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계약해.”
연우가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널 빌보드 왕좌에 앉혀두지. 대신, 네 목소리와 영혼을 내 장부에 바쳐라.”
지하 연습실의 깨진 형광등이 지직거리며 마지막 단말마 같은 빛을 뿜어냈다. 눅눅한 지하실 특유의 곰팡이 냄새와 먼지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한채아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와 혼란, 그리고 가느다란 생존의 갈망으로 잘게 흔들렸다.
“내... 내 목소리는 끝났어요.”
채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목구멍에서 긁혀 나오는 소리는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놈들이 내 목을 자른다고... 다시는 업계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법적으로도 난 묶여 있어요. 코어 미디어의 노예 계약서가 여전히 유효해요. 내가 도망치면 수억 원의 위약금 청구 소송이 들어올 거라고...”
“그 사슬은 내가 끊는다.”
연우의 단호한 목소리가 지하실의 서늘한 공기를 갈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사시나무 떨듯 떠는 채아의 오른손을 덥석 낚아챘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운 피부 너머로 느껴지는 맥박은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꺼지기 직전의 불씨처럼 미약하지만, 분명히 요동치는 생명의 증거였다.
“앗...!”
채아가 본능적으로 손을 빼내려 힘을 주었다. 낯선 남자의 손길이 주는 불쾌함과 경계심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했다. 그러나 연우의 손아귀는 단단했다. 쇠사슬처럼 질기고 굳건하게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채,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놓으세요! 이거 놔요!”
“못 놓는다.”
연우는 채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과거의 배신으로 굳어버린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비즈니스적 확신과, 이 원석을 기필코 자신의 장부 위에서 가장 빛나는 화폐로 만들겠다는 지독한 갈망만이 서려 있었다.
“네가 도망칠 곳은 없어, 한채아. 코어 미디어의 사냥개들이 네 뒤를 쫓고 있고, 세상은 네 말을 믿어주지 않아.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손을 잡고 무대 위로 올라가 그 새끼들을 밟아 뭉개는 것뿐이다.”
말과 동시에 연우는 품에서 꺼낸 붉은 인패드를 열었다. 그리고 채아의 엄지손가락을 강제로 붉은 인주에 문질렀다.
촉촉하고 끈적한 붉은 액체가 그녀의 지문에 묻어났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
채아가 애원하듯 고개를 저었지만, 연우는 차분하게 그녀의 엄지손가락을 이끌어 네온 엔터테인먼트의 전속 계약서 우측 하단, 서명란 위로 가져갔다.
꾹.
종이 위에 선명한 선홍빛 지장이 새겨졌다.
그 순간, 계약서의 종이 질감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미세하게 일렁였다. 연우의 시야에만 보이는 시스템의 톱니바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채아는 자신의 손끝에서 시작해 가슴 깊은 곳까지 흘러드는 기묘한 온기에 움찔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옥죄던 거부감과 두려움이, 이 기이하고 단단한 사내의 손길 아래서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은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 적어도, 자신을 가스라이팅하고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코어 미디어의 괴물들로부터 지켜줄 방패가 되어줄 것이라는 기묘한 안도감이 싹텄다.
채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서서히 그쳤다. 눈물로 얼룩진 뺨을 소매로 거칠게 훔쳐내며, 그녀가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구원해 줄 수 있어요?”
“구원이 아니다.”
연우가 차갑게 대꾸했다.
“이건 철저한 거래다. 난 네 목소리로 세상의 판도를 뒤엎고 빌보드 1위를 차지할 거다. 넌 그 가치를 증명하면 돼.”
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 서려 있던 절망이 조금씩 독기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품속 깊은 곳, 낡은 가죽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스륵.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은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아주 작은 금속 재질 USB 드라이브였다. 겉면에는 긁힌 자국이 가득했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이거...”
채아가 USB를 연우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녀의 손끝이 다시 미세하게 떨렸다.
“강태신 사장이 저와 다른 연습생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그리고 방송사 피디들에게 어떤 식으로 성 상납을 강요하고 불법 리베이트를 건넸는지 전부 담겨 있는 파일이에요. 강태신의 개인 금고에서 목숨 걸고 빼내 온 거예요. 이중 장부와 탈세 증빙용 암호화 문서들도 다 들어있어요.”
연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게 네 목숨값이라는 거군.”
