했다.
[ 아아…… 시원해. 맑은 숨이 쉬어져. ]
로렐라이의 괴기스러운 울부짖음이 감미로운 노랫소리로 변해갔다. 진흙을 벗어던진 물의 정령은 눈부시게 투명한 하늘빛 자태를 드러내며 리네의 주위를 부드럽게 맴돌았다. 정령은 고마움의 표시로 리네의 화상 입은 손을 차가운 물방울로 부드럽게 감싸 안아 치유해 주었다.
그러나 기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화된 로렐라이가 하늘을 향해 양손을 뻗자, 아르카디아 호수의 맑은 물이 거대한 물기둥이 되어 천장을 뚫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쿠르릉—!
타들어 가던 붉은 살구빛 하늘에 순식간에 거대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이내, 기적 같은 소리가 온 도성에 울려 퍼졌다.
투둑, 투두둑.
빗방울이었다. 마르고 갈라진 대지 위로, 장엄하고도 따뜻한 단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도 광장에 모여 황궁을 향해 돌을 던지려던 백성들의 손이 멈추었다. 그들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만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다! 비가 내린다!"
"하늘이 황실의 죄를 사하셨다! 아니, 황녀 전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황궁 정문 앞에 모여 있던 귀족들과 사절단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빗방울에는 단순한 물이 아닌, 아르카디아의 신성한 정령력이 깃들어 있어 닿는 곳마다 마른 대지를 순식간에 푸르게 되살려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실의 정통성을 의심하던 여론은 단 한 순간에 찬사로 뒤바뀌었다.
"황녀 전하 만세!"
"신의 축복을 받은 은빛 황녀 전하 만세!"
궁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백성들의 거대한 환호성이 황궁 안마당까지 메아리쳤다. 가짜라며 그녀를 음해하던 목소리들은 단숨에 씻겨 내려갔다. 완벽한 격상 반격이었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은 정작 바닥으로 무너지듯 쓰러지고 있었다.
"리네!"
디트리히가 바람처럼 달려와 쓰러지는 리네를 받아안았다. 아이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생체 에너지를 급격히 소모한 탓에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었다.
"바보 같은 녀석이…… 왜 이렇게까지 한 것이냐."
디트리히는 자기도 모르게 리네를 품에 꼭 껴안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자신의 목숨을 걸고 황실을 구한 아이를 향한 깊은 부성애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제단의 맹세 따위는 이제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 아이는 그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진짜 딸이었다.
같은 시각, 성대한 축복의 빗소리가 울려 퍼지는 황궁의 그늘진 회랑.
엘리안 후작은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백성들의 환호성과 황실의 위상 격상은 그의 계산에 없던 일이었으나,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빛을 반짝였다.
"기적을 부리는 가짜라니, 제법이구나."
그는 품속에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차가운 불씨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아르카디아 정원 뒤편에서 몰래 채취한, 차갑게 얼어붙어 있으나 언제든 사방을 집어삼킬 수 있는 재앙의 불씨였다.
서걱.
엘리안은 가차 없이 차가운 검끝으로 그 불씨의 중심핵을 찔렀다. 미세한 균열이 가며, 얼어붙어 있던 불씨 속에서 시퍼런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기적이 언제까지 네 목숨을 지켜줄 수 있을지 보자꾸나, 가짜 황녀님."
어둠 속에서 그의 잔인한 독백이 빗소리에 묻혀 흩어졌다. 대재앙의 서막이 소리 없이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