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대연회장의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마자, 여름밤의 끈적한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었다.
뒤통수를 찌르는 비서의 차가운 시선이 이정표처럼 선명하게 박혀 들어왔다. 강태신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사냥개의 눈빛. 하지만 연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의 덫이 정교하다면, 이쪽은 그 덫 자체를 부수고 들어갈 철퇴를 쥐고 있었으니까.
“연우야! 진짜 미쳤어? 서도관 그 인간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몰라서 그래? 차트 조작은 기본이고, 방송국 피디들까지 쥐고 흔드는 놈들이야!”
윤민혁이 땀에 젖은 얼굴로 연우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두려움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연우는 민혁의 손을 무심히 털어내며 주머니에서 낡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이미 포털 사이트 메인을 도배하기 시작한 속보 기사들이 번쩍이고 있었다.
[‘네온 엔터’ 백연우, 코어 미디어에 정면 도전장… 패배 시 영구 퇴출] [서도관 프로듀서 “표절 시비 없는 깨끗한 승부, 지면 은퇴하겠다”]
“민혁 형.”
연우가 걸음을 멈추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판이 커져야 저놈들을 한 번에 쓸어 담을 수 있어. 어설프게 이기면 꼬리만 자르고 도망쳐. 머리를 밟으려면, 그놈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무대 위에서 밟아야 해.”
옆에 서 있던 한채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이 가방끈을 부서질 듯 움켜쥐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분노와 투지, 그리고 기묘한 해방감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푸르게 일렁였다.
“가요, 실장님. 연습실로.”
채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단단했다.
청담동 변두리 터널 옆, 낡은 5층 빌딩 지하. 네온 엔터테인먼트의 지하 연습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곰팡이 냄새와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연우는 두꺼운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둔탁한 쇠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제 외부와의 접촉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파앗!*
연우의 시야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회계 장부가 펼쳐졌다.
================================== [미래 음원 장부 - 인과율 채무 현황] ■ 채무 자산: 메가 히트곡 'Mirage' ■ 상환 조건: 96시간 내 한채아의 수중 훈련 및 보컬 트라우마 100% 극복 ■ 남은 시간: 95시간 42분 11초 ※ 경고: 기한 내 채무 미상환(부도) 시, 기획자 백연우의 생명력 3년 즉시 차감. ==================================
초 단위로 깎여 나가는 붉은색 숫자들이 망막을 자극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카운트다운. 연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이보다 더 확실한 담보는 없었다.
“채아, 보컬 부스로 들어가.”
연우는 콘솔 데스크 앞으로 걸어가 전원을 올렸다. 낡은 이퀄라이저 기계가 거친 기계음을 내며 웅웅거렸다. 먼지 쌓인 페이더를 위로 밀어 올리자, 모니터 우측 하단에 장부가 제공하는 특수 인터페이스가 붉은빛을 뿜어냈다.
[한채아 - 실시간 신체 스캔 상태] ■ 성대 하부 미세 염증 스크래치 수치: 78% (위험) ■ 무대 공포증 및 심리적 가스라이팅 지수: 92% (임계점) ※ 경고: 성대 본연의 단련 질량이 채워지지 않으면, 악곡 'Mirage'의 가치 보존율이 급격히 하락합니다. (현재 가치 활성화율: 12%)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미래의 완벽한 악보가 눈앞에 있어도, 그것을 소화할 가수의 목구멍이 준비되지 않으면 쓰레기 조각에 불과했다. 원석의 질량이 채워져야만 장부의 가치가 온전히 개방된다는 잔혹한 규칙이었다.
“헤드폰 써. 바로 첫 소절 들어간다.”
유리창 너머 보컬 부스 안, 한채아가 무거운 헤드폰을 귀에 얹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지하 연습실 철문 너머에서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윤민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사장님! 여기 진짜 조용히 할게요! 예? 딱 사흘만, 사흘만 봐주세요. 애가 목숨 걸고 노래 연습을 해야 해서 그렇습니다. 제발요!”
민혁이 소음 진동 민원이 들어올까 봐 옆 건물 매점 아줌마와 건물 관리인에게 음료수 상자와 담배 한 보루를 쥐여주며 사정하는 소리였다.