“맞아요. 코어 미디어에서 날 죽이려고 혈안이 된 진짜 이유가 바로 이거예요. 이게 세상에 공개되면 강태신은 끝장나요. 하지만 이 안의 파일들은 고도의 암호화가 걸려 있어서, 전용 키 없이는 열 수 없어요. 전 그 복호화 키를 머릿속에 외우고 있어요.”
채아의 눈빛에 단호한 결의가 서렸다.
“이걸 담보로 드릴게요. 내가 당신한테 주는 첫 번째 무기예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절 배신하면, 이 무기는 당신의 심장도 찌를 수 있으니까.”
연우는 채아의 손바닥 위에 놓인 USB를 집어 올렸다. 묵직하고 서늘한 금속의 촉감이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졌다.
‘강태신의 불법 거래 내역과 탈세 증빙이라.’
연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과거 회귀 전, 코어 미디어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자금줄과 로비 카르텔의 실체가 이 작은 칩 하나에 담겨 있는 셈이었다. 서도관의 위조 인장 수령증과 더불어, 강태신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놓을 수 있는 핵폭탄급 무기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연우가 USB를 코트 깊숙한 곳에 밀어 넣는 순간.
잉-!
귓가를 때리는 날카로운 이음과 함께, 연우의 시야에 정교한 회계 장부 템플릿 모양의 홀로그램 창이 거대하게 펼쳐졌다.
[시스템: 계약 주입 완료 및 등가교환 성립] [아티스트: 한채아 (전속 계약 상태: 네온 엔터테인먼트 귀속 완료)] [신규 자산 획득: 메가 히트곡 'Mirage' (성공 예상치: 빌보드 HOT 100 진입률 94.2%)]
황금빛 인터페이스가 가쁘게 점멸하더니, 이내 붉은색 경고 창으로 격변했다.
[경고: 인과율의 채무 발생] [미래 자산 'Mirage'의 현실 소환을 위한 정산 조건이 부여됩니다.] [채무 세부 사항: 1. 아티스트 한채아의 120시간 연속 수중 보컬 발성 훈련 이행. 2. 과거 성 상납 강박 및 무대 공포 트라우마의 100% 극복 요구.] [정산 기한: 코어 미디어 쇼케이스 무대 역공 시점까지 (남은 시간: 96시간)] [실패 시 대가: 소유주 '백연우'의 수명 3년 차감 및 미래 음원 장부 영구 폐쇄]
수명 3년 차감.
연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등가교환의 법칙은 언제나 공평하면서도 잔인했다. 미래의 영광을 미리 가불해 쓰는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120시간 연속 수중 보컬 훈련과 트라우마의 완벽한 극복. 그것은 한채아의 성대와 정신을 문자 그대로 한계까지 갈아 넣어야만 가능한 지옥의 퀘스트였다.
하지만 연우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좋다. 지옥이든 뭐든 기꺼이 건너주지.’
그때였다.
쾅-!
지하 연습실의 낡은 철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거친 숨소리가 좁은 공간을 채웠다.
“허억... 헉...! 야! 백연우!”
네온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윤민혁이었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에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해결사들의 흔적과 붉은 지장이 찍힌 계약서, 그리고 울음 자국이 선명한 한채아에게 차례로 닿았다.
“너... 너 진짜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민혁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코어 미디어 애들이 밑바닥 깡패들까지 풀어서 애를 잡으러 다닌다더니, 결국 여기로 데려온 거야? 야, 백연우! 우리 회사 지금 당장 파산 신청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야! 대기업이랑 소송전을 해서 우리가 이길 성싶으냐! 저들은 법무법인 하나를 통째로 부릴 수 있는 괴물들이라고!”
민혁은 고압적인 태도로 연우의 어깨를 밀치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은 공포와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당장 이 애 내보내! 코어 미디어에 돌려보내고 우린 모르는 일이라고 해야 돼! 안 그러면 네온은 고사하고, 너랑 나 둘 다 소리소문없이 한강 물에 빠지는 수밖에 없어!”
그러나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민혁의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연우의 눈길이 민혁의 바지 주머니로 향했다. 주머니 틈새로 살짝 삐져나온 스마트폰 화면에는 사채업자와 제2금융권 대출 한도를 조회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윤민혁은 그런 인간이었다. 겉으로는 찌질하고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지만, 뒤에서는 어떻게든 제 식구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줄을 담보로 돈을 빌리러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미련할 정도의 토대자.
연우는 민혁의 고압적인 질책을 묵묵히 받아내며,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장님. 진정하십시오.”
