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은빛 핀이 얇은 연민트색 옷감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리네는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듯 굳어 버렸다.
가슴팍에 얹힌 국권 기사 훈장은 어린아이의 손바닥만 한 크기였음에도 마치 무거운 철퇴처럼 리네의 가슴을 짓눌렀다. 디트리히의 손가락 끝이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의 손톱 밑에는 굳어 버린 핏자국과 함께, 지독하게 씁쓸한 고대 영약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그의 붉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 제국의 최고 권력자이자 무자비한 폭군이라 불리는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심장이 시릴 정도로 절박한 애원이었다.
“아프지 마라.”
그의 갈라진 목소리가 리네의 귓가를 맴돌았다.
“내 손으로 너를 베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 마라, 리네.”
그것은 경고인 동시에 폭군이 내뱉을 수 있는 가장 나약한 고백이었다. 디트리히가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리네는 훈장의 차가운 보석만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스산한 밤바람이 열린 창문 틈새로 불어와 방 안의 라벤더빛 커튼을 힘없이 흔들었다. 하늘에 걸린 초승달은 꼭 깨진 찻잔의 파편처럼 날카롭고 시렸다. 리네는 그의 품 안에서 미세하게 덜컹거리던 소리를 기억했다. 디트리히가 정령의 침식을 억누르기 위해 매일같이 들이켜던, 겉면에 가느다란 실금이 가득 찬 고대 영약병의 둔탁한 마찰음이었다. 그 약병의 균열이 깊어질수록, 그가 짊어진 저주의 무게 역시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 * *
이튿날 아침, 제국의 선황들을 기리는 신성 건국제 예배가 시작되었다.
대성당의 높은 천장 아래로 파우더 블루빛 안개가 성스럽게 깔려 있었고, 제단 주위는 온통 크림빛 백합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축제의 장이었으나, 그 이면에 흐르는 공기는 살얼음판보다 더 위태로웠다.
귀족들의 화려한 의복 사이로 엘리안 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백색의 사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굶주린 독사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예배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엘리안이 사절단을 이끌고 제단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의 손에는 은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커다란 축복의 상자가 들려 있었다.
“황실의 무궁한 번영과 신성한 혈맥의 정화를 위해, 저희 사절단이 준비한 성물을 제단에 바치고자 합니다.”
엘리안의 목소리가 대성당 내부를 부드럽게 울렸다.
디트리히는 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그 모습을 냉담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한 손은 여전히 턱을 괸 채였고, 다른 한 손은 가볍게 검자루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리네는 제단 근처에서 그 상자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상자의 틈새로, 아주 미세하지만 불길한 붉은색 마력이 실핏줄처럼 새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축복의 성물이 아니었다. 제국의 ‘혈맥의 맹세’ 규칙을 강제로 오작동시키기 위해 준비된, 극도로 위험한 폭로용 오결정 마도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엘리안은 상자를 제단 위에 안치하는 찰나, 소매 안쪽에서 조그마한 은빛 병을 슬그머니 꺼내 들었다. 그 병 안에는 차갑게 얼어붙은 푸른 불씨가 갇혀 있었다. 아르카디아 정원 뒤편에서 은밀하게 훔쳐낸, 제국의 정령력을 왜곡시키는 기폭제였다.
‘저자가 결국……!’
리네가 제지할 틈도 없이, 엘리안은 차가운 불씨를 은빛 상자의 홈에 밀어 넣었다.
딸각.
기괴한 금속음이 성당의 엄숙한 정적을 깨뜨렸다.
순간, 대성당 바닥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층 깊은 곳에서 제단을 은밀하게 둘러싸고 보호하던 보이지 않는 마력 혈맥 장벽이, 쇠사슬이 끊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박살 나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무슨 일인가!” “제단이…… 제단이 무너진다!”
대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장벽이 파괴됨과 동시에, 제단의 방어선이 무너지며 그 압박이 고스란히 리네에게로 몰아쳤다.
“아윽……!”
리네는 가늘게 신음하며 자신의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디트리히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피로 새겨주었던 수호의 낙인, ‘스티그마’가 미친 듯이 발열하기 시작했다. 살결 밑에서 뜨거운 용암이 흐르는 것처럼 혈관이 부풀어 올랐다. 피부를 찢고 뼈를 으스러뜨릴 것 같은 물리적인 압박에 리네의 무릎이 꺾였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며 지독한 혼수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기적을 부릴 때마다 찾아오는 생체 에너지의 급격한 소모 현상이었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 같은 피로감이 온몸의 감각을 마비시키려 했다.
하지만 지금 쓰러지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가짜 황녀라는 사실이 온 제국에 폭로되고, 디트리히는 맹세의 규칙에 따라 리네의 목을 직접 베어야만 한다. 그리고 제국은 멸망할 것이다.
‘안 돼.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리네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퍼지자 정신이 아주 잠깐 맑아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얘들아, 도와줘……!’
마음속으로 아르카디아의 정령들을 간절하게 불렀다.
그러자 대성당의 깨진 창문 틈새로, 그리고 바닥의 갈라진 틈새로 아르카디아의 최우상급 일곱 정령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불의 정령 이그니스가 붉은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고, 푸른 물의 정령은 거대한 파도의 형상으로 천장을 뒤덮었다. 대지를 뒤흔드는 흙의 정령과 날카로운 바람의 정령들이 성당 내부를 가득 채웠다.
