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매우 진지하다. 온종일 머리 아픈 실기 평가에 시달리느니, 따뜻한 양로실 침대에 누워 시몬 침대 못지않은 안락함을 누리는 편이 오만 배는 이득이니까.
“아프다. 나는 지금 영혼 깊숙한 곳부터 골다공증이 오는 것처럼 몹시 아프다.”
머릿속으로 대마법사 시절에도 쓰지 않았던 치밀한 꾀병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복도를 꺾어 돌던 당신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선다. 아,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더니.
복도 한가운데를 떡하니 가로막고 선 불청객이 보인다. 태평양처럼 넓히고 싶은 좁은 어깨를 잔뜩 부풀리고, 금칠을 한 교복 단추를 짤랑거리며 걸어 나오는 녀석. 평소 낙제생 루인을 동네 북마냥 툭하면 건드리던 명문가 자제, 바르토다.
녀석은 특유의 거만한 제스처로 앞머리를 촤악 쓸어 넘기며 콧방귀를 뀌어댄다.
“오호라? 도망치기 바쁜 쥐새끼 한 마리가 제 발로 기어 나오는군! 루인, 감히 신성한 교정에서 꾀병을 부려 도망치려 하다니. 이 바르토의 예리한 눈은 속일 수 없다!”
바르토의 시그니처나 다름없는 영혼 없는 연극조의 대사치기에 당신은 깊은 한숨을 삼킨다. 전생에 차원 균열을 막아내던 대마법사였던 당신의 눈에는, 지금 이 눈앞의 도련님이 그저 털이 잔뜩 곤두선 하찮은 치와와로 보일 뿐이다. 하필 길목을 막아도 이런 귀찮은 녀석이 막아설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냥 좀 지나가지? 나 진짜 환자거든.”
“시끄럽다! 위대한 칼롭스 가문의 명예를 걸고, 네놈의 그 한심한 엄살을 낱낱이 파헤쳐 주마!”
바르토가 허리춤에서 잘 벼려진 훈련용 검을 ‘칭강!’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뽑아 들었다. 복도를 지나던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이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발견했다는 듯 순식간에 몰려들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아, 아카데미의 조연들은 왜 이렇게 눈치 빠르고 부지런한 걸까.
“칼롭스의 기품 있는 검식 속에서 네 가짜 병세가 얼마나 갈지 보자고! 검을 뽑아라, 루인!”
바르토가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바람을 가르며 당신의 가슴팍을 향해 검을 짓이기듯 찔러 들어온다. 둔탁하지만 확실한 힘이 실린 궤적. 이 몸의 둔한 운동신경으로는 그대로 서 있다간 양로실이 아니라 진짜 중환자실로 영면에 들 판국이다.
서슬 퍼런 검날이 코앞까지 육박한 일촉즉발의 순간. 대마법사였던 당신의 영혼이 바르토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공격 경로를 아주 느릿느릿한 슬로 비디오처럼 해체해 보여주기 시작한다. 당신의 몸이 본능적인 반사신경으로 꿈틀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