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치익, 매캐한 타르 냄새와 함께 검붉은 안개가 디트리히의 뺨을 타고 흘렀다. 살결을 파고드는 독소는 단순한 독약이 아니었다. 그것은 엘리안이 오랜 시간 정령들을 학대하고 뒤틀어 짜내 만든, 영혼을 좀먹는 낙인의 저주였다.

“……윽!”

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던 남자가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나약한 신음을 흘렸다. 굳건하던 디트리히의 무릎이 허망하게 꺾였다. 그가 품에 안고 있던 리네를 놓치지 않으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리네의 시야에서 라벤더빛 하늘이 뒤틀리며 대성당의 높은 천장이 무섭게 회전했다.

“폐하! 폐하!”

로잘린이 단상 아래로 굴러떨어지듯 달려와 디트리히를 부축했다. 하지만 황제의 안면에 새겨진 차가운 검은색 스티그마는 이미 검푸른 빛으로 물들며 괴사하듯 타오르고 있었다.

바닥에 둥글게 파편으로 흩어진 엘리안의 마도구—과거 외교 사절단을 통해 ‘혈맥의 축복’이라며 바쳐졌던 라피스라줄리 함의 잔해에서 붉은 마력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축복의 가면을 쓰고 황실 깊숙한 곳에서 미세하게 독기를 흘려보내던 그 가짜 선물이,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며 제단의 마력 흐름을 통째로 뒤흔들고 있었다.

“기사단은 들어라! 제단을 폐쇄하고 황궁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부단장의 찢어지는 듯한 외침이 성당을 가득 채웠다. 리네는 바닥을 짚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진동을 느꼈다. 제단의 대리석 틈새로 붉은 마력이 스며들 때마다, 아르카디아 정원에 묶여 있던 정령들의 비명이 머릿속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디트리히의 호흡은 이미 젖은 모래색처럼 탁해져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에 잠긴 듯 초점을 잃었고, 이마에서는 살구빛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리…… 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리네의 이름을 불렀다. 그 거칠고 거대한 손이 허공을 헤매다 리네의 뺨을 스쳤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온기였다. 언제나 자신을 차갑게 감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끝내 안아주던 그 손길이, 이대로 부서져 사라질 것만 같아 리네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두려움이 솟구쳤다.

‘안 돼. 이대로 아바마마가 잘못되면…… 나는 다시 그 차가운 지하실로 돌아가야 해.’

아니,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남자의 부재 자체였다. 자신을 가짜라 의심하면서도 끝내 목숨을 걸고 수호의 스티그마를 새겨주었던 유일한 온기. 리네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성당의 아치형 유리창 너머 아르카디아 정원 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광풍이 보였다.

“공녀 전하! 이곳은 위험합니다. 어서 침전으로 이동하셔야……!”

로잘린이 리네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리네는 부드럽게 그 손길을 뿌리쳤다.

“아니요, 로잘린. 저들이 노리는 건 아바마마만이 아니에요.”

리네의 맑은 은빛 눈동자가 창밖의 어둠을 꿰뚫었다.

* * *

황제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피보다 빠르게 퍼져나갔다. 엘리안 후작의 잔당들과 황실 전복을 꿈꾸던 급진 정령사회학회의 기사들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움직였다.

“황제가 독에 당했다! 제단을 파괴하고 가짜 황녀의 목을 베어라!”

“아르카디아의 비밀 통로를 열어라! 그곳을 통하면 제단의 심장부로 갈 수 있다!”

철갑을 두른 반란군 기사들이 숲의 음산한 그늘을 뚫고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정령들을 강제로 미쳐 날뛰게 만드는 지배의 마도구들이 들려 있었다.

침입자들이 아르카디아 정원 뒤편, 흐드러지게 피어난 백합나무 숲으로 들이닥친 순간이었다. 그곳은 예전부터 차갑게 얼어붙은 채 잠들어 있던 고대의 불씨가 숨겨진 금기지였다. 엘리안의 수하가 차가운 불씨를 향해 마력을 폭발시키려 도화선을 던졌다.

“이것만 터뜨리면 아르카디아는 물론, 황궁 전체가 얼어붙은 불바다가 될 것이다!”

순간, 숲의 공기가 기묘하게 얼어붙었다.

침입자들의 발밑에서 크림빛 장미 덩굴이 스르륵 기어 나와 그들의 발목을 옥죄었다.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장미 가시 끝마다 퍼르스름한 정령의 번개가 지직거리며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누구냐!”

반란군 대장이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울창한 나무그늘 사이로, 작은 발소리가 서서히 다가왔다. 연하늘빛 드레스 자락을 살랑이며 걸어 나오는 은발의 소녀. 이 살벌한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하고 연약한 인형 같은 모습이었지만, 소녀의 어깨 위에는 붉은 불꽃의 정령 이그니스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남의 정원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건 무례한 짓이에요.”

리네의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처럼 청아했으나,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지배자의 엄숙함이 깃들어 있었다.

“꼬맹이가 겁도 없이……! 당장 쳐라!”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치켜들고 돌격했다.

하지만 리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아르카디아의 정령들과 완벽한 교감을 이룬 상태였다. 리네의 가냘픈 손가락이 허공을 향해 가볍게 지휘하듯 움직였다.

“이그니스, 왼쪽 구역의 바람을 막아줘요. 물의 정령들은 오른쪽 늪지대로 적들을 유도해 주세요.”

