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연습실의 눅눅한 공기가 일순간에 얼어붙었다. 벽면의 금이 간 거울들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징- 하는 날카로운 이음을 냈다. 반주 하나 없는 생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채아가 뿜어낸 단 한 소절의 멜로디는 지하실의 어둠을 단숨에 찢어발겼다. 소름 돋을 정도로 명징하고, 심장 가장 깊은 곳을 후벼 파는 애절함이 서린 목소리였다.
윤민혁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떨어뜨린지도 모른 채 넋을 잃고 채아를 바라보았다.
연우의 눈앞에는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황금빛 장부 창이 폭풍처럼 점멸하고 있었다.
[시스템: 아티스트 '한채아'의 잠재 가창력 개방] [수치 측정 중...] [가창 소질: 99.9% (확정)] [경고: 인과율의 채무 정산이 정식으로 개시됩니다. 남은 시간 95시간 59분.]
망막을 가득 채운 붉은색 경고등이 초단위로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96시간. 이 짧은 시간 안에 한채아의 성대를 가두고 있는 무대 공포증과 트라우마를 완벽히 깨부수고, 120시간 분량에 달하는 지옥의 압축 수중 보컬 훈련을 완수해야만 한다.
실패하면 연우 자신의 수명 3년이 회수된다. 등가교환의 법칙은 냉혹했다.
“실장님.”
채아가 악보를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안쪽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지독한 독기와 열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코어 미디어의 가스라이팅 속에서 완전히 죽어 있던 천재 보컬의 영혼이, 단 한 장의 악보로 인해 산소 호흡기를 단 듯 거칠게 꿈틀거렸다.
“이거... 제 곡 맞죠? 저, 이 곡이라면... 제 목구멍이 찢어져서 피가 터져도 부를 수 있어요. 시키는 건 뭐든 다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목숨 걸겠다는 싸구려 다짐 같은 건 필요 없어.”
연우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감상에 젖어들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검은색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네 목숨값은 내 장부에 숫자로 기록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네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저 쓰레기 같은 카르텔의 고막을 완전히 찢어발길 수 있는 완벽한 가창력의 질량이다.”
연우는 채아의 턱을 가볍게 쥐어 올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닿은 채아의 피부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극도의 긴장과 흥분이 그녀의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정확히 96시간 남았다. 이 시간 동안 너는 네가 겪어보지 못한 지옥을 보게 될 거야. 물속에서 숨이 막혀 죽기 직전까지 소리를 지르고, 성대의 모세혈관이 터져 나가는 고통을 견뎌야 해. 할 수 있겠나?”
채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 안쪽에서 쇠 비린내가 훅 끼쳤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할게요. 죽어도 무대 위에서 죽을래요.”
“좋아. 계약은 성립됐다.”
연우는 손을 떼고 몸을 돌려 윤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민혁 형. 차 키 가져와요.”
“어? 어... 차? 갑자기 차는 왜?”
“오늘 코어 미디어가 주최하는 업계 합동 기자 간담회가 있는 날입니다. 신인 연합 선언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자기들 카르텔을 공고히 하려는 자리죠.”
연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소적인 미소였다.
“거기 가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똑똑히 보여줄 겁니다.”
* * *
서울 중구에 위치한 그랜드 앰배서더 호텔 대연회장.
지하 연습실의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는 차원이 다른, 진한 백합 향과 최고급 디퓨저 향이 코를 찔렀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대형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로 수백 명의 연예계 관계자들과 기자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며 연회장 안을 하얗게 번쩍였다.
“와, 진짜 대단하네... 이게 대기업의 힘인가.”
윤민혁은 어색하게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두리안거렸다. 그의 낡은 양복은 이 화려한 공간에서 겉돌고 있었다. 반면, 한채아는 심플한 블랙 원피스 차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보적인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비록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연우의 곁에 서서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단단했다.
