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진짜 이름을 대라."
황제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긁었다.
디트리히는 쓰러진 리네의 가슴팍에 청회색 검끝을 가만히 대었다.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은 지독하리만치 나약하고 빨랐다. 마치 둥지에서 떨어져 떨고 있는 어린 들새의 날갯짓 같았다.
제단의 갈라진 틈새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가 리네의 발목을 옥죄려던 찰나, 황제는 검을 살짝 비틀어 안개를 갈라발겼다. 그의 서슬 퍼런 눈동자가 리네의 감긴 눈꺼풀을 꿰뚫을 듯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가짜의 목을 베어 내야 마땅한 황실의 율법이 그의 머릿속을 차갑게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네의 연살구빛 피부 위에 새겨진 '불꽃을 품은 맹수의 낙인'은 지독하게 선명했다. 제단의 시스템이 이 아이를 황녀로 인정한 이상, 검끝을 조금만 더 밀어 넣는 순간 제국을 지탱하는 결계는 산산조각이 나고 온 대지가 불타오를 터였다.
팽팽한 대치 속에서 시간이 굳어 버린 듯했다. 황제는 마침내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검을 거두었다.
"살려 두는 것이 화근이 될지, 아니면..."
뒷말은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디트리히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뒤를 돌았고,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리네의 의식은 완전한 암흑 속으로 침잠했다.
* * *
사흘 뒤.
눈꺼풀이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리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높은 천장에 매달린 정교한 크리스탈 샹들리에와 부드러운 크림빛 커튼이었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코끝을 스쳤고, 뺨에 닿는 시트의 감촉은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아..."
목구멍이 바싹 타들어 가 작은 신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영혼의 밑바닥까지 긁어모아 불의 정령 이그니스와 소통했던 대가는 가혹했다. 온몸의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열이 여전히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바늘 수천 개가 찌르는 듯한 통증이 요동쳤다.
"공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침대 머리맡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엄격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단정한 시녀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황실의 규율을 온몸으로 대변하는 듯한 꼿꼿한 자세의 시녀장, 로잘린이었다.
로잘린의 손에는 차가운 물을 적신 페일 블루빛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붉은 기가 감돌았고, 눈 밑에는 짙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간호한 흔적이었다.
리네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고아원에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원장 선생님이 매를 들기 전 항상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다가왔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눈앞의 여성이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리네는 마른침을 삼키며, 잘게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눈가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유순한 양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죄송... 해요. 제가 너무 오래 잠을 자서... 화나셨나요?"
갈라진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엎드려 동정을 구하는 것. 그것이 고아원의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에서 리네가 터득한 생존 법칙이었다.
로잘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엄격하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에 균열이 생기며,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안타까움이 번져 나갔다.
"아닙니다, 공주님. 화가 나다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그저... 무사히 깨어나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로잘린은 서둘러 무릎을 꿇고 리네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차가운 리네의 손에 로잘린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열이 이리도 높으신데, 눈치를 보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곳은 공주님의 방이고, 저는 공주님을 모시는 시녀입니다. 그 누구도 공주님을 탓하지 못합니다."
창밖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지만, 방 안을 채운 로잘린의 목소리만큼은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했다. 리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일단 이 엄격해 보이는 시녀장의 마음을 얻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물... 조금만 주실 수 있나요?"
"예, 기꺼이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로잘린이 서둘러 은쟁반 위에 놓인 민트빛 유리잔에 맑은 물을 따르던 그때였다.
쿵, 쿵, 쿵.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거친 발소리가 복도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방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급강하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서늘한 살기가 문틈을 타고 밀려들었다. 로잘린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스르륵, 문이 열리며 거대한 그림자가 방 안을 덮쳤다.
칠흑 같은 흑발에 사나운 적안을 빛내는 사내, 제국의 폭군 황제 디트리히였다. 그의 뒤에는 묵묵히 검자루를 쥔 채 서 있는 기사단장 빌헬름이 버티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침대 발치에 멈춰 서서, 마치 하찮은 미생물을 내려다보듯 리네를 차갑게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아려 왔다.
"깨어났군."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는 일말의 온기도 없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로잘린이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지만, 디트리히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리네의 이마 위에 새겨진 낙인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흘 동안 시체처럼 누워 있기에 이대로 숨이 끊어지는 줄 알았다. 제단이 인정한 황녀치고는 뼈대가 지독하게 부실하군."
비아냥거리는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뼈를 깎는 듯한 의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리네와 불과 한 뼘 거리까지 좁혀졌다.
"네가 진짜 내 피를 이어받았는지, 아니면 어떤 해괴한 마법으로 제단의 눈을 속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법관들은 네 가짜 서류를 찾아냈고, 내 이성은 여전히 네 목을 치라 소리치고 있으니까."
리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불을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갔다. 하지만 리네는 도망치듯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 기가 죽어 눈물을 흘린다면, 저 무자비한 폭군은 지체 없이 자신을 소멸시킬 것이다.
"하지만..."
디트리히가 몸을 일으키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지금 황궁 상황이 아주 흥미롭게 돌아가고 있어서 말이지. 네가 제단에서 저지른 짓 때문에, 황궁 중심부에 봉인된 정원 '아르카디아'의 독기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왜곡장이 황궁의 결계를 좀먹고 있지. 이대로 두면 사흘 안에 제국의 심장이 썩어 들어갈 거다."