[키히힛! 이 지루한 놈들의 머리통을 다 태워버려도 되는 거지, 리네?]

이그니스가 신이 나 날뛰며 거대한 화염의 장벽을 만들어 왼쪽 통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불길은 단순한 열기가 아니라 침입자들의 마력만을 골라 태우는 정제된 불꽃이었다.

오른쪽으로 우회하려던 기사들은 물의 정령들이 순식간에 진흙탕으로 바꾸어 놓은 늪에 발이 묶였다. 단단한 철갑옷이 진흙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늪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정령들이 왜 저 계집의 명령을 따르는 거지? 정령은 통제 불가능한 재앙이 아니었나!”

반란군들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알고 있는 정령은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하는 광포한 자연재해였으나, 지금 리네의 앞에 선 정령들은 마치 훈련된 황실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각자의 전투 구역과 분공을 철저히 지키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들을 덫으로 몰아넣는 조직적인 전술이었다.

“지금이에요. 번개의 정령들, 내려치세요.”

리네의 차가운 명령과 함께, 먹구름 한 점 없던 아르카디아의 하늘에서 푸른빛 뇌격이 쏟아져 내렸다.

콰르릉! 콰쾅!

정밀하게 조준된 번개들이 늪에 빠진 기사들의 갑옷을 정확히 타격했다. 금속 갑옷을 타고 흐르는 고압의 전류에 반란군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차례대로 쓰러졌다. 단 한 명의 황실 기사도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수십 명의 정예 반란군이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무력화되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얼어붙은 불씨를 쥐고 흔들던 잔당 우두머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주저앉았다.

“너, 너는 괴물이야…… 정령을 부리는 마녀……!”

리네는 그에게로 천천히 걸어가, 그의 손에 들린 차가운 불씨를 가볍게 빼앗아 들었다. 지독한 한기를 내뿜던 불씨는 리네의 손가락끝이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온순한 살구빛 온기로 변하며 그녀의 품 안으로 스며들었다.

“틀렸어요.”

리네가 쓰러진 반란군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저는 마녀가 아니라, 이 정원의 주인이에요.”

정령들의 완벽한 站위 분공 단체 전술로 반란군을 몰살하고 제단 주변의 위협을 완전히 종식시킨 순간이었다. 아르카디아를 가득 채웠던 불길한 독기는 완전히 정화되어 사라졌고, 은빛 장미들이 승리를 축하하듯 만개하여 향기를 풍겼다.

* * *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리네는 드레스 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디트리히의 침전으로 달렸다.

황제의 침실은 무거운 정적과 함께 어두운 라벤더빛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황실 의관들이 이마를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었으나, 그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어떤 치료 마법도, 해독제도 듣지 않습니다. 이건 정령의 근원적인 독기라…… 폐하의 체내에 쌓여 있던 기존의 침식과 결합해 영혼을 갉아먹고 있어요.”

의관의 절망적인 보고에 리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리네는 침상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디트리히가 평소 정령의 침식을 누르기 위해 남몰래 복용하던 고대 영약병이 놓여 있었다. 5화에서부터 미세하게 금이 가 있던 그 투명한 유리병은, 이번 충격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완전히 반으로 갈라져 내용물이 까맣게 말라붙어 있었다.

이미 그의 몸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던 것이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가짜 딸인 자신을 살려두기 위해 억지로 버텨온 대가였다.

침상에 누운 디트리히의 얼굴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했다. 뺨의 스티그마에서 뻗어 나온 검은 핏줄이 목덜미를 타고 심장 쪽으로 기어가듯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바마마……”

리네가 그의 거칠고 차가운 손을 꼭 쥐었다.

타인의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해, 언제나 눈치를 보며 사랑스러운 인형을 연기했던 지난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한 생존을 위한 계산이 아니었다.

이 무뚝뚝하고 잔인한 폭군이 자신에게 주었던 서투른 온기. 그것은 리네가 평생 갈망해 마지않던 ‘진짜 집’의 냄새였다.

‘나를 위해 목숨을 걸어준 사람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어.’

리네의 눈동자에 굳건한 결의가 서렸다.

그녀에게는 골든핑거가 있었다. 세계의 근원인 정령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기적을 물리적으로 실체화하는 힘. 하지만 그 대가는 언제나 가혹했다. 능력을 쓸 때마다 자신의 생체 에너지를 급격히 소모하여 깊은 혼수와 고열에 빠져야 했다.

하물며 황제의 영혼을 좀먹고 있는 저 거대한 정령의 독기를 통째로 흡수하는 일은, 단순한 혼수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혹은 자신의 영혼 자체가 해체되어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리네, 안 돼! 저 독기를 다 받아들이면 너 진짜로 죽어!]

이그니스가 황급히 허공에서 실체를 드러내며 리네의 뺨을 부리로 쪼아댔다. 다른 정령들도 슬픈 우는 소리를 내며 리네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리네는 가만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디트리히의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괜찮아, 얘들아.”

리네가 속삭였다.

“아바마마가 없는 집은, 나에게 더 이상 안전한 집이 아니니까.”

리네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디트리히의 손을 잡은 채 자신의 영성을 극도로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빛 마력이 뿜어져 나와 어두운 침실을 환하게 밝혔다. 그것은 자신의 전 존재와 생명력을 해체하여 타인의 독기를 끌어당기는, 금기된 정화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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