그녀의 코트 주머니 속에는 강태신의 비리와 이면 계약 내역이 담긴 실시간 동기화 암호화 USB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언제든 코어 미디어의 심장부를 날려버릴 수 있는 기폭장치였다.
“백 실장, 정말 괜찮은 거야? 우리 초대장도 없는데...”
“초대장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형.”
연우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연회장 중앙 로비, 수많은 카메라에 둘러싸여 거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사내에게 고정되었다.
단정한 포마드 헤어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이탈리아 명품 수트를 차려입은 남자. 코어 미디어의 수석 프로듀서이자, 과거 연우의 아이디어를 훔쳐 연명하던 도둑놈, 서도관이었다.
“어라? 이게 누구야?”
서도관이 인터뷰를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연우를 거쳐, 그 뒤에 선 채아에게 닿는 순간, 도관의 눈썹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비열한 웃음이 그의 얇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와, 세상 진짜 좁네. 네온 엔터테인먼트의 백연우 실장님 아니십니까? 파산해서 한강 다리 밑에 가 계실 줄 알았는데, 아직 숨은 쉬고 계셨네?”
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연우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주변에 있던 방송사 PD들과 대형 기획사 임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백연우 아니야? 옛날엔 잘 나갔는데 완전히 망했다더니.” “옆에 있는 애는 한채아잖아? 성 상납 어쩌구 하면서 퇴출당한 걔 맞지?”
더러운 속삭임들이 공기를 타고 채아의 귓가로 날아들었다. 채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그녀의 목을 다시 조여오는 듯, 호흡이 가빠졌다.
그 순간, 연우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채아의 차가운 손을 가볍게 쥐었다.
따뜻함 따위는 없는, 오직 비즈니스적인 파트너로서의 단단하고 굳건한 힘이 실린 손길이었다. 흔들리지 마라. 내가 여기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연우의 무언의 압박에 채아는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연우가 서도관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적인 동요도 없었다. 오직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차갑고 이성적인 눈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서 프로듀서. 여전히 남의 밭에서 이삭줍기나 하면서 떵떵거리는 버릇은 못 고쳤나 보군.”
“뭐? 이삭줍기?”
서도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주변의 기자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녹음기를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말조심해, 백연우. 너 지금 대기업 코어 미디어의 수석 프로듀서인 나를 모욕하는 거야? 그리고 저기 저 목구멍 찢어져서 노래도 못 하는 미친년은 왜 데리고 온 건데? 스폰서 구하러 왔나?”
도관이 채아를 가리키며 조소했다.
그 순간, 연우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비웃음이었다.
“노래를 못 하는지 어떤지는 네가 조만간 네 귀로 직접 듣게 될 테니 걱정할 필요 없고. 내가 궁금한 건 따로 있어서 말이지.”
연우가 품 안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들었다. 화면을 가볍게 쓸어 넘기자, 복잡한 주파수 파형과 코드 분석표가 담긴 장부 데이터가 나타났다. 미래 음원 장부가 실시간으로 분석해 낸, 서도관의 '차기 타이틀곡 소스 코드 분석표'였다.
“서도관. 네가 이번에 코어 미디어 신인 걸그룹 타이틀곡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그 곡 말인데.”
연우의 목소리가 연회장 로비의 웅성거림을 뚫고 명확하게 퍼져 나갔다.
“메인 리프 8마디. 프랑스 인디 일렉트로닉 듀오 'Vesper'가 2021년에 사운드클라우드에 아주 잠깐 올렸다가 내린 미발매 데모 곡 'Chasing Shadows'의 샘플을 그대로 긁어다 썼더군.”
일순간, 연회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서도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무, 무슨 개소리야! 그건 내가 순수하게 창작한...”
“창작?”
연우는 기자의 마이크 앞으로 당당히 걸어가 태블릿 화면을 보여주었다.
“여기 주파수 파형 분석표를 보시죠. 샘플링을 정식으로 계약하고 사용한 거라면 클리어런스(저작권 승인) 문서가 있어야 할 텐데, 프랑스 저작권 협회(SACEM)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코어 미디어나 서도관의 이름으로 등록된 사용권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무단 도용. 단순 표절을 넘어선 범죄 행위죠.”
