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결투 장막이 붉게 타오르며 솟구쳤다.

비명과 광적인 환호가 사방에서 몰아치는 대경기장의 흙먼지가 사방으로 사납게 비산했다.

볼카 자카르가 흑적색으로 거칠게 불타오르는 검끝을 대지에 처박으며 거구를 떨쳤다.

그의 입술 사이로 피비린내 나는 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겨 주마!"

레오폴드가 경기장 시스템을 해킹해 가며 밀어 넣은 금기 주술.

그 끈적한 암흑 마력이 볼카의 굵은 혈관을 타고 흐르며 몸집을 두 배 가까이 팽창시키고 있었다.

볼카의 발끝이 붉은 모래를 무참히 짓이기며 탄환처럼 쇄도했다.

그 거대한 대검이 그리는 궤적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선과 같았다.

에드릭의 망막 위로 붉은 경고 로그가 쉴 새 없이 명멸했다.

하지만 에드릭의 심박수는 오히려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튕겨 나간 미세한 은빛 가루—레이라의 연구실에서 공수해 온 미세 곤충 골렘들이 허공에서 조용히 기하학적 대형을 갖추었다.

"제 무덤을 파는 데는 아주 천재적이군."

에드릭이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내며 중얼거렸다.

바람을 찢으며 돌진하는 볼카는 에드릭의 도주 방향을 완벽히 차단하기 위해, 자신만의 전매특허인 고유 마법식을 아낌없이 가동했다.

[적대 대상이 '마법 마력 흔적 추적(Mana Flow Tracking)'의 조율 강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립니다.]

웅웅거리는 진동음이 뇌막을 때렸다.

볼카의 대검에서 뻗어 나온 수십 갈래의 붉은 마력 실타래가 에드릭의 전신을 옭아매듯 뻗어 나갔다.

이 술식이 작동하는 한, 에드릭이 어떤 물리적 회피 기동을 하든 볼카의 대검은 인과율을 비틀어 타격 지점에 강제로 도달하게 된다.

스탯의 한계에 가로막힌 낙제생의 신체로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필중의 궤적.

그것이 볼카가 가진 무력의 본질이자, 황금 왕관회가 그를 신뢰하는 이유였다.

"도망쳐 봐라! 기어 봐라! 쓰레기 자식아!"

볼카의 포효와 함께 대검이 지면을 쓸며 사선으로 치솟았다.

그 순간, 에드릭의 눈동자가 기괴한 은빛으로 물들었다.

[메커니즘 디버깅(Mechanism Debugging) 권능 활성화.] [대상: 볼카 자카르의 '마법 마력 흔적 추적' 술식 주파수.] [추적 데이터 동기화 완료: 주파수 대역 442.15Hz - 445.80Hz.]

3화에서 볼카와 첫 대치를 벌였을 때, 에드릭은 이미 그의 무기에 새겨진 마동 궤적과 추적 주파수의 실시간 전송 데이터를 고스란히 캡처해 두었었다.

고인물 유저 영민에게 있어서, 한 번 노출된 적의 고유 패턴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완벽한 시스템적 취약점(Exploit)에 불과했다.

"동기화 개시."

에드릭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허공을 표류하던 미세 곤충 골렘들이 일제히 날개를 떨며 미세한 고주파 음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볼카의 추적 마동선이 가진 주파수와 정확히 '역위상'을 이루는 간섭 파동이었다.

스스스스―!

에드릭의 발끝을 향해 뻗어 오던 붉은 마력의 실타래들이 허공에서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좌표 인자가 뒤틀리는 징후였다.

"뭐, 뭐야?!"

돌진하던 볼카의 눈꺼풀이 경련했다.

분명히 에드릭의 심장을 똑바로 가리키고 있어야 할 대검의 유도 마법식이, 갈 길을 잃은 침침한 나침반처럼 제멋대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좌표가…… 안 잡혀?!"

"안 잡히는 게 당연하지."

에드릭이 한 걸음 가볍게 옆으로 비껴섰다.

"내가 네 추적 장치의 '진짜 대상'을 바꿔 놓았으니까."

에드릭은 장착했던 미세 화약 기계들을 볼카가 돌진하는 경로 상에 적재적소로 이탈시켰다.

그것들은 공기 중에 흩어지며 볼카의 흔적 추적 마동선과 직접 결합했다.

