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포 깊숙한 곳까지 차가운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뒤틀린 수압이 귓가를 찢어발겼고, 사지를 결박한 쇠사슬이 가차 없이 심해로 몸뚱이를 끌어내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지막으로 마주한 것은 선상 위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코어 미디어의 수장, 강태신의 비열한 미소였다.
‘연우야, 네가 만든 음악은 참 좋아. 근데 말이지, 세상은 음악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거든.’
그것이 대한민국 가요계를 집어삼킨 거대 카르텔의 방식이었다. 쓸모가 다한 천재 프로듀서는 차가운 바다의 먹이로 버려졌다. 억울함과 분노로 눈이 뒤집히고, 이대로 심장이 멎는다고 생각한 순간—
“커헉! 훅, 흐으윽!”
사방이 꽉 막힌 사각의 공간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들이마신 것은 짠 바닷물이 아니었다. 미적지근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섞인 습한 공기였다. 백연우는 바닥을 짚은 채 미친 듯이 기침을 토해냈다. 입안 가득 고인 것은 모래가 아니라 누런 먼지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극도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비좁은 방. 벽면 거울의 모서리는 습기 때문에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은 위태롭게 깜빡이며 소음을 냈다. 한구석에 놓인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와 찢어진 가죽 소파.
청담동 변두리 터널 옆, 낡은 5층 빌딩의 지하. 파산 직전의 중소 기획사 ‘네온 엔터테인먼트’의 지하 연습실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분명 강태신의 손에 이끌려 서해 앞바다에 처박혔을 터였다.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손목에 채워진 것은 닳고 닳은 가죽 밴드의 저가 시계. 화면에 표시된 날짜는 정확히 3년 전 오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회귀였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눈앞의 허공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아닌, 묵직하고 차가운 황금빛의 기하학적 선들이 얽히며 하나의 거대한 책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스르륵.
낡은 가죽 장부가 펼쳐지는 듯한 소리가 이청을 자극했다.
[미래 음원 장부 (Future Music Ledger) 개방] [소유주: 백연우] [보유 자산: 미래 메가 히트곡 지표, 아티스트 잠재력 시각화] [현재 채무: 인과율의 부채 (미래 자산 현실화 시 정산 필요)]
글자들이 망막 위에 붉은 인장처럼 선명하게 박혔다. 연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손을 뻗어 허공을 저었지만, 장부는 오직 그의 시선 끝을 따라 움직이며 정교한 회계 장부의 형태로 정렬되었다.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장부의 맨 첫 장, 붉은색 취소선이 그어진 수많은 기획안 사이로 단 하나의 이름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티스트: 한채아] [보컬 잠재력: SSS (미개발)] [현재 상태: 정신적 패닉, 성대 하부 미세 스크래치 수치 42%] [시장 가치 예측: 50,000,000,000 KRW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진입 가능)]
한채아. 코어 미디어에서 성 상납 누명을 쓰고 강제로 쫓겨났던, 그리고 끝내 목소리를 잃고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던 그 천재 보컬의 이름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지하 연습실의 철문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안쪽으로 꺾여 들어왔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구두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이, 여기 숨어 있었네. 이 쥐새끼 같은 년이 어디서 도망을 쳐?”
가죽 재킷을 걸친 거구의 사내 셋이 연습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맨 앞에 선 사내의 목덜미에는 짙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손에는 쇠파이프가 들려 있었고, 거칠게 안을 훑어보던 눈빛이 소파 뒤편의 좁은 틈새에 머물렀다.
“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소파 뒤, 먼지 쌓인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한 여자가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 나왔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 사이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한채아였다.
그녀의 얇은 셔츠 손목 부분은 찢어져 있었고, 드러난 살결에는 붉은 피멍이 선명했다.
“놔요! 놓으라고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요!” “잘못한 게 없긴 왜 없어? 강 회장님이 부르시는데 감히 대가리를 굴려? 네 몸뚱이 하나 팔아서 네 아비 도박 빚 갚기로 계약서 쓴 게 누군데 이래?”
