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전장의 최상단 귀빈석.
가장 호사스러운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레오폴드 크리스판이 차가운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붉은 경보등이 깜빡이기 시작한 에드릭의 개인 단말기였다.
레오폴드가 곁에 서 있던 시련의 탑 규칙 관리자에게 가볍게 눈짓했다.
"준비된 대로 진행해라. 도태되어야 할 오물이 너무 오래 숨을 쉬고 있군."
"예, 크리스판 님. 즉시 심연 구역의 보안 장벽을 물리적으로 폐쇄하고, 대상의 위치를 고립시키겠습니다."
관리자가 조용히 머리를 숙이며 통신 장치에 손을 올렸다.
가장 합법적이고 완벽한 사고사를 위장한 납치 계획.
그 음습한 밀어가 어둠 속에서 기동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그로부터 불과 몇 분 뒤.
에드릭은 스산한 냉기가 감도는 '시련의 탑' 최하층 폐기 구역, [심渊 (The Abyss)]의 입구에 서 있었다.
사각, 사각.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깔린 오래된 마동석의 잔해가 모래처럼 밟히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주변은 빛 한 점 제대로 들지 않는 심연의 인공 미로였다.
웅―!
갑자기 정적을 깨고 이명이 일었다.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에드릭의 전방 10미터 앞 공간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소리도 없었다.
아무런 예고 징후도 없이, 허공에서 수십 줄기의 얇고 푸르스름한 광선들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얽히고설키며 촘촘한 그물망을 형성했다.
[암살 구역 광성(光星) 레이저 트랩 장벽].
아카데미의 정상적인 방어 체계라면 결코 작동해서는 안 될, 살상용 고대 마도 트랩이었다.
"과연."
에드릭은 걸음을 멈추고 낮게 읊조렸다.
붉은 레이저 장벽은 그의 퇴로와 전진 가도를 완벽히 차단하고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내디뎠어도 전신이 바둑판 모양으로 조각나 타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에드릭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망막 위에 투명한 시스템 로그들이 푸른빛을 띠며 떠올랐다.
[! 시스템: 메커니즘 디버깅(Mechanism Debugging) 활성화] - 타임 어택 제한 시간: 29분 12초 - 현재 싱크로율: 94% - 마력 독성 수치: 3%
"겨우 이 정도로 나를 묶어두겠다고?"
에드릭은 벽면 구석으로 다가갔다.
녹슬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마력 제어 기판이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 끝으로 기판의 틈새를 덧그리자, 미세한 정전기와 함께 시스템의 숨겨진 배선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직접 시각화되어 들어왔다.
단순한 던전의 구조가 아니었다.
이 폐기 구역의 동력선은 아카데미가 제어하는 공식 라인이 아니었다.
에드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칼리아스 아카데미 건물의 주 동력 노드와 무단으로 연결된 가짜 통제 보조 전원들.'
그것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시련의 탑 최하층으로 마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누군가 상층부의 눈을 피해 사설로 구축해 놓은 불법 전력망이었다.
[디버깅 연산 개시…….] - 가짜 보조 전원 노드 7개 감지. - 메인 전력 오버플로우(Overflow) 좌표 공간 식별 완료. - 대상 메모리 주소: 0x7FFA89B00F12
'이 주소는…….'
에드릭은 순간적으로 포착된 데이터의 물리적 위치를 짚어냈다.
학내 대강당 기단 아래 깊숙한 곳.
그곳에 아카데미 전체의 중추 시뮬레이션 인과율을 제어하는 '가짜 노드'의 시스템 버퍼 오버플로우 메모리 주소가 숨겨져 있었다.
레오폴드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아카데미 제어권 찬탈의 핵심 쐐기 중 하나였다.
"생각보다 거대한 꼬리를 밟았군."
에드릭은 그 좌표 값을 자신의 개인 단말기 메모리 영역에 조용히 복사해 두었다.
지금 당장 터뜨릴 패는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레오폴드의 목줄을 쥘 수 있는 완벽한 화약고가 될 터였다.
바스락.
그때, 어둠 속에서 옷자락이 스치는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한둘이 아니었다. 최소 열 명 이상.
암살 구역의 레이저 트랩이 가동됨과 동시에, 에드릭을 확실하게 숨지게 만들기 위해 파견된 황금 왕관회 소속의 정예 자객들이었다.
그들은 완벽한 은형술을 펼치며 에드릭의 사방을 포위해 오고 있었다.
스탯이 잠긴 낙제생 하나를 죽이기 위해 이중, 삼중의 덫을 놓은 집요함.
하지만 에드릭은 주머니에서 작은 칩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얼마 전 결투에서 무력화시켰던 볼카 자카르의 대검에서 추출한 전투 보조 마법식 데이터 칩이었다.
[복선 데이터 로드: '마법 마력 흔적 추적(Mana Flow Tracking)' 실시간 전송 주파수] - 주파수 대역: 842.15 MHz - 대상 감지 로그 정합 중…….
볼카가 상시 가동하던 이 추적 술식은 본래 상대의 위치를 쫓는 용도였지만, 에드릭의 손을 거치는 순간 전혀 다른 무기로 돌변했다.
"그 멍청이가 남긴 유산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겠지."
에드릭이 디버깅 권능을 발동해 해당 주파수를 역조정했다.
단순히 흔적을 추적하는 신호에 극도의 마력 과부하 주파수를 강제로 정합하여, 대역폭 전체에 노이즈를 주입하는 역설적 간섭이었다.
지이이이잉―!
어둠 속에서 에드릭을 조용히 포위해 오던 자객들의 로브 안쪽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엇……?!"
