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구구구구구!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며 가상 미궁 에레보스의 천장이 갈라졌다.
붉은색 차원 균열 사이로 쏟아지는 마력의 잔해들.
붕괴 폭풍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60초였다.
그 절체절명의 타이밍에, 반대편 통로 너머에서 고압적인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쿵!
규격화된 중갑 군홧소리.
"보안 지표 이상 변동 감지! 침입자를 즉시 배제하라!"
레오폴드 크리스판이 보낸 학내 관리국의 경비 사령대였다.
그들은 미궁의 비정상적인 마력 수급 변화를 포착하고 지하 깊숙한 이곳까지 단숨에 들이닥친 참이었다.
타탕! 타타탕!
통로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들이 쥔 마도 소총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차가운 살기를 머금은 마력 탄환들이 에드릭의 발끝과 어깨너머 벽면을 아슬아슬하게 파고들었다.
부서진 석재 파편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화약 연기 너머로, 수십 명에 달하는 정예 병력의 철갑 투구가 희미하게 빛났다.
"하으으윽……!"
구석에 처박혀 있던 레이라가 머리를 감싸 쥐며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낡은 안경테가 공포로 덜덜 떨렸다.
탈출구는 차단되었고, 뒤편에서는 차원 붕괴의 폭풍이 한 걸음씩 다가오는 외통수.
하지만 에드릭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도망칠 생각을 하는 대신, 레이라의 발밑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고철 더미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레이라가 연구실 구획에서 폐기 처분하려 가져온, 녹슬고 찌그러진 퇴역 정찰 골렘들이었다.
"레이라."
에드릭이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저 고철들, 아직 작동은 되나?"
"네? 아, 아뇨! 그건 동력핵이 불안정해서 폐기 대기 중인 퇴역 모델이에요! 제어 장치도 먹통이라 아무짝에도……!"
"완벽하군."
에드릭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제어되지 않는 동력핵.
그것만큼 디버깅하기 좋은 장난감은 없다.
에드릭이 오른손을 뻗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극심한 이물감.
동시에 그의 시야가 반전되며, 낡은 고철 골렘들의 내부 설계도가 녹색의 메커니즘 로그로 환히 떠올랐다.
[고유 권능: '메커니즘 디버깅'을 활성화합니다.] [대상의 시스템 인과관계를 역추적합니다.]
----------------------------------------- [개체명: 퇴역 정찰 골렘 (D-급 고철)] - 마력 동력핵 안정도: 12% (심각한 마력 누출 상태) - 폭주 방지 밸브 임계치: 80% (안전 제어 중) - 대기 상태 해제 코드: 비활성화 -----------------------------------------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인터페이스 창을 보며, 에드릭은 주저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안전장치 제거. 폭주 방지 밸브의 임계치를 역으로 격상한다."
[디버깅 명령 입력.] [폭주 방지 임계치: 80% → -500% (강제 과부하 유도)] [경고: 인과율 왜곡으로 인한 싱크로율 소모가 발생합니다!] [경고: 마력 독성 과부하가 세포 단위로 유입됩니다!]
끄으으윽!
뼛속까지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이 척추를 타고 뇌리를 때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입안에서 비린 핏물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에드릭의 가슴팍에 장착된 에픽 아티팩트 '마 Bypass 도관'이 은은한 청색광을 뿜어냈다.
윙-!
[마 Bypass 도관이 마력 독성을 급격히 정화합니다.] [마력 독성 수치: 18% → 4%] [싱크로율 회복 속도가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전신을 짓누르던 통증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호흡이 한결 가벼워진 에드릭의 시선 끝에서, 바닥에 뒹굴던 수십 마리의 고철 골렘들이 기괴한 금속음을 내며 들끓기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 끼이익!
그들의 흉부 깊숙한 곳에서 정교한 마력 회로들이 서로 꼬이고 엇갈리며 붉은 스파크를 튀겼다.
동력핵의 마력 흐름이 우회되고, 강제로 누적된 과부하 에너지가 임계점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그 수치는……! 골렘의 동력핵이 연쇄적으로 녹아내리고 있어요!"
마도 기술자인 레이라가 경악 어린 눈으로 에드릭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에드릭은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의 법칙 자체를 비웃으며, 철저히 금기시된 시스템의 '오류'를 강제로 끄집어내는 괴물이었다.
"엎드려."
