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경고등이 시야를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뇌리를 찌르는 기계음은 귓가를 파고들어 관자놀이를 지독하게 압박했다. 10시간. 남은 시간은 오직 그뿐이었다. 기한 내에 정산을 마치지 못하면 3년의 수명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그 냉혹한 등가교환의 압박보다 백연우의 시선을 먼저 빼앗은 것은, 바닥으로 무너지며 피를 토해낸 한채아의 마른 어깨였다.
“채아 야!”
윤민혁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연습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의 다급한 발소리가 낡은 리놀륨 바닥을 쿵쿵 울렸다.
“연우야, 이거 안 돼! 애 목이 진짜로 영영 망가진다고! 그만해야 해, 당장 병원부터 가자!”
민혁이 채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른 것은 연우의 손길이었다. 연우는 민혁의 팔을 부드럽지만 묵직하게 가로막았다. 그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채아를 향해 뻗은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연우는 무릎을 꿇고 채아의 무너진 몸을 안아 올렸다. 깃털처럼 가벼웠다. 며칠 동안 이어진 지옥 같은 수중 훈련과 밤샘 보컬 트레이닝으로 그녀의 몸은 한계까지 말라붙어 있었다.
“비켜 주십시오, 형님.”
“하지만 연우야, 저 피를 봐!”
“제가 합니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에 민혁이 멈칫했다. 연우는 채아를 품에 안고 연습실 구석에 놓인 낡은 간이 침대로 걸어갔다. 얇은 매트리스 위로 그녀를 천천히 눕히는 손길은 의외로 조심스러웠다.
채아의 입술은 하얗게 트다 못해 짓무른 상태였다. 턱 끝을 타고 흐른 붉은 핏방울이 흰 티셔츠 깃을 얼룩덜룩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시선으로 연우를 올려다보며, 거친 숨 사이로 밭은기침을 뱉어냈다.
“나…… 할 수 있어요. 다시, 마이크…… 줄래요?”
목소리는 쇠긁는 소리처럼 갈라져 있었다. 성대 하부가 찢어진 통증이 밀려올 텐데도, 그녀의 눈빛동자는 여전히 지독한 오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연우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입가에 묻은 피를 천천히 닦아냈다. 붉은 혈흔이 하얀 천 위로 번져나갔다.
“미련한 짓 하지 마.”
연우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가시 돋친 독설 대신, 무겁게 가라앉은 가라앉음이 묻어났다.
“악을 쓴다고 고음이 뚫리는 게 아냐. 네 목소리는 장부상의 숫자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프로듀서님이…… 그랬잖아요. 이기지 못하면, 그 자식들 발밑에서 평생 기어 다녀야 한다고…….”
채아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끝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억울함과 두려움, 그리고 자신을 향한 분노가 가득 담긴 눈물이었다.
연우는 그녀의 머리맡에 조용히 걸터앉았다. 지하실의 낡은 환풍기가 덜컹거리며 도는 소리만이 조용한 공간을 채웠다. 연우는 손수건을 접어 쥐며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아주 먼 과거, 혹은 그가 겪었던 비극적인 미래를 향해 있었다.
“내가 아는 가수가 하나 있었어.”
낮은 독백이 시작되자, 민혁도 채아도 숨을 죽였다.
“너처럼 지독하게 노래를 사랑했고, 너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믿었던 친구였지. 거대 기획사의 감언이설에 속아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그들은 그 친구의 목소리를 단물 가득한 껌처럼 씹어 돌리다 뱉어버렸어. 성대 결절이 오고 무대 공포증이 생기자마자, 쓰레기통에 처넣듯 방출했지.”
연우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아졌다. 과거 강태신과 서도관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졌던 자신의 아티스트들이 뇌리를 스쳤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부채감, 그리고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해 차가운 강물로 몸을 던져야 했던 전생의 기억이 심장을 난도질했다.
“그 친구가 무너질 때,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비즈니스라는 핑계로, 회사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변명으로 방관했지. 결국 그 친구는 스스로 목소리를 지웠어. 영원히.”
연우의 차가운 눈동자가 채아의 젖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난 그 짓을 두 번 다시 반복할 생각이 없어. 내가 널 네온 엔터로 데려온 건, 단순히 코어 미디어를 부수기 위한 도구로 쓰기 위해서가 아냐. 네 진짜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주고, 너를 배신한 놈들이 무대 밑바닥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기 위해서다.”
채아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늘 비즈니스 가치만을 논하며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세우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뼈저린 후회와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내 허락 없이 네 목을 망가뜨리지 마. 넌 내 최고의 포트폴리오이자, 내가 세상에 증명할 유일한 진짜니까.”
