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피잉— 삐이이이—

귀를 찢을 듯한 기괴한 이명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엘리안이 들고 있는 보석 상자 안, 연민트색 정령석 귀걸이의 잘게 갈라진 틈새로 붉은 마력이 실타래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뱀처럼 허공을 훑으며 리네의 숨결을 향해 붉은 아가리를 벌렸다. 조금이라도 저 마력이 피부에 닿는 순간, 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혈맥의 맹세’가 격발하여 황실의 결계가 무너져 내릴 터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 하나, 디트리히의 손에 의한 즉각적인 참수였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등허리를 타고 가파른 소름이 돋아났다. 보육원 시절, 가죽 채찍이 허공을 가를 때 느꼈던 날것의 공포가 뇌리를 스쳤다.

‘들키면 죽어. 여기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거야.’

자기방어 기제가 비명을 질렀다. 리네는 떨리는 숨을 아랫입술 안쪽으로 집어삼켰다. 붉은 눈을 번뜩이며 혈맥 검사 마력을 뿜어내는 마도구의 파동이 점점 더 가팔라졌다. 엘리안의 입꼬리가 승리감으로 비틀려 올라가는 그 찰나의 순간, 리네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영성 소통의 감각이 깨어났다.

리네는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주변의 공기 중에 흩어져 있는 미세한 정령들의 숨결을 소리 없이 불렀다.

‘도와줘. 저 붉은 빛을 가려 줘. 아주 잠깐이면 돼.’

그 부름에 응답하듯, 연회장 구석의 화분에서 피어난 보이지 않는 바람의 정령들이 리네의 손끝으로 모여들었다. 살구색 뺨 위로 스치는 미풍은 지극히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공간의 흐름을 왜곡하는 서늘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리네는 왼손을 가볍게 뻗어 엘리안이 내민 보석 상자 위를 쓸듯이 지나쳤다.

스아아아—

미세한 바람의 장막이 귀걸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레몬빛을 띤 정화의 마력이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 붉게 타오르던 혈맥 탐지 마력의 진동을 부드럽게 억눌렀다. 징그러운 이명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요동치던 귀걸이는 다시 평온하고 투명한 연민트색 광채만을 내뿜는 평범한 보석으로 되돌아갔다.

엘리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리네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보석을 제게 바치시다니, 사절단의 정성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엘리안 경."

목소리는 맑고 잔잔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지만, 리네의 얼굴에는 오직 황녀다운 온화한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최근 앓았던 열병으로 인해 아직 귀가 조금 예민하답니다. 직접 착용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은 저의 전용 보석함에 소중히 보관하도록 하지요. 로잘린, 상자를 받아 가 주시겠어요?"

대기하고 있던 로잘린이 신속하게 걸어 나와 엘리안의 손에서 보석 상자를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엘리안은 미처 손을 뻗지 못한 채, 허공에 멈춘 자신의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미세하게 솟았다가 사라졌다.

"……황녀 전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엘리안이 이빨을 악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위기는 넘겼으나 대가는 가혹했다. 단 몇 초 동안 정령력을 극도로 압축해 사용한 탓에, 리네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속이 메슥거렸다.

* * *

그날 밤, 숨이 막힐 듯한 연회장을 빠져나온 리네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아르카디아 정원으로 향했다.

황궁의 중심부에 은밀히 봉인된 아르카디아는 밤이 되자 한층 더 기괴하고 치명적인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정원의 초입에는 몽환적인 라벤더빛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고,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의 파우더블루색 이끼가 슥슥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다.

"하아, 하아……."

리네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기적을 부린 대가로 찾아오는 특유의 고열이 혈관을 타고 뜨겁게 요동쳤다. 머릿속이 펄펄 끓는 가마솥 같았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잠들고 싶었지만, 아르카디아의 왜곡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진동이 그녀를 이끌었다.

정원의 정화를 방해하려는 엘리안의 간계가 이곳에도 미치고 있었다.

스스슥.

덩굴 뒤편, 크림색 장미 넝쿨 너머에서 정체불명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리네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바스락거리는 철제 갑옷의 마찰음. 황실 기사단의 정식 규격이 아닌, 은밀하게 개조된 검은 경갑을 입은 사내가 정원의 핵심 결계석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사내의 손에는 정령의 왜곡장을 강제로 폭주시킬 수 있는 오염된 마도구가 들려 있었다.

엘리안이 보낸 간첩이었다. 리네의 실체를 캐내고, 아르카디아를 폭주시켜 황궁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려는 자가 분명했다.

그녀의 등 뒤에서 붉은 불꽃 송이가 둥실 떠올랐다.

"어이, 꼬맹이. 저 쥐새끼는 뭐야? 아주 맛없게 생겼는데, 그냥 태워 버려도 돼?"

불의 정령 이그니스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속삭였다. 그의 불꽃이 일렁일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아지랑이치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그니스의 본질은 거대한 산불이자 파괴적인 자연재해였다. 조금만 방심해도 정원 전체가 잿더미로 변할 터였다.

리네는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그니스, 저 인간을 죽이면 냄새가 나고 시끄러워져요. 하지만 우리 정원에 허락 없이 들어온 벌은 주어야겠지요."

"오호? 어떻게?"

"뼈는 부러뜨리지 말고, 가볍게 구워 주세요.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일 엄두도 내지 못하게."

리네의 단호한 목소리에 이그니스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아주 마음에 드는 타협안이야!"

순식간에 정원의 공기가 반전되었다. 라벤더빛 안개가 증발하며, 사방에서 거대한 화염의 장벽이 솟구쳤다.

"화, 화염?! 어떻게 갑자기?!"

