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자제라는 바르토의 귀찮은 결투 신청을 대충 피한 뒤, 당신이 찾아온 곳은 아카데미 도서관 최심부, 일반 학생의 출입이 금지된 '금단 구역'이다.
낙제생의 몸이라 체력은 바닥이고, 쏟아지는 졸음을 피하기엔 사서의 눈이 닿지 않는 어둡고 조용한 이곳이 제격이었다. 대마법사 시절의 노하우로 마법 결계를 가볍게 무력화하고 구석진 책장에 몸을 기댄 바로 그 순간.
"……지하의 어둠이여, 잠들어 있던 종말의 불꽃을 깨워라……."
먼지가 풀풀 날리는 고서적들 사이에서 들려온 건, 도저히 평범한 학생의 잠꼬대라고는 볼 수 없는 주술적인 읊조림이었다. 당신은 귀찮음에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책장 틈새로 보이는 것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수상쩍은 무리들. 소문으로만 듣던 아카데미 전복을 노리는 어둠의 교단 일원들이 분명했다.
‘아니, 왜 내 구역 투어는 갈 때마다 이 모양이지? 나 그냥 자고 싶다고.’
하필이면 수백만 마리 먼지 진드기들의 보금자리에서 세계 멸망 예행연습을 하는 빌런들과 마주치다니. 당신은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무심코 내쉰 깊은 한숨이, 고요한 금단 구역의 정적을 깨뜨렸다.
"하아……."
"누구냐?!"
로브를 쓴 이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제히 주문을 멈추고 당신이 있는 어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숨길 방법도 없으니, 당신은 결국 어슬렁어슬렁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잠이 덜 깨 살짝 풀린 동공, 귀찮음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살벌하고 나른한 눈빛. 그리고 대마법사의 영혼이 무의식중에 뿜어내는 기묘할 정도로 정적인 압도감이 사방을 지배했다.
사실 당신은 아주 지극히 평화로운 표정으로 “너희 뭐 하냐?”라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비쳤다.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나타난 소년.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 만물을 하찮게 내려다보는 그 오만한 눈빛. 게다가 금단의 결계를 종이 한 장 찢듯 뚫고 들어온 압도적인 존재감!
"이, 이 마력의 궤적은……!"
교단의 행동대장처럼 보이는 사내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는 당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검붉은 마법구가 고스란히 충전되어 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뎅그렁, 하고 쇠붙이가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설마…… 교단 예언서에 기록된 ‘심연의 눈동자를 지닌 지배자’ 분이십니까?!"
‘……예? 제가요? 그냥 졸린 건데요?’
당신이 황당함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적막 속에서 그들을 응시하자, 압박감은 극에 달했다. 당신의 침묵이 그들에게는 단 한 마디로 목숨을 거둘 수 있는 절대자의 무언의 경고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툭. 맨 앞의 사내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다른 이들도 홀린 듯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저희의 미천한 의식을 지켜보고 계셨군요! 이 무지몽매한 종들을 부디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마치 당장이라도 주군의 발가락에 입을 맞출 기세로 기어오는 이 광신도 무리를 보며, 당신의 뇌세포들은 엄청난 속도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나 그냥 자러 온 낙제생인데?"라고 했다간 도리어 쥐도 새도 모르게 입막음을 당할 터. 그렇다면 이 완벽한 오해를 어떻게 굴려 먹어야 최소한의 노동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