“아유, 총각! 밤낮으로 이 지하실에서 꽥꽥거리면 위층 상가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어? 경찰 부른다는 걸 내가 겨우 말렸어!” “맞습니다, 아주머니! 진짜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매일 아침 청소도 다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민혁은 밖에서 필사적인 ‘인간 바리케이드’가 되어 문 앞바닥에 주저앉아 입구를 지켰다. 연우의 혹독함을 알기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인 방패막이 역할을 처절하게 자처하고 있는 것이었다.
연우는 문밖의 소란을 무시한 채 마이크 스위치를 켰다.
“채아. 1절 벌스(Verse), 저음에서 중음으로 넘어가는 브릿지 구간이야. 흉성을 섞지 말고, 두성으로 가볍게 얹어. 공기를 70% 이상 흘려보내면서 뼈를 울려.”
“...네.”
채아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반주가 차가운 지하실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Mirage'의 전주가 흘러나오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린... 이미 부서진 거울 속에서…….”
첫 소절이 터져 나오는 순간, 기괴한 마찰음이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왔다.
*끼이익-!*
“멈춰.”
연우가 가차 없이 인터컴 버튼을 눌렀다.
“공기가 새잖아. 성대 뒤쪽이 벌어져 있어. 코어 미디어에서 가르쳐준 그 쓰레기 같은 창법 버리라고 했지. 목을 쥐어짜서 고음을 내는 건 가창이 아니라 자해다.”
“다시, 다시 해볼게요.”
채아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반주가 다시 시작되자,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검은 기억들이 그녀의 목을 옥죄었다.
*‘이딴 식으로 노래할 거면 길거리에서 몸이나 팔아! 너 같은 년한테 들어간 트레이닝 비용이 얼마인지 알아?’* *‘목소리가 안 나오면 주사라도 맞고 올려! 어디서 어리광이야!’*
코어 미디어의 어두운 연습실, 서도관의 폭언과 강태신의 싸늘한 눈빛. 뺨을 때리던 가죽 장갑의 감촉이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아, 아악……!”
갑자기 채아가 헤드폰을 벗어 던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보컬 부스 바닥으로 쓰러졌다. 과호흡이 찾아온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된 얼굴은 핏기를 잃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연우는 콘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걸음에 보컬 부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는 한채아를 내려다보는 연우의 눈빛에는 한 줌의 동정도 없었다. 그는 구석에 놓여 있던 생수통을 집어 들었다.
*촤아악-!*
차가운 얼음물이 채아의 머리와 가슴팍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커흑! 쿨럭, 우웁!”
갑작스러운 한기에 채아가 몸을 움츠리며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흉하게 달라붙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눈물 고인 눈망울에 원망과 독기가 가득 찼다.
“미쳤어요?! 내가 죽는 꼴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그래, 죽어.”
연우의 음성은 소름 끼치도록 차분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다가 성대가 터져서 죽어라. 어차피 네 인생은 코어 미디어한테 짓밟혀서 쓰레기통에 처박히기 직전이었어. 여기서 기어 나간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평생 몸이나 팔아넘기려던 탈세범들의 노예로 살다가 조용히 잊히겠지.”
연우는 채아의 턱을 강하게 움켜쥐고 시선을 강제로 맞추었다. 그의 손길은 매정했지만, 그 너머의 눈동자는 기묘할 정도로 거대하고 단단한 확신으로 가득 찬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난 비즈니스를 하러 온 거지, 네 징징거림을 받아주러 온 게 아니야.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말해주지. 네 목소리는 그따위 쓰레기 같은 트라우마에 갇혀 썩기엔 너무 아까워. 넌 99.9%짜리 완벽한 원석이야. 내가 널 빌보드로 보낸다고 했으면, 넌 가는 거야. 그러니까 이 귀한 목소리를 가지고 엄살 부리지 마.”
채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비정하리만치 냉혹한 독설. 하지만 그 가혹한 말줄기 밑바닥에 깔린 것은, 세상 그 누구도 자신에게 보여준 적 없었던 ‘재능에 대한 맹목적인 확신’이었다. 자신을 소모품으로 보던 강태신도, 껍데기만 취하려던 서도관도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 적은 없었다.
백연우는 진짜로 믿고 있었다. 자신이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비열한 인간.”