“백연우!!”
서도관이 비명을 지르며 연우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연우는 가볍게 몸을 피하며 도관의 손을 쳐냈다. 탁! 하는 마찰음이 로비에 크게 울렸다.
주변의 기자들이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실시간으로 '코어 미디어 서도관 프로듀서, 해외 아티스트 무단 도용 의혹'이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의 기사들이 포털 사이트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이건 음해다! 사실무근이라고! 저 새끼가 미쳐서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거야!”
도관의 수하에 있던 코어 미디어 홍보팀 직원들이 황급히 달려와 기자들을 가로막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카메라의 불빛들은 도관의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입술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연우는 그런 도관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속삭였다.
“네가 표절하고 훔쳐서 만든 그 쓰레기 같은 곡들. 우리가 신곡을 발표하는 하루 만에 전부 차트에서 폐기물 처럼 쓸려 나가게 될 거다.”
극도의 분노와 자격지심에 휩싸인 서도관의 눈이 핏발로 붉게 물들었다. 기자들의 시선, 동료들의 수군거림, 그리고 자신을 완벽하게 간파하고 있는 연우의 그 오만한 눈빛이 그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하! 하루 만에 우리를 쓸어버려? 하하하!”
도관이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그는 기자들의 마이크를 거칠게 빼앗아 들었다.
“좋아! 어디 이빨 한번 잘 깠다, 백연우! 네가 데리고 있는 저 목 망가진 년이랑, 네가 만든 그 거지 같은 신곡으로 우리랑 정면으로 붙어보자고! 만약 네 신곡이 표절 시비 없이 깨끗하게 발매돼서, 우리 곡보다 단 순위라도 높으면... 내가 이 바닥에서 손가락이라도 자르고 은퇴하겠다!”
도관이 뱉어낸 파멸적인 선언에 장내가 다시 한번 요동쳤다.
“하지만 만약 네가 지면!”
도관이 핏대를 세우며 연우를 가리켰다.
“너는 네온 엔터의 모든 자산과 저 년의 전속 계약서를 무상으로 나한테 넘기고, 평생 내 밑에서 개처럼 기어 다니는 거다! 어때, 받아들일 배짱은 있냐?”
그것은 함정이었다. 코어 미디어의 압도적인 자본력과 차트 바이럴 카르텔을 믿고 지르는 도도한 협박이었다.
윤민혁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연우의 소매를 붙잡았다.
“연우야, 이건 안 돼! 저놈들은 차트를 조작할 수도 있는 놈들이야! 절대 응하면...”
그러나 연우는 민혁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리고 서도관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냉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라던 바다.”
그 짧은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대연회장의 대형 스크린에 실시간 속보가 뜨기 시작했다.
[속보: 네온 엔터 백연우 VS 코어 미디어 서도관, 신곡 차트 정면 승부 선언! 패배 시 업계 영구 퇴출 공약]
로비의 열기가 광풍처럼 몰아치는 가운데, 연우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뒤를 따르는 한채아의 눈빛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오직 차가운 투지만이 서려 있었다.
멀어지는 연우의 등 뒤로, 2F VIP 테라스 난간에 기댄 한 사내의 시선이 꽂혔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차가운 안경을 쓴 사내. 코어 미디어 강태신 회장의 대리인이자 수석 비서였다. 그는 연우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사내가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단 한 번 가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 백연우가 움직였습니다. 서도관의 도발에 걸려들어 판을 키웠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낮고 음산한 강태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래. 쥐새끼가 제 발로 덫으로 기어 들어왔군. 96시간이라고 했나? 그전에 숨통을 끊어놓아라.
전화가 끊기고, 비서의 차가운 시선이 연우의 뒤통수를 꿰뚫을 듯 노려보았다. 이제 막, 진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