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독안개는 굶주린 맹수의 아가리처럼 턱밑까지 밀려와 있었다.

한 걸음. 리네가 그 연보랏빛 장벽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폐부 깊숙이 타는 듯한 통증이 들이쳤다.

쉭, 쉬이익!

스치기만 해도 살갗을 그을려 버리는 가혹한 열기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리네의 발목 위로 보랏빛 독기가 휘감기더니, 순식간에 살비듬이 까맣게 변하며 진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바늘 수천 개가 동시에 살을 찌르는 듯한 작열감에 리네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비명을 지르면 목구멍 안으로 이 지독한 안개가 쏟아져 들어올 것이 뻔했다.

'아파, 아파서 미칠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지만, 리네는 눈을 부릅떴다. 여기서 쓰러지면 끝이었다. 황제 디트리히는 사흘의 유예를 주었을 뿐, 만약 이 정원을 잠재우지 못한다면 언제든 자신을 가짜라 규정하고 목을 벨 터였다. 살아야 했다. 이 따뜻한 황궁에서, 비록 오해로 시작된 자리일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온전한 자신만의 안식처를 지켜내야 했다.

귀를 찢는 듯한 이명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 살려줘! 아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 더러워, 저리 가! 다 태워 버릴 거야! 모두 휩쓸어 버릴 거야!

물과 바람의 정령들이 내지르는 처절한 불협화음이었다. 서로의 꼬리를 물고 뜯으며 비명을 지르는 정령들의 목소리가 리네의 영혼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왜곡된 마력으로 오염된 아르카디아의 정령들은 제어 장치를 잃은 자연재해와 같았다.

"공주님! 당장 물러서십시오! 이건 일개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결계 왜곡이 아닙니다!"

뒤를 지키던 황실 마법사단의 일원, 펠릭스가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푸른색 마법 로브가 거센 독풍에 펄럭였다. 펠릭스를 비롯한 서너 명의 엘리트 마법사들은 리네를 불신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보육원 출신의 뼛속까지 미천한 아이가 황녀의 이름을 사칭해 황궁을 어지럽힌다고 믿는 이들이었다.

"비키십시오, 가짜 공주님. 황실 마법사단이 이 폭주를 힘으로 제압할 테니."

펠릭스가 오만한 손짓으로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의 지팡이 끝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청색 마법진이 층층이 전개되었다.

"바람의 대폭풍이여, 광포한 안개를 밀어내고 길을 밝혀라! [윈드 가스트]!"

귀를 찢는 폭풍음과 함께 거대한 압축 공기의 대포가 독안개의 한복판을 향해 격렬하게 뿜어져 나갔다. 마법사들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정령 따위는 강력한 마법 장벽과 물리적인 힘으로 짓눌러 굴복시키면 그만이라는 지성파 마법사들의 오만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콰아아앙!

공격적인 마력 파동이 아르카디아의 기류를 건드리자, 왜곡장 내부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맑디맑은 하늘빛이어야 할 물의 정령들이 시커먼 진흙빛 해일로 변해 솟구쳤다.

― 감히 우리를 억누르려 해? 죽여 버릴 거야!

비명은 분노로 바뀌었다. 수천 개의 칼날로 화한 얼어붙은 홍수 파편들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슈아아악! 날카로운 물방울들이 마법사들을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끄악!" "마, 마법 장벽이 찢어진다! 차단막을 더 굳건히 해라!"

펠릭스의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마법사들이 다급히 지팡이를 휘둘러 방어막을 쳤지만, 분노한 정령들의 발악은 인간의 마나로 감당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콰직, 소리와 함께 푸른 방어막에 사방으로 균열이 갔다. 깃털처럼 가벼워야 할 바람은 단단한 바위마저 두 동강 낼 듯한 폭풍의 낫이 되어 마법사들의 어깨와 다리를 사정없이 베어 넘겼다.

"이, 이럴 리가 없다! 왜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거지? 왜 더 거세지는 거냐!"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마법사들의 등 뒤에서, 리네는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을 뻗어, 리네는 가슴 깊은 곳의 영성을 끌어올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이 힘을 쓰는 순간, 제 수명과 생체 에너지가 실시간으로 깎여 나갈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몸 안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하지만 무기를 들고 날뛰는 강도에게 몽둥이를 휘둘러 봐야 싸움만 커질 뿐이다. 저 정령들은 지금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전부…… 멈추세요."

리네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사방을 뒤흔드는 폭풍 속에서도 기묘할 정도로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공주님! 미쳤습니까? 어서 대피를……!" "시끄러워요."

리네는 차가운 눈빛으로 펠릭스를 쏘아보았다. 매번 남의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굴던 고아 소녀의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살기 위해, 그리고 눈앞의 상처 입은 존재들을 달래기 위해 극도로 집중한 프로페셔널한 정령사의 눈빛이었다.

"더 자극하면 우리 모두 여기서 뼈도 못 추려요. 마법을 거두고 뒤로 물러서세요. 이건 '대화'로 풀어야 하는 문제예요."

"대화라니, 저 미쳐 날뛰는 재앙들과 무슨 대화를 한다는 겁니까!"

펠릭스가 핏대를 세웠지만, 리네는 이미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리네는 천천히 독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살을 찢는 비바람이 전신을 때렸지만, 그녀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리네의 입술이 가만히 열리며, 인간의 언어가 아닌 영혼의 파동이 흘러나왔다.

[가여운 아이들아, 얼마나 오랫동안 차가운 어둠 속에서 울고 있었니.]