단순히 결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동선의 타겟팅 좌표 데이터를 에드릭의 신체가 아닌 '볼카 자신의 대검 내부 마력 핵'으로 강제 변경해 버렸다.

[시스템 로그 개입 강제 정합.] [수정 전: Target ID -> Edric (User)] [수정 후: Target ID -> Volka's Greatsword Core (Self)] [오류율: 0.00% - 강제 인과율 적용 완료.]

"미친… 무슨 짓을 한 거냐!"

볼카가 뒤늦게 대검을 멈추려 했으나, 이미 가속도가 붙은 거구는 제어 불능이었다.

게다가 레오폴드가 강제로 주입한 금기 주술의 마력 폭주가 대검의 마동 핵을 미친 듯이 과부하 상태로 몰고 가고 있었다.

결합 좌표 인자 오류.

그리고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절대적인 시스템적 역화(Backflow)였다.

콰아아앙―!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볼카의 대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던 흑적색 불꽃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그것은 에드릭을 향하지 않았다.

마치 성난 뱀처럼 똬리를 틀더니, 그대로 볼카의 가슴팍을 향해 역류해 들어갔다.

"끄아아아악?!"

볼카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뿜어낸 살상용 마력이, 자신의 추적 술식을 타고 고스란히 자신의 신체 마력 회로로 되돌아온 것이다.

회로의 과부하는 상상을 초월했다.

파지직! 콰직!

볼카의 양팔 피부가 찢어지며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의 자랑이던 두꺼운 근육들이 마력 역류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 터져 나갔다.

"커헉! 커어억!"

볼카가 선혈을 한 바가지나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서 힘없이 풀려난 대검이 붉은 모래바닥 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지면을 가득 채웠던 흑적색의 화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타는 듯한 살점 냄새와 비린내 나는 피 냄새만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

대경기장을 메우고 있던 천여 명의 사관후보생 무리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비명도, 환호도, 야유도 없었다.

오직 숨이 막힐 듯한 절망적인 침묵만이 관중석을 무겁게 짓눌렀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누군가 신음하듯 내뱉은 한마디가 침묵을 깨뜨렸다.

"볼카가…… 자멸했다고?"

"마력 연창도 없었어. 에드릭은 손가락 하나 까딱했을 뿐인데……."

황금 왕관회의 정예이자, 천 배가 넘는 마력 스탯을 가진 광전사 볼카 자카르.

그 압도적인 천재가, 마력 한 톨 쓰지 않은 낙제생의 손짓 한 번에 제 마력에 휩쓸려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 잔혹하고도 기괴한 현실 앞에 사관후보생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마력 지상주의'라는 세계의 규칙이, 단 한 명의 무마력 낙제생에 의해 철저히 부정당하는 순간을 목도한 공포였다.

에드릭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모래를 밟는 그의 발소리가 침묵이 내려앉은 경기장에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

그는 쓰러져 신음하는 볼카의 머리맡에 멈춰 섰다.

"꺼흑…… 컥…… 네놈, 무슨 짓을……."

볼카가 충혈된 눈으로 에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온몸의 혈관이 터져 나가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지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에드릭은 대답 대신 발을 들어 볼카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억?!"

볼카의 입에서 핏덩이가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에드릭은 허리를 숙여, 볼카의 가슴팍 안쪽에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금빛 인장—자카르 가문의 성물 권리 증명서를 거침없이 끄집어냈다.

"이건 결투의 대가로 받아 가지."

"그, 그것만은……! 가문의……!"

볼카의 눈에 처음으로 진정한 공포가 서렸다.

가문의 성물 권리를 잃는다는 것은, 가문 내부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가 완전히 소멸함을 의미했다.

하지만 에드릭의 눈빛에는 한 줌의 자비도 없었다.

그에게 볼카는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던전을 공략하고 살아남기 위해 이용하고 버릴, 잘 길들여진 '장치' 중 하나에 불과했다.

"돌려받고 싶다면, 언제든 다시 덤벼라."

에드릭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는 네 목숨값으로 이 증명서를 사야 할 거다."

에드릭은 증명서를 품에 넣고, 바닥에 떨어진 볼카의 대검을 발로 툭 차서 멀리 날려버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경기장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관중석의 그 누구도 에드릭의 뒷모습을 향해 야유를 보내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에드릭은 더 이상 무능한 낙제생이 아니었다.