"이, 이게 무슨……!"
그들이 은형술을 유지하기 위해 가동하던 개인 마력 추적 장치들이 일제히 스파크를 일으키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은신이 강제로 풀린 자객들의 신형이 허공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들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기도 전에, 에드릭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메커니즘 디버깅: 광성 레이저 트랩 '입사 판정 마스크(Collision Mask)' 변경] - 기존 타깃: 에드릭 (F등급) - 변경 타깃: 실시간 마력 역류 반응체 (자객들의 체력 보호 장벽) - 굴절 각도: 180도 역전
찌이이이이익―!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푸른 광선들이 미친 듯이 꺾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에드릭을 빗겨 나가, 은신이 풀려 당황하던 자객들의 전면으로 정확하게 쏟아졌다.
"방어막을 켜라! 어서!"
자객들의 대장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자신의 마력 보호막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것이 최악의 악수였다.
광선 트랩의 입사 판정은 이미 '체력 보호 장벽' 그 자체를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방어막을 켜면 켤수록, 레이저 광선은 자성을 띤 것처럼 그 장벽으로 더 강하게 빨려 들어갔다.
콰아아앙!
"아아아악!"
가장 먼저 방어막을 전개했던 자객이 자신의 방어막에 반사되고 굴절된 수십 줄기의 광선에 온몸이 꿰뚫렸다.
그의 마력이 레이저와 반응하여 스스로를 불태우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파지직! 콰쾅!
"도, 동력 제어가 안 된다! 장벽을 꺼! 어서……!"
"안 꺼집니다! 마력 회로가 합선됐―!"
비명과 함께 사방에서 붉은 불꽃과 비명이 교차했다.
자객들이 자랑하던 단단한 체력 보호 벽은, 이제 그들을 가두고 통구이로 만드는 치명적인 감옥으로 변해 있었다.
광선이 자객들의 마력 회로를 타고 역류하며 그들의 신체를 내부에서부터 파괴했다.
수십 명의 상위 암살자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에드릭의 교묘한 빔 굴절 장난질에 서로의 살의를 교환하며 가루로 화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독하고도 통쾌한 미시적 역설이었다.
터엉! 웅…….
마지막 자객이 잿더미가 되어 바닥에 쓰러짐과 동시에, 광선 장벽이 완전히 과부하로 소멸했다.
지독한 탄내가 진동하는 복도 한가운데, 에드릭만이 옷자락 하나 상하지 않은 채 고요히 서 있었다.
[! 시스템: 타임 어택 성공] - 제한 시간 내 구역 위협 요소 100% 제거. - 생명력 붕괴 프로토콜이 일시 정지됩니다. - 싱크로율이 2% 회복됩니다.
에드릭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폐부를 찌르던 차가운 마력 독성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통로 뒤편의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난입했다.
쾅!
"에드릭! 무사한가?!"
은빛 금속 장식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제복, 그리고 투명하게 빛나는 성검을 쥔 손.
플로렌시아 세이라였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의 참상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흩어진 잿더미와 황금 왕관회 자객들의 잔해를 본 그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건…… 설마 황금 왕관회의 자객들인가? 어떻게 법을 수호해야 할 그들이 이런 짓을……."
"여기가 사지라는 걸 이제야 알았나, 영애 분?"
에드릭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플로렌시아는 이를 악물며 성검을 고쳐 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에드릭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부당한 폭력에 대한 고결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아카데미의 상층부가 썩어빠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기 평가전 중에 이런 암살을 모의할 줄은 몰랐다. 에드릭, 나를 따라와라. 내 검이 있는 한, 그 누구도 너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 함께 이 미로를―"
"착각하지 마라."
에드릭이 그녀의 말을 차갑게 자르며 다가갔다.
그의 시선은 플로렌시아의 얼굴이 아닌, 그녀가 쥐고 있는 성검의 손잡이 부분에 닿아 있었다.
그곳에 정교하게 새겨진 성검의 문양.
평소라면 신성한 빛을 발해야 할 그 문양의 틈새로, 아주 미세하고 음습한 푸른빛의 노이즈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황금 왕관회가 심어둔 '마력 환류 버그(Mana Backflow Defect)'.
그녀는 에드릭을 돕기 위해 정의감에 불타 가문 전승의 성검을 뽑아 들었겠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목을 조르는 가장 확실한 올가미였다.
"너…… 네가 쥔 그 장난감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전혀 모르는 군."
에드릭의 목소리에 차가운 경고가 실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이건 가문의 성검이다. 결코 나를 배신하지―"
플로렌시아가 반박하려던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성검의 칼날에서 갑자기 눈이 시릴 정도의 눈부신 백색 광휘가 뿜어 나왔다.
아니, 그것은 정상적인 빛이 아니었다.
빛의 테두리를 따라 검은색 기맥이 잉크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 아아아윽!"
플로렌시아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검을 떨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성검은 마치 그녀의 손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검신에서 역류한 기괴한 흑마 기맥이 그녀의 손목을 타고 올라가, 전신의 마력 경로를 무자비하게 뜯어내기 시작했다.
"마력 회로가…… 역류……?!"
플로렌시아의 고결한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는 성검 가리개를 움츠러들며 비틀거리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검신에서 흘러나온 흑마 기맥이 그녀의 전신을 결박하듯 휘감았다.
"허억…… 흑……!"
숨을 쉬지 못하는 듯, 플로렌시아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빛이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에드릭은 쓰러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단말기를 켰다.
망막 위로 새로운 경고 로그가 붉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