인간의 눈에는 그저 아름다운 오색빛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언제든 제국 전체를 불바다나 홍수로 쓸어버릴 수 있는 재앙의 원천들이었다.
대성당에 있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며 경악했다.
“정령들이다! 아르카디아의 정령들이 폭주한다!”
“모두 검을 거두세요!”
리네가 핏기를 잃은 입술을 열어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정령들의 파동을 타고 성당 전체에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리네는 혼신을 다해 일곱 정령을 제단을 중심으로 둥글게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그니스, 동쪽을 막아줘. 물의 정령은 서쪽을. 바람은 남쪽과 북쪽의 흐름을 가두어!”
정령들은 리네의 영성 소통 능력에 굴복해, 광포한 야성을 억누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곱 정령이 제단을 중심으로 완벽한 원형의 방어망을 형성했다. 폭발하려던 오결정 마도구의 붉은 마력이 정령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마력의 우리 안에 갇혀 버렸다.
지독한 고열이 리네의 뇌를 지졌지만, 그녀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정령들을 지휘했다. 정령들의 힘을 분산시켜 폭발 마력을 가두는 ‘분공 방어(分工防禦)’가 완벽하게 전개된 것이다.
성당 안의 모든 파괴적인 에너지가 정령들의 장벽에 막혀 한 치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엘리안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이게 무슨……! 왜 제단이 폭발하지 않는 거지?”
사태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자, 엘리안은 극도의 초조함에 눈이 뒤집혔다. 제단이 무너지고 황실의 결계가 깨져야만 디트리히를 끌어내릴 수 있었다. 그는 품 안에서 붉은색 오결정 조각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마도구의 코어에 결정을 주입해 강제로 폭발을 유도하려 한 것이다.
엘리안이 마도구로 손을 뻗는 그 순간, 리네의 양 볼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 비열한 손 치워요.”
리네가 눈을 부릅뜨며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제단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던 일곱 정령의 우리를 역으로 강하게 좁혔다. 정령들이 억누르고 있던 방대한 폭발의 마력이 갈 곳을 잃고, 엘리안이 뻗은 손끝을 향해 역류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우웅!
“악! 아아악!”
대성당에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엘리안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푸른 얼음과 붉은 불꽃의 기운이 그의 오른팔을 타고 무섭게 치솟았다. 마도구의 자폭 마력이 역류하면서, 그의 팔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가 쩍쩍 갈라지며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뼈가 바스러지고 살점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엘리안은 피를 토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한쪽 팔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진 채였다.
황녀의 신분을 말살하고 황실을 전멸시키기 위해 준비했던 자폭 마도구가, 도리어 리네의 정령 장벽에 가로막혀 자신을 파멸시키는 인과응보의 칼날이 되어 돌아간 것이다.
성당 안은 쥐 죽은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옥좌에서 내려온 디트리히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였다. 그가 검을 뽑아 들고 제단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반역이다.”
디트리히의 서늘한 목소리가 성당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사절단을 가장해 제단을 파괴하려 한 자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압류해라. 지하 감옥에 처넣고, 자백할 때까지 가죽을 벗겨내라.”
“폐하! 이것은 모함입니다! 저 가짜 황녀가 정령들을 부려……!”
엘리안이 으스러진 팔을 움켜쥔 채 비명을 질렀으나, 기사들은 자비 없이 그의 입을 틀어막고 바닥으로 찍어 눌렀다.
“그리고 이 시각부로 제단 주변을 황실 기사단의 영지로 선포하며, 허가받지 않은 자의 출입을 금한다. 접근하는 자는 즉시 참수한다.”
디트리히의 단호한 명령에 제국 기사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엘리안과 그의 사절단은 처참한 몰골로 끌려 나갔고, 소란스럽던 대성당은 빠르게 통제하에 들어갔다.
리네는 긴장이 풀리며 바닥으로 쓰러지려 했다. 손목의 스티그마는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고, 눈앞이 새까맣게 멀어져 갔다.
디트리히가 빠르게 다가와 리네의 작은 몸을 안아 올렸다. 그의 단단한 품에 안기는 순간, 리네는 안도감과 함께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닥에 반쯤 박살 난 채 버려져 있던 엘리안의 마도구 잔해 중앙에서, 검붉은 아지랑이 같은 가스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르카디아의 정령들을 억지로 지배하고 왜곡하기 위해 엘리안이 심어두었던, 지독한 부작용의 정령 독소였다.
디트리히가 리네를 품에 안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그 검붉은 가스가 뱀처럼 허공을 가르며 디트리히의 얼굴을 향해 매섭게 뻗어 나갔다.
“폐하!”
로잘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디트리히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품에 안긴 리네를 지키기 위해 몸을 돌려 막아선 것이었다. 검붉은 독소는 디트리히의 뺨을 스쳤고, 그의 안면에 새겨져 있던 차가운 검은색 스티그마 속으로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윽.”
디트리히가 낮게 신음하며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낙인이 붉게 타오르다 못해 검푸른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정령의 침식을 억누르던 그의 눈동자가 순간 초점을 잃고 탁하게 변해갔다. 그의 호흡이 급격히 가빠지며, 품 안에서 리네를 안고 있던 팔의 힘이 스르륵 풀리기 시작했다.
“아바…… 마마?”
리네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디트리히의 안면 스티그마가 기괴하게 뒤틀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의 이마에서부터 차가운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그의 붉은 눈동자 너머로 짙은 어둠이 무섭게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