간첩 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미 그의 탈출로는 완전히 차단된 후였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붉은 불꽃 폭풍은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대지를 집어삼키는 산불의 위압감이 좁은 공간에 압축되어 기사에게 쏟아졌다.

"으아아아악! 살려줘! 살려다오!"

기사의 검은 갑옷이 붉게 달아오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과 눈썹이 순식간에 타들어 갔고, 살가죽이 구워지는 끔찍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그니스는 그의 목숨을 완벽히 끊지 않는 선에서, 온몸에 지울 수 없는 화상과 극도의 공포를 새겨 넣었다.

거대한 화염 구덩이 속에서 처참하게 구부러진 채 비명을 지르던 기사는, 결계의 틈새로 간신히 기어 나가 도망쳤다. 엘리안에게 돌아가 정령의 분노가 얼마나 끔찍한지 온몸으로 증언하게 될 터였다.

"후우……."

화염이 가라앉자 리네는 벽을 짚고 간신히 버텼다. 침입자를 물리쳤다는 안도감도 잠시, 체내의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며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때, 정원의 더 깊은 곳, 시들어가는 은빛 장미 정원 방향에서 무겁고 거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쿨럭!

리네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엎드려 있었다. 제국의 지배자이자, 자신을 언제든 죽일 수 있는 폭군 황제, 디트리히였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은빛 장미 줄기를 붙잡고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와, 시들어가는 꽃잎 위를 적셨다. 평소의 압도적인 위압감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파괴적인 정령의 침식에 고통받는 한 남자의 처절한 실루엣만이 남아 있었다.

디트리히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품 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려다 놓쳤다. 유리병은 바닥을 굴러 리네의 발밑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빈 병이 아니었다. 종이 봉투에 싸인, 미세한 균열이 간 고대 영약병이었다.

리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그 봉투를 주워 올렸다. 봉투 표면에는 황실 직인이 찍혀 있었고, 안쪽에는 정령의 침식을 억제하는 극독의 성분이 묻어 있었다.

‘이건…… 정령 마력 억제제?’

황제는 정령들의 파괴적인 힘에 매일같이 침식당하고 있었다. 제국을 지키는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이 썩어 들어가는 줄 알면서도 이 끔찍한 독약을 매일 복용해 온 것이다. 그의 강함은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유지하는 모래성 위의 기적이었다.

부스럭.

리네가 움직이는 소리에 디트리히의 붉은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누구냐."

지옥의 심연에서 끌어올린 듯한 목소리였다. 디트리히는 순식간에 신형을 움직여 리네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거대한 손이 리네의 가냘픈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억!"

숨이 턱 막혔다. 디트리히의 손아귀는 힘이 들어가 떨리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들켰다는 분노와, 동시에 가짜 혈통을 즉시 처단해야 한다는 황실의 맹세가 복잡하게 얽혀 요동치고 있었다.

"보았느냐."

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았다. 당장이라도 손가락바닥에 힘을 주면 리네의 목뼈는 부러질 것이었다.

보육원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원장이 가죽 채찍을 들고 다가올 때, 리네는 항상 바닥에 머리를 박고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여기서 비굴하게 굴거나 도망치려 한다면, 이 철저하고 냉혹한 황제는 자신을 단숨에 지워 버릴 터였다.

리네는 도망치지 않았다. 두려움으로 떨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들어 디트리히의 붉은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작은 두 손이 디트리히의 목을 쥐고 있는 거칠고 단단한 손등 위를 포개어 잡았다. 그의 손등은 검붉은 마력의 침식으로 인해 군데군데 갈라지고 차갑게 식어 있었다.

따스함이 전해졌다. 리네가 가진 영성 정화의 온기가 그의 거친 피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의 괴물 같은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거나, 혐오감을 드러냈을 터였다. 하지만 이 작고 가냘픈 아이는 그의 상처투성이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차가운 고통을 나누어 가지려는 듯, 온 힘을 다해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아버지……."

리네의 갈라진 목소리가 고요한 정원에 울려 퍼졌다.

"많이…… 아프십니까?"

그 한마디에 디트리히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맹세의 규율은 그녀를 가짜라 소리치며 베어 버리라 머릿속에서 경고하고 있었지만, 그의 손끝에 닿은 기적 같은 온기는 그의 차가운 영혼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건방진 짓을."

디트리히는 앓는 듯한 신음을 내뱉으며 리네를 거칠게 밀쳐냈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리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디트리히는 자신의 흔들리는 손을 꽉 움켜쥐며 뒤를 돌았다.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

아르카디아의 지하 깊은 곳, 제단의 근원이 위치한 어둠 속에서 불길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정원을 거칠게 휩쓸며, 시들어가는 은빛 장미 꽃잎들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 바람을 타고,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고대의 목소리들이 리네의 머릿속에 직접 박히기 시작했다.

[ 가짜다. ] [ 황실의 피가 흐르지 않는 비천한 자가 제단을 모독하고 있다. ] [ 맹세를 깨뜨린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

제단의 근원 정령들이 리네의 신분을 폭로하기 위해 지하에서 깨어나 웅성거리는 환청이었다. 그들의 음산한 속삭임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어 결계를 무너뜨릴 기세였다.

리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디트리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리네를 바라보았다. 그의 거친 손길이 다시 다가와, 이번에는 바르르 떨리는 리네의 하얀 뺨을 슬프게 매만졌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피할 수 없는 파멸의 그림자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리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내 친자식이든, 혹은 제단을 기만한 가짜이든 상관없이……."

디트리히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타고 내려와 턱끝을 가볍게 쥐었다.

"이 황궁의 피비린내를 견디며 내 곁에 남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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