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컥, 무거운 쇠사슬이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비정한 금속음을기어 올렸다.
손목을 파고드는 검은 무쇠의 감촉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열두 살 소녀의 가냘픈 손목에는 터무니없이 무겁고 커다란 구속구였다. 낡아서 올이 다 풀려 버린 라벤더빛 모직 원피스 소매 사이로, 생채기 가득한 살구빛 피부가 잘게 떨렸다.
거대한 알현실의 천장은 까마득하게 높았다. 높은 아치형 창문을 통해 흘러내리는 햇살은 연하늘색과 파우더 핑크빛이 기묘하게 뒤섞인 채, 차가운 바닥 위에 가라앉아 있었다.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아름다운 빛깔이었지만, 그 빛이 비추는 공간의 공기는 질식할 것처럼 무겁고 황량했다.
단상 위, 칠흑빛 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사내의 시선이 리네의 머리통 위로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제국의 황제, 디트리히 드 벨페오르.
그의 머리카락은 빛 한 점 흡수하지 못하는 밤의 색이었고, 반쯤 내리뜬 눈동자는 얼어붙은 화산재처럼 탁하고 차가운 은빛을 띠고 있었다. 사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알현실 구석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유리 장식들이 잘게 부딪치며 서글픈 소리를 냈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였음에도, 리네의 뺨을 스치는 공기는 살을 에는 듯이 아렸다.
"저것이 고아원에서 찾아낸 벨페오르의 핏줄이란 말이지."
디트리히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텅 빈 대전당에 울려 퍼졌다. 그의 손가락이 옥좌의 팔걸이를 툭, 툭,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그 가볍고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가 리네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단두대의 칼날처럼 느껴졌다.
"예, 폐하. 고아원의 원장이 보관하고 있던 인장과 아기 시절의 배냇저고리, 그리고 흘러나온 소문이 모두 일치하옵니다."
크림색 사제복을 입은 황실 법관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서류를 올렸다.
리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타들어 갈 것처럼 바짝 말라붙었다. 고아원 원장이 돈독이 올라 위조해 낸 가짜 서류들. 그 탐욕스러운 거짓말의 대가로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은, 살아 돌아간 자가 없다는 소멸의 제단 앞이었다.
벨페오르 황실을 지탱하는 강력한 율법, '혈맥의 맹세'.
황족이 아닌 가짜가 황실의 피를 사칭할 경우, 제단의 결계가 격발하여 그 자리에서 가짜의 육신을 태워 없앤다. 그리고 그 참혹한 소멸의 집행자는 다름 아닌 황제 자신이어야만 했다. 율법의 강제력은 절대적이어서, 제아무리 폭군이라 한들 이를 거스르면 제국 전체가 신의 저주를 받아 무너지게 된다.
디트리히의 은빛 눈동자 속에 깃든 것은 부성애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맹수의 서늘한 관조였다. 진짜라면 살려둘 것이고, 가짜라면 이 자리에서 손수 목을 베어 제단의 제물로 던지겠다는 명확한 의지.
"의식을 시작해라."
황제의 짧은 명령과 함께 법관이 리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끝이 날카롭게 갈린 은빛 침이 들려 있었다.
"가까이 오거라, 아이야."
법관의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그 눈빛은 행여나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가득했다. 리네는 쇠사슬을 끌며 제단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툭툭 끊어지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학대받던 고아원 시절, 매일 밤 창밖의 차가운 별을 보며 빌었던 소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저 아무도 자신을 때리지 않는 곳, 따뜻한 수프 한 그릇을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진짜 집과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갈망. 하지만 그 대가가 이 차가운 제단 위의 죽음이라니.
법관이 리네의 왼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은침이 얇은 손가락 끝을 사정없이 찔렀다.
"앗..."
약간의 비명과 함께, 손가락 끝에서 붉은 피 한 방울이 맺혔다. 법관은 재빨리 그 손을 끌어당겨 제단 중앙의 홈에 피를 떨어뜨렸다.