웅성거리던 바람이 일순간 멈칫했다.

리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연스카이블루빛 정령력이 파도처럼 잔잔하게 정원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마법사들의 강압적인 마력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정령들의 상처를 감싸 안고, 그들의 슬픔을 온전히 제 몸으로 나누어 받겠다는 숭고하고도 위험한 갈망의 파장이었다.

스으으으.

리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생체 에너지가 급격히 소모되며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들고 싶다는 유혹이 발끝부터 차올랐다. 하지만 리네는 혀끝을 깨물며 정신을 붙잡았다.

[이리 오렴. 너희를 가둔 어둠을 내가 씻어 줄게. 그러니까, 제발 비명을 멈춰 줘.]

진심 어린 영성의 외침에, 날카롭게 날 서 있던 물의 파편들이 허공에서 멈추어 섰다.

시커멓게 오염되어 있던 해일의 정령이 리네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물뱀의 형상을 한 정령은 리네의 가냘픈 뺨가로 다가와 냄새를 맡듯 맴돌았다. 조금만 어긋나도 머리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는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

펠릭스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숨도 쉬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리네는 두려움을 누르고 손을 뻗어, 물뱀의 차가운 턱밑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스르륵.

리네의 손길이 닿은 곳에서부터, 시커먼 독기가 씻겨 내려가며 맑고 투명한 애프리콧빛과 라벤더빛 마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가을 하늘 아래 피어난 잔잔한 코스모스 꽃밭처럼, 정령의 몸이 아름다운 파스텔톤의 빛깔로 정화되어 갔다.

― 아…… 따뜻해. 이 손길, 아주 오래전에 느껴 본 적이 있어. ― 맑아져. 가슴속을 찌르던 가시가 녹아내려.

바람의 정령들도 낮게 웅얼거리며 리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거칠게 불어닥치던 독풍은 어느새 어린아이의 뺨을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산들바람으로 변해 있었다.

"이럴 수가……."

펠릭스의 지팡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황실 마법사단 전체가 매달려도 단 일 인치조차 정화하지 못해 절망했던 아르카디아의 왜곡장이, 단 한 명의 어린 소녀가 뻗은 손길 아래 거짓말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힘으로 굴복시키려 할 때는 죽일 듯이 날뛰던 정령들이, 리네의 앞에서는 마치 온순한 길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애교를 부리는 실태였다.

압도적인 격차였다. 지성이라 자부하던 마법사들의 오만함이 사정없이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리네는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마지막 남은 영성력을 쥐어짜 정원의 중심부를 향해 파장을 보냈다.

화아아아악!

회색빛 안개 장벽이 순식간에 걷히며, 정원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광경이었다. 하늘에서는 연스카이블루빛 이슬비가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고, 바닥에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라벤더빛 들꽃과 민트빛 덩굴들이 기적처럼 싹을 틔우며 만개해 갔다. 탁하게 고여 있던 연못물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게 정화되어, 은빛 정령 나비들이 그 위를 팔랑거리며 날아다녔다.

"정원이…… 살아났어."

저 멀리 결계 경계선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궁의 하인들과 경비병들이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그들의 눈에 비친 리네는 더 이상 보육원에서 굴러들어 온 천한 가짜가 아니었다. 황실을 좀먹던 재앙의 근원을 단숨에 잠재운, 신비롭고 위대한 구원자 그 자체였다.

"공주님…… 만세!" "신의 축복이 황녀 전하께!"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경비병들과 하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날 선 의심 대신, 깊은 경외심과 감격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기적의 대가는 너무나 잔혹했다.

"윽……."

정화가 끝나자마자, 리네의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지독한 열기가 뼈마디를 녹여 버릴 듯이 들끓었다. 눈앞이 흐려지며 사방이 핑글핑글 돌았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피비린내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스르륵, 리네의 작은 몸이 바닥을 향해 무너져 내렸다.

"공주님!"

저 멀리서 서류를 품에 안고 달려오던 시녀장 로잘린이 비명을 지르며 리네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로잘린보다 더 빠른 그림자가 있었다.

철컥!

묵직한 판갑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황제를 직속으로 보좌하는 황실 근위기사단장과 기사들이 리네의 앞을 가로막듯 내려앉았다. 그들은 쓰러지려는 리네를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땅에 박았다.

"기사단 전체는 이 시간부로 황녀 전하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보호한다!"

기사단장의 우렁찬 선언이 정원에 울려 퍼졌다. 오직 황제만을 위해 움직이던 철혈의 기사들이, 이제는 리네라는 존재를 제국의 정당한 황녀이자 수호자로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는 순간이었다.

리네는 가늘게 눈을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해냈어…… 일단은 살았어…….'

안도감이 밀려오는 것도 잠시, 리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고개를 들어 정원 너머 황궁의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정화된 해일의 정령이 승천하듯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아름다운 물보라를 일으키는 그 순간, 물보라 뒤편의 황궁 정문으로 불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덜커덩, 덜컹.

순백의 황궁 대리석 바닥 위로, 기괴할 정도로 어두운 칠흑색 마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서고 있었다. 마차의 문양은 황실의 결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대귀족 세력의 수장, 엘리안 후작의 가문 문양이었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뱀처럼 차갑고 영리한 눈동자가 리네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리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엘리안…….'

겨우 얻어낸 평화의 조각이, 저 검은 마차의 등장과 함께 산산조각 날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리네의 귓가를 스쳤다. 리네는 그 불길한 시선을 마지막으로 마침내 깊은 암흑 속으로 의식을 잃고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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