세상의 법칙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었다.

대경기장 최상단 좌석.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귀빈석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레오폴드 크리스판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의 손가락이 고급스러운 가죽 의자의 팔걸이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재미있는 벌레로군."

레오폴드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볼카에게 주입한 금기 주술마저 무용지물로 만들고, 오히려 경기장 시스템의 틈새를 파고들어 역습을 가했다.

이것은 단순한 요행이 아니었다.

에드릭이라는 존재 자체가,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도태 시스템'의 인과율을 위협하는 거대한 버그(Bug)였다.

"더 이상 내버려 둘 순 없겠지."

레오폴드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사내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의 가슴팍에는 칼리아스 사관학교의 비밀 구역, '시련의 탑'을 관리하는 자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레오폴드가 사내에게 눈짓을 보내며, 오직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미세한 마력 전음으로 밀어를 속삭였다.

"다음 정기 평가전의 무대를 '시련의 탑' 최하층으로 변경해라."

사내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곳은 단순한 평가전 장소가 아니었다.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돌아온 자가 없는, 아카데미가 숨겨둔 진짜 '소모품 폐기장'이었다.

"그곳의 규칙을 조금 손봐서…… 저 벌레가 그 안에서 영원히 썩어가도록 조치해라. 던전의 인과율 자체를 납치하는 거다."

"……명령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사내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스러지듯 사라졌다.

출구로 걸어 나가는 에드릭의 등 뒤로, 더 거대하고 음습한 죽음의 음모가 그물망처럼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대경기장 지하로 연결되는 어두운 석조 통로.

사방을 채우던 함성이 두꺼운 철문 너머로 멀어지자, 비로소 고요가 찾아왔다.

에드릭은 가만히 멈춰 서서 벽에 몸을 기댔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극심한 피로감과 함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타는 듯한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후우―.

그가 뜨거운 숨을 토해내자, 망막 위로 푸른빛의 시스템 창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

[결투 승리 정산] - 획득 전리품: 자카르 가문의 성물 권리 증명서 (에픽 등급) - 시스템 싱크로율: 42% (-8% 소모) - 마력 독성 수치: 12% (위험)

[연동 아티팩트 효과 발동] - '마 Bypass 도관'이 전신의 마력 독성을 강제 바이패스합니다. - 정화 속도: 초당 0.1% - 현재 마력 독성 수치: 12% → 4.5% (안정)

***

가슴뼈 아래에 심어둔 도관이 차가운 마동 전류를 뿜어내며 날뛰던 마력 독성을 빠르게 씻어내렸다.

터질 것처럼 욱신거리던 혈관들이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역시 쓸 만하군."

에드릭이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성장 스탯의 한계에 묶여 마력을 부릴 수는 없지만, 메커니즘을 비트는 권능의 대가를 이 정도로 억제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그가 주머니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자카르 가문의 권리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가공되지 않은 고대의 순수 마력이 깃든 성물.

황금 왕관회의 자금줄이자 무력의 원천 중 하나를 제 손으로 뜯어낸 셈이었다.

"거기서."

어둠이 짙게 깔린 통로 모퉁이에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스르릉―.

미세한 금속음과 함께, 은은한 백색 광채가 어둠을 갈랐다.

플로렌시아 세이라가 성검의 자루를 쥔 채 그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은 미세하게 가빠져 있었다.

방금 전 경기장에서 에드릭이 보여준, 상식을 초월한 기동 조율에 깊은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방금 그건 대체 무슨 술식이지?"

플로렌시아가 한 걸음 다가왔다.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볼카의 추적 마법식을 역류시킨 거지? 무슨 꼼수를 쓴 거냐, 에드릭."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쾌함과 의구심, 그리고 본능적인 경계심이 뒤섞여 있었다.

정공법과 압도적인 힘만을 신뢰하는 가문의 후계자에게 에드릭의 '디버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단(異端)의 영역이었다.

에드릭은 대답 대신 그녀가 쥐고 있는 성검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안구 속 디버깅 뷰어가 성검의 검날을 타고 흐르는 복잡한 마동 기하학 무늬를 실시간으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스르릉―.