뚝.
적막 속에서 핏울음 같은 소리가 퍼졌다.
순간, 고요하던 실내가 거짓말처럼 얼어붙었다. 제단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이 붉은색도, 황금색도 아닌, 불길하고 탁한 검붉은 빛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 가짜다!"
법관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쿠구구궁!
대좌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제단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한 검붉은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황실의 핏줄이 아님을 감지한 '혈맥의 맹세'가 내리는 즉각적인 소멸의 마법이었다. 불꽃은 굶주린 괴물의 아가리처럼 아가리를 벌리며 리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눈앞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드는 찰나, 리네의 귓가에 차가운 금속음이나 비명마저 집어삼키는 기괴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자연 그 자체의 날것 그대로의 의지였다.
—아하하하! 맛있는 냄새가 나! 전부 태워 버릴 거야!
—따분해, 따분해! 좁은 곳에 갇혀서 심심해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제국을 통째로 잿더미로 만들어 줄게!
그것은 제단의 소멸 마법에 반응해 깨어난, 황궁 지하에 봉인되어 있던 광포한 불의 정령 '이그니스'의 목소리였다. 폭주하는 자연재해 그 자체인 정령의 야성이 제단의 결계를 뚫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자신뿐만 아니라 알현실 전체가, 아니 황궁 전체가 불바다가 될 터였다.
리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울부짖는 대신, 그녀의 눈동자가 깊고 투명한 푸른빛으로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고아원에서 굶주림과 매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른 본능적인 생존력이 그녀의 이성을 붙잡았다.
리네는 소멸의 불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쇠사슬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조용히 해.'
그녀의 영혼에서 뿜어져 나온 보이지 않는 파동이 불꽃의 심장부를 직격했다.
—엇?
광포하게 날뛰던 검붉은 불꽃이 허공에서 뚝 멈춰 섰다. 불꽃의 형상이 거대한 늑대의 대가리 모양으로 뭉쳐지며 리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타오르는 열기가 속눈썹을 태울 듯이 뜨거웠지만, 리네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시끄러워, 멍청한 늑대야. 그렇게 소리만 지르면 목 안 아파?'
—뭐, 뭐라고? 꼬마야, 지금 나한테 말 건 거야? 인간 주제에 내 목소리가 들려?
'들려. 아주 시끄럽고 귀가 따가울 정도로 잘 들려. 너, 이렇게 사방을 태우고 나면 그다음에 뭘 할 건데? 다 타버린 검은 재만 남으면 더 심심해질걸.'
이그니스의 불꽃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그치만... 다들 나를 보면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는걸! 나랑 대화해 주는 녀석은 아무도 없단 말이다!
'내가 대화해 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리네는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존재하는 생체 에너지를 끌어올렸다. 영성 소통의 대가. 그것은 자신의 생명력을 정령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을 진정시키는 정화의 힘이었다. 몸속의 피가 순식간에 끓어오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지만, 리네는 붉은 입술을 꾹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이 시끄럽고 뜨거운 불꽃을 치워 줘. 그리고 내 몸을 감싸 안아. 파멸의 불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따뜻한 불꽃이 되는 거야. 그럼 내가 매일 밤 너랑 놀아줄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주 많이 들려줄게.'
—정말? 거짓말하면 진짜로 다 태워 죽일 거야!
'약속해.'
그 순간, 리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투명하고 맑은 정화의 마력이 불의 정령 이그니스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치이이익!
마치 뜨거운 달궈진 철판에 얼음수를 끼얹은 듯한 소리가 대전당을 메웠다. 사납게 타오르던 검붉은 소멸의 불꽃이 순식간에 정화되기 시작했다. 날카롭던 불꽃의 촉수들이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로 변하더니, 이내 연한 살구빛과 파스텔톤의 핑크빛이 감도는 아름답고 따스한 불꽃의 장막으로 탈바꿈했다.
그것은 파괴의 불꽃이 아닌, 주인을 축복하고 수호하는 정령의 서약이었다.