채아가 젖은 소매로 입가에 흐르는 물을 닦아냈다. 그녀의 눈에 서려 있던 두려움이 지독한 오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못 할 거 같아? 내 목소리가 가짜 같냐고.”
“증명해 봐. 말로 떠들지 말고.”
연우가 손을 놓으며 보컬 부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채아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바닥에 떨어졌던 마이크를 투박하게 쥐어 잡았다. 젖은 옷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지하실 바닥을 적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거울 속의 자신을 도끼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다시 틀어요. 반주.”
콘솔 데스크로 돌아온 연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반주가 다시 흘러나왔다. 그리고 기적이 시작되었다.
“우린 이미 부서진 거울 속에서…… 먼지 쌓인 기억을 노래하네…….”
첫 마디가 터져 나오는 순간, 콘솔 모니터의 파형이 요동쳤다. 두성으로 가볍게 밀어 올려진 음색은 차가운 얼음송곳처럼 예리하면서도, 그 끝에 말할 수 없는 처연한 슬픔을 담고 있었다.
*스으으으-*
장부의 가치 활성화율 그래프가 꿈틀거리며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 악곡 'Mirage' 숙련도: 15% -> 23% -> 35%] [■ 성대 잠재력 개방도 수치 급상승 중!]
“좋아. 그 톤 유지해. 2절 코러스(Chorus) 들어갈 때 흉성을 섞어서 지르는 부분, 목 압박하지 말고 횡격막을 더 내려!”
연우의 손가락이 페이더 위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채아의 목소리가 지하실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공명했다.
그것은 피와 땀으로 짜내는 투쟁이었다. 채아는 목구멍에서 쇠 비린내가 올라올 때마다 침을 뱉어내며 마이크를 쥐어짰다. 목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지만, 연우의 매서운 채찍질은 멈추지 않았다.
“더 높게! 네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면 서도관 그놈의 귀때기를 찢을 수 없어! 숨 참지 마, 뱉어내!”
“아아아아-!”
마침내 채아의 고음이 낡은 지하실 천장을 뚫을 듯이 뻗어 나갔다.
벽면 거울에 맺혀 있던 습기 어린 물방울들이 전율하듯 잘게 흔들렸다. 온전한 원석 본연의 질량이 채워지며, 미래 음원 장부의 숫자들이 미친 듯이 연산을 시작했다.
[■ 악곡 'Mirage' 가치 활성화율: 72% 돌입!] [■ 돌발 퀘스트 진행률: 85% 달성!]
지옥 같은 훈련이 이틀, 사흘을 지나 차트 론칭을 불과 24시간 앞둔 마지막 날 밤까지 이어졌다.
연습실 안은 땀 냄새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채아의 눈 밑에는 짙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고, 입술은 하얗게 터져 있었다.
“마지막... 코러스 한 번만 더 간다. 이번엔 감정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연우의 지시와 함께 반주가 흘러나왔다. 채아가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높이려는 찰나였다.
“우린, 미라지…… 큭, 콜록! 쿨럭!”
갑자기 채아가 목을 움켜쥐며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녀가 짚은 보면대 위로, 붉은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성대 하부가 버티지 못하고 찢어진 것이었다.
“채아 야!”
밖에서 망을 보던 윤민혁이 소스라치게 놀라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연우야, 이거 안 돼! 애 목이 진짜로 영영 망가진다고! 그만해야 해, 당장 병원부터 가자!”
하지만 연우의 눈은 채아가 아닌, 시야공간을 가득 채운 장부의 붉은 경고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삐-! 삐-! 삐-!*
뇌리를 찌르는 기계음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시스템 경고창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 [시스템 경고 - 인과율 정산 지연] ■ 현재 정산 완료율: 94% (미완료) ■ 상환 마감 임박: 10시간 전! ■ 인과율 채무 불이행 시 페널티 적용 카운트다운 가동. ※ [경고] 10시간 이내에 100% 정산이 완료되지 않을 경우, 기획자 백연우의 생명력 차감(3년) 단계에 즉시 돌입합니다! ==================================
시간이 없었다. 채아의 성대는 한계에 도달했고, 기한은 단 10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연우의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냉혹한 등가교환의 법칙이 그의 목줄을 죄어오기 시작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