[시스템: 특이 메커니즘 감지!] [대상: 플로렌시아 세이라의 성검 '알비온'] [상태 로그 분석 중…….] [경고: 성검 내부 마력 순환계에 인위적으로 심어진 역류 조작식(Mana Backflow Defect) 감지.] [출처: 황금 왕관회 고유 인가 코드.]

에드릭의 입꼬리가 보이지 않게 비틀려 올라갔다.

황금 왕관회 놈들이 아주 꼼꼼하게 덫을 쳐 놨군.

정의롭고 고결한 가문의 영애인 플로렌시아가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날 때를 대비해, 그녀의 성무기에 미리 파멸의 씨앗을 심어둔 것이다.

그녀는 제 무기가 서서히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꼼수라니."

에드릭이 증명서를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이해할 지능이 안 되면 그냥 꼼수로 치부하는 게 편하겠지."

"뭐라고?"

플로렌시아의 미간이 좁혀지며 성검의 광채가 한층 더 거칠게 흔들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검자루를 부러뜨릴 듯 꽉 움켜쥐었다.

"도태될 낙제생들을 방패막이 삼는 칼리아스의 방식이 역겨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놈처럼 비열한 우회책으로 승리를 훔치는 것 또한 용납할 수 없어."

"훔쳐?"

에드릭이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살아남는 법을 모르는 멍청한 것들이나 명예를 찾지. 네가 그 잘난 성검을 믿고 꺼드럭거리는 동안, 네 등 뒤에 칼을 꽂으려는 놈들이 누구인지나 똑똑히 봐 둬라."

"……그게 무슨 소리지?"

"머지않아 알게 될 거다. 네 가문이 믿는 그 고결한 힘이 어떻게 네 목을 조르게 되는지."

에드릭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플로렌시아는 그를 베지 못했다.

그의 눈빛에 담긴, 세상을 송두리째 꿰뚫어 보는 듯한 기괴한 확신이 그녀의 움직임을 강제로 묶어버린 탓이었다.

그녀가 제 손에 쥔 성검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사이, 에드릭은 통로 끝 출구로 향했다.

지이잉―!

그때, 에드릭의 품 안에 있던 아카데미 개인 단말기가 찢어지는 듯한 경보음과 함께 붉은빛을 토해냈다.

단 한 번도 울린 적 없는, 시스템 강제 개입 신호였다.

에드릭이 걸음을 멈추고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망막 위로 쏟아지는 붉은색 시스템 로그들이 통로의 어둠을 기괴하게 물들였다.

***

[! 시스템: 긴급 강제 프로토콜 발동] - 발신처: 아카데미 행정 중추 (레오폴드 크리스판 인가) - 수신자: 에드릭 (F등급 낙제생)

[상세 내용] - 귀하의 정기 평가전 구역이 강제로 재배정되었습니다. - 변경 전: 가상 미궁 '에레보스' - 변경 후: '시련의 탑' 최하층 - [심渊 (The Abyss)]

[경고] - 해당 구역은 현재 시스템 보안망이 해제된 '폐기 구역'입니다. - 진입과 동시에 실시간 생명력 붕괴 프로토콜이 가동됩니다. - 타임 어택 제한 시간: 1,800초 (30분) - 제한 시간 내 수호자를 처치하고 탈출하지 못할 경우, 사용자의 생체 신호를 강제 포기(사망) 처리합니다.

***

단말기 액정 너머로,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레오폴드의 음습한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평가전을 빌미로 한 합법적인 암살 시도.

그것도 스탯이 잠겨 마력을 쓸 수 없는 에드릭에게는 단 3분도 버티기 힘든 최악의 사지였다.

"결국 판을 통째로 엎어버리시겠다?"

에드릭이 단말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핏빛 굶주림에 가까운 미소였다.

'시련의 탑' 최하층.

원작 게임에서 아카데미 상층부조차 통제하지 못해 봉인해 버린, 고대의 규격 외 아티팩트들이 가득 묻혀 있는 노다지 구역.

레오폴드는 그를 죽이기 위해 그곳으로 몰아넣었겠지만, 고인물인 그에게는 그곳이 바로 지배자로 거듭나기 위한 최고의 사냥터였다.

에드릭이 단말기를 끄며 어둠 속으로 등을 돌렸다.

"기꺼이 들어가 주지. 그곳이 누구의 무덤이 될지는 가 보면 알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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