그 순간, 채아의 눈동자 깊은 곳에 맺혀 있던 오랜 불신과 가스라이팅의 상처가 눈 녹듯 서서히 허물어졌다. 코어 미디어에서 ‘대체 가능한 소모품’이라 불리며 짓밟혔던 영혼이, 마침내 자신을 온전한 ‘예술가’로 바라봐 주는 시선을 받아들인 것이다.
*띠링-!*
맑은 종소리가 연우의 귓가를 울렸다.
================================== [시스템 알림 - 인과율 정산 완료] ■ 한채아의 내면 트라우마 극복률: 100% (달성!) ■ 누적 채무 정산 완료: 100% ■ [보상] 가창력 잠재 수치 99.9% 영구 활성화 및 성대 세포 초재생 솔루션 가동. ※ 백연우의 생명력 차감 페널티가 소멸합니다. ==================================
채아의 목덜미 부근에서 은은하고 따뜻한 미열이 피어올랐다. 붉게 충혈되어 있던 그녀의 목덜미 피부가 순식간에 진정되며, 거친 호흡이 가라앉았다. 성대의 미세한 상처들이 기적처럼 아물어가는 과정이었다. 채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어……? 목이, 안 아파요…….”
“쉬어라. 정산은 끝났으니까.”
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입꼬리가 마침내 냉소적인 호선으로 가볍게 휘어졌다. 첫 번째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이제는 덫을 놓을 차례였다.
바로 그때였다. 연습실 구석에 놓인 구형 서버 컴퓨터의 모니터가 거칠게 점멸했다.
*삐-! 삐-! 삐-!*
서버의 비상 침입 시그널이었다. 적색 경고등과 함께 외부 IP의 강제 접속 흔적이 화면 가득 쏟아졌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민혁이 소스라치게 놀라 모니터 앞으로 달려갔다. 화면에는 수천 개의 데이터 패킷이 네온 엔터의 백업 전산망을 무자비하게 뚫고 들어오는 경로가 실시간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해킹입니다.”
연우가 태연하게 걸어가 모니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위로 흐르는 이진법 코드들이 차갑게 반사되었다.
“서도관의 솜씨군요. 우리 가이드 마스터 음원을 훔쳐 가려고 더티 바이러스를 심은 포트를 강제로 열었습니다.”
“뭐라고?! 서도관 그 자식이 감히 우리 서버를 해킹해? 당장 랜선 뽑아! 막아야 해!”
민혁이 허둥지둥 본체 뒤쪽으로 손을 뻗으려 하자, 연우가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두십시오. 어차피 열어주려던 문이었습니다.”
“연우야, 그게 무슨 소리야? ‘Mirage’ 가이드 음원을 뺏기면 우리 데뷔는 끝장이라고!”
민혁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연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야 허공에 띄워진 ‘미래 음원 장부’의 세부 지표를 응시했다.
================================== [미래 음원 장부 - 특수 예측] ■ 악곡 'Mirage' 데이터 오염 및 유출 확률: 98% ■ 외부 노이즈(표절 의혹) 가중 시 인지도 파동 지표: 320% 상향 곡선 예측. ■ [권장 전략] 미완성 미끼 포맷을 흘려 적의 자폭을 유도할 것. ==================================
연우의 입가에 짙은 비웃음이 걸렸다.
“훔쳐 가게 만들어 둔 미끼입니다. 서도관 그 인간은 천재의 곡을 훔치지 않으면 스스로는 단 한 소절도 쓰지 못하는 기생충이니까요.”
연우는 키보드를 가볍게 두드려, 네트워크 게이트웨이의 임시 경로에 사전에 준비해 둔 오디오 소스 파일을 배치했다. 파일명은 `Mirage_v1_guide_vocal_Chaeah.wav`.
하지만 그 파일은 미완성된 미끼 포맷이었다. 곡의 멜로디 라인 중 브릿지 부분에 교묘하게 변형된 대중적인 클래식 모티브를 섞어 두었고, 무엇보다 파일의 메타데이터 깊숙한 곳에 지울 수 없는 마이크로 소스 코드가 심겨 있었다.
*스으으윽.*
모니터의 업로드 게이지가 100%를 찍으며 외부 IP의 접속이 순식간에 끊겼다. 도둑놈들이 미끼를 아주 달콤하게 물어 간 것이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민혁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연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모니터의 전원을 꺼버렸다.
“기다리면 됩니다. 굶주린 하이에나들이 승전고를 울리는 소리를요.”
그 예측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불과 서너 시간이 지난 이른 아침. 인터넷 연예 커뮤니티와 SNS가 발칵 뒤집혔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기사가 도배되기 시작했다.