“진정? 지금 내 눈앞에서 회사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진정이 나와? 저 한채아라는 애, 코어 미디어에서 성 상납이니 뭐니 찌라시 돌려서 매장하기 직전이야! 이미지 세탁도 안 되는 사한을 우리가 왜 떠안아!”
“법적으로 한채아는 이미 자유의 몸입니다.”
연우가 계약서를 흔들어 보였다.
“코어 미디어가 채아와 맺은 계약서에는 치명적인 독소 조항이 존재합니다. 아티스트의 동의 없는 전속권 양도 및 사생활 침해 조항. 그리고 무엇보다, 채아가 가지고 있는 강태신의 불법 비자금 내역이 터지는 순간 그 계약서는 원천 무효가 됩니다. 법정으로 가면 저들이 먼저 터집니다. 강태신은 이 사실을 알기에 소송이 아니라 깡패들을 보내 채아를 강제로 납치하려 한 겁니다.”
민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그게 무슨...”
“우리는 법정에서 싸우지 않습니다. 저들이 준비한 프레임 안에서 놀아나지 않을 겁니다.”
연우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언했다.
“우리는 곡으로 정면 대항합니다. 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완벽한 음악적 히트입니다. 가요계의 카르텔을 깨부수는 유일한 방법은 대중의 귀를 사로잡는 압도적인 음악뿐입니다.”
연우는 품안에서 미리 인쇄해 두었던 악보 한 장을 꺼냈다. '미래 음원 장부'가 산출해 낸 메가 히트곡이자, 인과율의 채무로 획득한 전설의 악곡.
[Mirage (신기루)]
악보의 제목이 어두운 지하 연습실의 조명 아래 검게 빛났다.
“이 곡입니다. 코어 미디어가 세운 모든 장벽을 단숨에 조각낼 무기.”
연우가 악보를 민혁과 채아의 앞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민혁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악보를 바라보았다.
“곡이라고...? 지금 곡 하나 잘 뽑는다고 코어 미디어의 바이럴 카르텔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저놈들은 음원 차트 조작부터 방송 출연 정지까지 다 할 수 있는 놈들이야!”
“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연우의 시선이 채아에게로 향했다.
“한채아. 이 악보를 봐라.”
채아는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이 악보 위에 그려진 오선지와 음표들에 닿았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악보처럼 보였다. 하지만 음표들의 배치를 따라 시선을 옮길수록, 그녀의 심장이 기묘하게 뛰기 시작했다. 클래식과 트렌디한 팝의 경계를 정교하게 무너뜨리는 멜로디 라인. 목소리의 가장 아름다운 주파수 대역을 극대화하도록 정밀하게 설계된 보컬 파트.
이것은 단순한 곡이 아니었다. 한채아라는 천재 보컬의 성대와 감성을 해부하여, 오직 그녀만을 위해 신이 내린 듯한 완벽한 맞춤형 드레스였다.
“이... 이 곡은...”
채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악보의 첫 소절을 짚었다.
그녀의 목구멍 안쪽, 오랫동안 가스라이팅과 트라우마로 굳게 닫혀 있던 성대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면 목이 잘릴 것이라던 공포의 사슬이, 오선지 위의 음표들을 보는 순간 기적처럼 느슨해졌다.
노래하고 싶다.
이 선율을 내 목소리로 세상에 뿜어내고 싶다.
지독한 갈망이 그녀의 눈동자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채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떨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 아아...”
첫 소절의 가이드 멜로디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웅-!
지하 연습실의 공기가 일순간에 얼어붙는 듯한 기묘한 진동이 일었다. 벽면에 습기 차 있던 거울들이 미세하게 공명하며 징- 하는 소리를 냈다.
단 한 소절. 반주도 없는 생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음색은 지하실의 눅눅한 공기를 단숨에 찢어발기며 고막을 파고들었다. 소름 돋을 정도로 맑고, 동시에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애절함이 서린 천재의 목소리였다.
윤민혁은 넋을 잃은 채 채아를 바라보았다. 비명을 지르던 그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연우의 눈앞에서 황금빛 장부 창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시스템: 아티스트 '한채아'의 잠재 가창력 개방] [수치 측정 중...] [가창 소질: 99.9% (확정)] [경고: 인과율의 채무 정산이 정식으로 개시됩니다. 남은 시간 95시간 59분.]
지하 연습실의 어둠 속에서, 세 사람의 숨소리만이 주파수처럼 무겁게 공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