그는 품 안에서 붉은 마력이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엘리안의 가짜 혈맥 축복의 선물을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정령을 다룬다고 했지? 그렇다면 아르카디아로 가라. 그곳의 광포한 정령들을 잠재우고 독기를 정화해라. 만약 성공한다면, 네 가짜 신분에 대한 추궁을 '보류'해 주지. 황녀로서의 품위 유지비와 안전도 보장하마."
살벌한 거래였다. 아르카디아는 정제되지 않은 가공할 정령력 때문에 침입자가 순식간에 타 죽거나 얼어 죽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살아서 돌아올 확률이 지극히 희박한 사지로 가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실패한다면요?"
리네는 갈라지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똑바로 물었다.
디트리히의 적안이 잔인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 정원에서 정령들의 밥이 되거나, 혹은 도망치다 내 검에 목이 잘리겠지. 선택해라. 지금 여기서 즉형을 당하겠느냐, 아니면 사지에서 네 쓸모를 증명하겠느냐."
방 안의 공기가 숨 막힐 듯 팽팽해졌다. 로잘린은 감히 끼어들지 못한 채 바닥을 짚은 손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리네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어차피 도망칠 곳은 없었다.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했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 정령과의 소통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장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리네는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나약한 고아 소녀의 두려움이 없었다. 오직 생존을 향한 강인한 의지만이 서려 있었다.
"좋아요. 폐하의 거래를 받아들이겠어요."
디트리히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슬쩍 올라갔다.
"오호?"
"대신, 저도 조건이 있어요."
리네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아르카디아의 독기를 정화하는 동안, 폐하께서는 제 신분에 대한 그 어떤 의혹 제기도 허용해서는 안 돼요. 그리고 정화에 필요한 모든 자원과 정보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시겠다고 서약해 주세요. 또한..."
리네는 바닥에 엎드려 있는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시녀장 로잘린을 제 전속 시녀로 임명해 주시고, 그녀의 안전 역시 보장해 주세요."
움츠러들어 있던 로잘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 목숨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처지에 자신을 챙기는 어린 소녀의 모습에, 로잘린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구쳤다.
디트리히는 잠시 침묵했다. 이 작은 아이가 감히 제국을 지배하는 황제에게 조건을 내걸고 계약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영악하고 계산적인 방식으로.
"하하하...!"
짧고 건조한 폭소가 디트리히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맹랑한 년. 가짜 주제에 황실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구는군. 좋다. 기사단장 빌헬름이 네 계약의 증인이 될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네가 가장 먼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디트리히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빌헬름 역시 리네를 깊이 있는 눈빛으로 한 번 바라본 뒤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로잘린이 리네의 침대맡으로 달려왔다.
"공주님! 어찌 그런 무모한 약속을 하셨습니까? 아르카디아는 인간이 발을 들일 곳이 못 됩니다. 그곳의 독기는 숙련된 마법사들조차 순식간에 녹여 버리는 재앙입니다!"
걱정으로 가득 찬 로잘린의 눈가를 보며, 리네는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요, 로잘린.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죽는 건 마찬가지였는걸요. 그리고... 저에게는 힘이 있으니까요."
리네는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 깊은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정령들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비록 몸은 고열로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영혼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깨어 있었다.
* * *
잠시 후, 리네는 로잘린의 부축을 받으며 아르카디아 정원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로 향했다.
황궁의 깊숙한 지하를 지나, 두꺼운 철문 너머로 이어지는 길은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다. 사방의 벽면은 습기로 가득했고, 기분 나쁜 한기가 뼈마디를 파고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리네는 주변의 정령력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런데 정원으로 향하는 길목의 모퉁이를 돌던 찰나, 리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공주님? 왜 그러십니까?"
로잘린이 의아한 듯 물었지만, 리네는 대답하지 못했다.
벽면의 틈새, 차갑게 얼어붙은 이끼 사이에서 미세한 붉은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불씨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불꽃이 아니었다. 지독하게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면서도, 속에서는 광포한 파괴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기이한 불씨였다.
두근. 두근.
불씨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심장처럼 일정한 주기로 맥동하고 있었다. 리네의 영혼이 그 맥동에 반응해 잘게 흔들렸다.
'이건... 단순한 정령의 흔적이 아니야.'
본능적인 위기감이 엄습했다. 이 차가운 불씨는 지금은 아주 작고 미약하지만, 만약 외부의 자극을 받아 깨어난다면 황궁 전체를, 아니 제국 전체를 집어삼킬 대재앙의 불길로 화할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곳에 심어 놓은 듯한 불길한 기운이 풍겼다.
"공주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결계의 왜곡장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로잘린의 재촉에 리네는 겨우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은 저 불씨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눈앞의 거대한 장벽을 먼저 해결해야 했다.
마침내 아르카디아 정원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 리네는 숨을 들이켰다.
눈앞에는 연보랏빛과 탁한 잿빛이 기괴하게 뒤섞인 독안개가 거대한 장벽처럼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안개가 일렁일 때마다 쉭쉭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고, 스치기만 해도 살을 태워 버릴 듯한 가혹한 열기와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재앙 자체였다.
"여기서부터는 제 힘으로 가야 해요."
리네는 로잘린의 부축을 정중히 거절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눈앞의 독안개가 마치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리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안개 속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그녀의 생명력은 극도로 소모될 것이고, 어쩌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깊은 잠에 빠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다.
리네는 가늘게 떨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독안개의 장벽을 향해 작은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