[[단독] 코어 미디어 신인 걸그룹 ‘에이서(Aether)’, 미공개 신곡 가이드 유출 피해 확인…… 범인은 전 연습생 한채아?] [‘표절인가 도용인가’ 네온 엔터 한채아의 복귀 곡 ‘Mirage’, 에이서의 타이틀곡과 싱크로율 99% 의혹 제기!]
유튜브에는 두 곡의 음원을 비교하는 조작된 저격 영상들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댓글 창은 이미 코어 미디어가 고용한 대규모 사설 바이럴 대행사의 매크로 계정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 와, 한채아 진짜 뻔뻔하다. 회사 통째로 배신하고 나가더니 곡까지 훔쳐서 데뷔하려고 했네? - 네온 엔터 같은 양아치 중소기업 수준 어디 안 가죠ㅋㅋㅋ 남의 곡 카피해서 빌보드 가겠다고 주접떨더니 꼴좋다. - 서도관 프로듀서가 쓴 곡을 고대로 베꼈네. 멜로디 진행이 똑같잖아. 이건 빼박 표절이다.
“이,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민혁은 사무실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우리가 쓰지도 않은 미완성 가이드를 가지고 표절로 몰아가다니! 게다가 에이서라는 애들은 아직 콘셉트 포토밖에 안 나온 신인인데, 어떻게 우리 곡이 지들 타이틀곡을 베꼈다는 거야? 이거 완전 억지잖아!”
민혁이 씩씩거리며 전화를 걸려 하자, 연우는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전용 아이패드를 톡톡 두드렸다. 화면에는 실시간으로 변동하는 언론사들의 바이럴 전입 현황과 수수료 거래 추적 장부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형님, 진정하십시오. 생각보다 판돈을 크게 걸었군요.”
연우의 어조는 지독하리만치 차분했다.
“서도관이 이번 바이럴 공작에만 코어 미디어 마케팅 예산의 30%를 당겨 썼습니다. 주요 메이저 언론사 다섯 곳에 뿌린 수수료만 해도 억 단위가 넘어가는군요. 바보 같은 자식들, 제가 심어둔 마이크로 소스 코드의 폭탄을 아주 뼈째로 삼켜 드셨습니다.”
“폭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연우야?”
연우는 아이패드 화면을 민혁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채아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복잡한 디지털 워터마크 분석표가 나타나 있었다.
“그들이 훔쳐 간 음원 파일 안에는, 서도관의 개인 작업실 컴퓨터 IP와 코어 미디어 메인 서버의 고유 맥 주소(MAC Address)가 수정 기록으로 강제 각인되도록 설계해 두었습니다. 즉, 그들이 ‘우리가 표절했다’며 증거로 제시한 가이드 음원의 최초 유출 및 변형 경로가, 결국 코어 미디어 내부에서 시작되었다는 고유 표식이죠.”
연우의 눈빛이 잔혹한 포식자의 그것처럼 빛났다.
“게다가 전 이미 일주일 전, ‘Mirage’의 오리지널 악보와 개발 스템 데이터를 블록체인 기반의 저작권 등록 협회에 타임스탬프를 찍어 등록해 두었습니다. 법적 생성 일자가 우리가 훨씬 앞섭니다. 서도관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자기가 훔쳐 간 미완성 미끼 곡이 자기가 직접 쓴 곡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상대가 완벽하게 승리했다고 믿고 축배를 드는 순간, 목을 단숨에 베어버리는 역포위의 덫이었다.
채아는 연우의 냉철한 계산을 바라보며 깊은 전율을 느꼈다. 이 남자의 머릿속에는 코어 미디어라는 거대한 공룡을 사냥할 정교한 시나리오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바로 반박 보도 자료를 배포할까?”
민혁이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하지만 연우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닙니다. 돼지는 더 통통하게 살찌워야 잡아먹을 고기가 많아지는 법입니다. 서도관이 스스로 승리를 확신하고, 가장 높은 단상 위로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제 발로 단두대 위에 목을 올리게 만들어야죠.”
그때였다.
지하 연습실 입구 쪽에서 심상치 않은 소음이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수십 대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열악한 지하 계단을 타고 내려와 철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거친 노크 소리와 함께, 인터폰 화면에 네온 엔터 청담동 빌딩 앞 지상의 모습이 비쳤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수십 명의 연예부 기자들과 방송 카메라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승리에 도취한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잡고 있는 서도관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서도관이 언론사들을 대동하고 네온 엔터의 청담동 지하실 빌딩 앞을 기습 점거한 채, 실시간 폭로 기자회견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