"이, 이럴 수가...!"
법관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뒤로 물러섰다.
제단의 소멸 규율이 완벽하게 왜곡되고 있었다. 가짜를 태워 죽여야 할 불꽃이 오히려 아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보호하고 있었으니, 제단의 시스템 자체가 이를 '진짜 황녀의 강림'으로 오인하여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제단에 새겨진 붉은 마법진이 황금빛 서약의 문양으로 빠르게 다시 그려졌다.
말도 안 되는 기적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폭주하는 자연재해인 정령을, 고작 열두 살짜리 어린아이가 가볍게 말 한마디로 조련해 낸 것이다.
"하아, 하아..."
리네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골든핑거의 힘을 발휘한 대가는 혹독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고, 귓가에는 이명이 삐 소리를 내며 울렸다. 몸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해 40도가 넘는 열병이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시야가 흑백으로 흐려지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스르륵, 리네의 작은 몸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쓰러졌다.
탁, 탁, 탁.
느리지만 일정한 간격의 발소리가 쓰러진 리네를 향해 다가왔다. 사슬의 무거운 쇳소리 사이로, 가죽 장화가 바닥을 딛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고막을 찔렀다.
스릉—.
은밀하고도 예리한 마찰음과 함께, 디트리히의 허리춤에서 길게 뻗어 나온 검이 리네의 목덜미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차가운 검끝이 얇은 살결에 닿아 소름 돋는 감각을 선사했다.
리네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치켜떴다.
단상 아래로 내려온 디트리히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은빛 눈동자에는 여전히 깊은 의심과 경계, 그리고 방금 일어난 기적에 대한 기묘한 흥미가 뒤엉켜 있었다.
"제단을 속이고, 제국의 가장 사나운 정령을 애완동물처럼 다루다니."
디트리히가 검끝에 힘을 주어 리네의 가슴팍을 가볍게 눌렀다. 얇은 원피스 천 너머로 서늘한 검날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조금만 손목을 비틀면 그대로 심장을 꿰뚫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의 입술이 비틀리며, 오직 둘만 들을 수 있는 아주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리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누가 보낸 개냐. 네 진짜 이름을 대라, 꼬마야."
목덜미를 누르는 서슬 퍼런 감촉에 척추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리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짚은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손톱끝이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하얗게 질려 갔다. 해묵은 공포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빠르게 잠식해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보육원의 벽장 속, 매질을 피해 숨어 숨죽이던 밤들이 눈앞을 스쳤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이 사내의 손에 목이 잘려 차가운 바닥을 구르게 되리라.
살아야 했다. 어떻게든 이 무자비한 황제의 의심을 흐려놓고, 살아남아 안전한 품을 얻어내야만 했다.
리네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검날을 향해 작은 손가락을 뻗었다.
스윽.
가냘픈 손바닥이 시퍼런 검날을 가만히 감싸 안았다. 살결이 베여 붉은 피가 검신을 타고 흘러내릴 법도 한데, 리네는 오히려 검을 쥔 디트리히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듯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앗 뜨거...!"
검날에 닿은 리네의 손바닥에서 지독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미 40도를 훌쩍 넘긴 고열 탓에, 그녀의 살결은 마치 뜨겁게 달구어진 화로와도 같았다. 검푸른 쇠붙이가 리네의 체온에 반응해 미세하게 징, 소리를 내며 울었다.
디트리히의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검끝을 밀어 넣지도, 거두지도 못한 채 사내의 단단한 손목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내 이름은..."
리네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리네... 리네예요, 폐하."
"그것이 전부냐? 너를 이 황궁으로 밀어 넣은 자가 누구인지 묻고 있다."