문신 남자가 채아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흔들자, 그녀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살해 위협에 가까운 공포가 그녀의 눈동자를 완전히 잠식하고 있었다.
연우의 뇌리에 과거의 기억이 스쳤다. 이 날이었다. 한채아가 코어 미디어의 마수에서 도망쳐 네온 엔터의 지하로 숨어들었던 날. 그리고 자신이 그저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 결과 한채아는 끌려가 영혼까지 파괴당했고, 자신 역시 코어 미디어의 사냥개로 살다 버려졌다.
‘이대로 두면, 내 미래는 또다시 그 바닷속이다.’
연우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타인을 향한 동정심 따위는 없었다. 배신으로 점철된 삶 속에서 그가 믿는 것은 오직 확실한 계산기뿐이었다. 저 여자는 빌보드로 갈 수 있는 500억짜리 원석이다. 그리고 자신을 죽인 강태신의 목구멍에 처박을 칼날이기도 했다.
스륵.
연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거기까지 하시지.”
차가운 음성이 연습실의 공기를 갈랐다. 문신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비친 연우는 그저 꾀죄죄한 셔츠 차림의 중소 기획사 실장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앙? 넌 또 뭐야? 뒈지기 싫으면 구석에 처박혀 있어라, 멸치 새끼야.” “이곳은 네온 엔터테인먼트의 소유지입니다. 허가받지 않은 불법 침입, 기물 파손, 그리고 강요 및 납치 미수. 현행범으로 체포되기에 아주 훌륭한 요건들이지.”
연우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사내를 응시했다.
“실장님…!”
채아가 눈물 고인 눈으로 연우를 바라보며 그의 코트 자락을 간절하게 붙잡았다. 그녀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제발요. 저 저 사람들에게 끌려가면 죽어요. 강 회장이… 나를…”
그녀의 목소리에는 짐승의 신음 같은 절박함이 묻어났다. 연우는 그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투자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 새끼가 곱게 말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문신 남자가 쇠파이프를 들어 올리며 연우의 어깨를 밀쳐내려 했다.
그 순간, 연우의 눈앞에 ‘미래 음원 장부’의 보조 화면이 빠르게 갱신되며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텍스트가 나열되었다.
[대상: 배기철] [직업: 대한자산관리(무등록 불법 사채업체) 바지사장] [약점 정보 조회 완료] - 최근 3년간 법인세 및 종합소득세 미납액: 1,420,000,000 KRW (국세청 조사 4국 추적 중) - 바지사장 신분으로 코어 미디어 경영지원 실장 강태신에게 받은 우회 자금 세탁 내역 존재 (차명 계좌: 신한 110-***-****)
연우의 입꼬리가 찰나의 순간 기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사방을 압도하는 지독하게 차가운 미소였다.
“배기철 씨.”
연우가 나직하게 이름을 읊조렸다. 쇠파이프를 내리치려던 남자의 동작이 허공에서 굳었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너…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 “대한자산관리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상은 등록도 안 된 불법 고리대금업자잖아. 맞나?” “이 새끼가 진짜…” “국세청 조사 4국에서 요즘 세금 세탁하는 쥐새끼들 잡으려고 눈이 벌게져 있던데. 배기철 씨가 지난 3년간 떼먹은 세금만 정확히 14억 2천만 원이더군.”
연우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사내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낮고 은밀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무게는 사내의 심장을 짓눌렀다.
“무엇보다, 신한은행 110으로 시작하는 차명 계좌. 코어 미디어 강태신 실장한테 구린 돈 받아서 배달하는 통장 말이야. 그거 지금 국세청에 찌르면, 강태신이 널 살려둘 것 같나? 아니면 니들이 먼저 세무서 철창으로 들어갈래?”
배기철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셔갔다. 이마에서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려 눈가로 스며들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비밀이었다. 코어 미디어의 수장과 연결된 자금 세탁용 차명 계좌의 앞자리 번호까지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이 남자의 정체가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너, 너 정체가 뭐야? 대체 어떻게 그걸…” “선택해. 여기서 이 여자 머리채 놓고 조용히 꺼질지, 아니면 5분 뒤에 들이닥칠 경찰과 국세청 수사관들을 여기서 맞이할지.”