"아무도... 없어요. 저는 그저, 버려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눈물이 가득 고인 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디트리히의 얼어붙은 화산재 같은 은빛 눈을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그 눈망울에는 거짓이 아닌, 버림받는 것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원초적인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학대당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그 순간, 공중에 흩어져 있던 이그니스의 불꽃들이 아기자기하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날카롭던 검붉은 불꽃은 어느새 달콤한 마카롱을 닮은 페일 라벤더빛 안개로 변해 있었고, 그 주변을 레몬옐로빛 불꽃 나비들이 팔랑거리며 맴돌았다. 바닥에 고인 핏방울 위로는 민트그린빛 정령석 가루가 보석처럼 반짝이며 흩뿌려졌다. 파스텔톤의 온화한 색채들이 차갑고 황량한 알현실을 우화 속 한 장면처럼 포근하게 물들였다.
이그니스는 제 계약자를 보호하겠다는 듯, 디트리히의 검을 향해 작은 불꽃 침을 퉤 뱉어내며 갸르릉거렸다.
두 사람을 둘러싼 정령력이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였다.
우우웅—!
갑자기 대좌 중앙에 놓인 혈맥의 제단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요동쳤다. 정화된 정령의 마력과 리네의 생체 에너지가 제단의 고대 마법진에 강제로 주입되면서, 시스템의 오작동이 극에 달한 터였다.
콰아아앙!
제단 기둥에 금이 가며 눈이 시릴 정도로 눈부신 은백색의 빛무리가 리네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흡...!"
리네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빛의 줄기들은 리네의 얇은 옷자락을 찢고 들어가, 그녀의 오른쪽 쇄골 아래에 맹렬한 기세로 파고들었다. 마치 뜨거운 인장으로 살을 지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리네의 작은 몸이 활처럼 꺾였다.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와 함께, 은백색의 빛은 이내 선명한 벨페오르 황실의 문장—'불꽃을 품은 맹수의 낙인'—으로 변해 그녀의 뽀얀 피부 위에 깊게 새겨졌다.
혈맥의 맹세가 리네를 진짜 황녀로 '강제 승인'해 버린 증표였다.
"이럴 수가... 제단이, 제단이 가짜를 진짜로 인정했단 말인가?"
멀찍이 쓰러져 있던 법관이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눈앞에 누워 있는 아이는 분명 황실의 비전 마법을 쓰지도 못하는 가짜가 확실했다. 하지만 황실을 수호하는 결계 시스템인 제단은 이 아이를 자신의 진짜 친딸로 공식 기록해 버렸다. 제국의 율법에 따르면, 이제 디트리히는 이 아이를 해칠 수 없었다. 만약 이 마크가 새겨진 아이를 손수 처형한다면, 그 즉시 혈맥의 맹세가 파기되어 제국 전체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가짜라는 확신과, 죽일 수 없다는 시스템적 구속.
팽팽한 모순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숨 막히게 짓눌렀다.
"하아... 윽..."
리네는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영혼의 밑바닥까지 긁어 정령과 소통한 대가는 가혹했다.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두통과 함께, 눈앞이 온통 붉고 검은 색깔로 번져 나갔다. 체온은 이미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스르륵.
결국 리네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작은 손이 디트리히의 검날에서 힘없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깊은 혼수 상태로 빠져드는 소녀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가쁜 숨만을 내뱉고 있었다.
검을 쥔 디트리히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이 아이를 살려두는 것은 시한폭탄을 황궁 품에 안겨두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죽인다면 그 순간 제국은 파멸한다.
그가 검을 거두려던 찰나.
콰릉!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알현실 바닥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그리고 방금 전 리네의 피가 스며들었던 제단의 갈라진 틈새 사이로, 불길하고 탁한 칠흑빛의 마력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황실의 혈맥이 아님을 뒤늦게 감지한 제단의 방어 체계가 폭주하기 시작했다는 위험한 전조였다.
눈을 감은 리네의 이마 위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제단의 검은 안개는 굶주린 뱀처럼 쓰러진 아이의 발목을 향해 빠르게 뻗어나갔다.
과연 디트리히는 제단의 폭주 속에서 이 가짜 딸을 구해낼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방치해 소멸하게 둘 것인가. 서늘한 침묵 속에서, 황제의 검끝이 다시금 차갑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