그때, 저 멀리 대로변에서부터 날카로운 경찰 사이렌 소리가 지하 연습실의 깨진 창문 틈새로 흘러들었다. 연우가 이곳에 들어서기 전, 이미 네온 엔터의 대표 윤민혁을 통해 경찰에 신고를 넣어둔 상태였다. 타이밍은 예술적일 정도로 완벽했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배기철의 부하들이 초조한 듯 그의 눈치를 보았다.
“형님, 경찰입니다. 진짜 꼬이면 골치 아파집니다.” “쳇…!”
배기철은 이를 갈며 한채아의 머리채를 거칠게 내던졌다. 채아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짧은 신음을 뱉었다.
배기철이 연우의 멱살을 잡을 듯 손을 뻗었다가, 이내 허공에서 주먹을 꽉 쥐며 뒤로 물러섰다.
“백연우라고 했나? 오늘 일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코어 미디어가 어떤 곳인지 곧 뼈저리게 알게 될 거다.” “기대하고 있지. 조심히 가라고, 탈세범 씨.”
연우가 비웃음 섞인 태도로 목례를 건넸다. 배기철은 쇠파이프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부하들을 이끌고 황급히 지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우당탕거리는 발소리가 사라지고, 지하 연습실에는 오직 적막만이 감돌았다.
후우.
연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손끝에 남아 있는 미세한 떨림을 숨기기 위해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힘이 없는 정의는 사치일 뿐이다. 지금은 그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쪼가리와 기밀로 적의 숨통을 잠깐 조였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는 몸을 돌려 낡은 사무용 데스크로 향했다. 서랍을 열고 맨 안쪽의 이중 바닥을 손가락으로 뜯어냈다. 먼지 쌓인 서류 더미 사이로 붉은색 스탬프가 선명하게 찍힌 종이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극비 원작 가이드 폐기 수령증] [확인자: 코어 미디어 수석 프로듀서 서도관 (인)]
연우의 눈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과거 자신이 기획 실장 시절 작성했다가 서도관에게 빼앗겼던, 그리고 훗날 서도관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해 메가 히트를 기록했던 오리지널 악곡의 특허 무단 도용을 입증할 결정적 단서였다.
그 서류를 소중하게 접어 코트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이것으로 첫 번째 패가 쥐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눈앞에 쓰러져 있는 원석을 가공하는 일이었다.
연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은 채 흐느끼고 있는 한채아에게로 걸어갔다. 그녀는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불러야 해…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목소리가 안 나와… 그 사람들이 내 목을… 내 목을 자른다고 했어…”
코어 미디어에서 겪은 가혹한 가스라이팅과 성적 수치심, 그리고 영혼을 갉아먹는 협박이 그녀의 천재적인 성대를 꽉 틀어쥐고 있었다.
[미래 음원 장부 퀘스트 활성화] [인과율의 채무: 아티스트 '한채아'의 심리적 트라우마 해소 및 성대 치료] [달성 조건: 4일 뒤 코어 미디어 쇼케이스 무대에서의 역공 성공] [실패 시 대가: 소유주 '백연우'의 생명력 10% 감소 및 장부 영구 폐쇄]
장부의 붉은 경고등이 연우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등가교환의 법칙. 미래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지옥 같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연우는 천천히 Chae-ah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그림자가 그녀의 떨리는 어깨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그는 다정한 구원자처럼 굴지 않았다. 오히려 비즈니스를 제안하는 냉혹한 투자자의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한채아.”
건조하고 단단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Chae-ah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울음 가득한 눈으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너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그 새끼들을 찢어발기고 싶지 않나?”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우는 품속에서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네온 엔터테인먼트의 전속 계약서를 꺼내 그녀의 눈앞에 내려놓았다. 눈앞에 떠오른 황금빛 장부의 계약 조항들이 계약서 종이 위로 스며들며 은은한 빛을 발했다.
“나와 계약해.”
연우가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널 빌보드 왕좌에 앉혀두지. 대신, 네 목소리와 영혼을 내 장부에 바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