에드릭이 레이라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바닥으로 거칠게 끌어내렸다.
동시에, 저편 통로에서 방패를 앞세우며 진입하던 경비 사령대가 이상을 눈치챘다.
"멈춰라! 전방에 고에너지 반응 감지! 마법 방벽을……!"
늦었다.
퍼엉! 퍼어어어엉!
수십 마리의 정예 정찰 골렘들이 하나의 거대한 폭탄이 되어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단순한 화약 폭발이 아니었다.
디버깅으로 극대화된 마동 섬광이 백색의 눈부신 폭풍이 되어 지하 통로 전체를 쓸어버렸다.
콰아아앙!
"으아아아악!"
"방벽이 파쇄된다! 마력 감쇠 장치가 버티질 못해!"
경비 사령대의 비명 횡사가 섬광 속에 묻혔다.
그들이 자랑하던 중갑과 마법 방벽은, 골렘들의 자폭에서 뿜어져 나온 차원이 다른 고밀도 마동 에너지 앞에 맥없이 바스러졌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철갑 조각들과 마도 소총의 파편들.
거기에 미궁의 차원 붕괴 폭풍까지 뒤엉키며, 지하 통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했다.
하지만 에드릭은 그 폭풍의 중심에서조차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허공에 대고 다시 한번 손가락을 휘둘렀다.
학내 관리국의 통제 시스템.
그들의 눈과 귀가 되는 마도 모니터의 데이터 전송 주파수를 가로채야 했다.
[메커니즘 디버깅 대상: 관리국 탐지 네트워크 센서] - 감지 영역 내 생체 신호 데이터: '인간 2명 감지' - 디버깅 실행: 생체 신호 감지 기준을 '미궁 붕괴 잔해물'로 오인 처리하도록 데이터 변조.
파지직!
[데이터 변조 완료.] [관리국 관측 모니터 상의 해당 영역 상태: '생체 신호 전무(0)']
"완벽하군."
에드릭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제 관리국의 모니터에는 이 구역의 모든 생명체가 미궁의 붕괴 폭풍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소멸한 것으로 표시될 터였다.
완벽한 알리바이이자 은폐였다.
연기 자욱한 통로를 걸어가던 에드릭은, 바닥에서 붉은빛을 내뿜는 마도 소총의 잔해와 관리국 대장이 떨어뜨린 고급 마도 주머니를 발견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주워 품에 넣었다.
위기 속에서도 실리를 챙기는 고인물의 본능이었다.
"이, 이게 무슨……."
레이라가 덜덜 떨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섰다.
그녀의 앞에는 잿더미가 된 경비 사령대의 흔적과, 미궁의 붕괴 폭풍을 비웃듯 멀쩡히 서 있는 에드릭이 있었다.
에드릭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레이라를 응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인간적 동정심도,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를 구한 것은 선의가 아니었다.
오직 쓸모가 있는 '장치'로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라 윈필드."
에드릭의 목소리가 지극히 사무적으로 울렸다.
"너는 아카데미에서 폐기 처분당할 처지라고 했지. 오토마타 연구를 완성하기도 전에 쫓겨나거나, 방패막이 소모품으로 던전에 던져질 운명."
"극, 그건……."
레이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약점은 명확했다.
재능은 있으나 스탯이 낮고, 가문 배경이 없어 황금 왕관회 같은 기득권 세력의 사냥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내가 네 장치들을 리모델링해 주지. 방금 본 것처럼, 한계 수치를 아득히 초월한 규격 외의 물건으로."
에드릭이 레이라의 턱을 가볍게 치켜올렸다.
그녀의 떨리는 시선이 에드릭의 확신에 찬 눈빛과 마주했다.
"그 대가로, 네가 만들 생산용 골렘 기지의 마동 제어 권한을 내가 공유한다. 내 우회 도관으로 쓰기 위해서."
"골렘 기지의 마력을…… 우회 도관으로요? 그건 제어핵이 버티지 못하고 터질 거예요!"
"내가 터지지 않게 조율한다. 너는 그저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돼. 어때, 썩어 빠진 아카데미의 소모품으로 죽을 텐가, 아니면 나와 손을 잡고 네 오토마타의 정점을 볼 텐가?"
지극히 불합리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제안.
레이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에드릭이 보여준 '디버깅'의 권능은, 마도 공학의 상식을 완전히 파괴하는 신의 영역에 가까웠다.
기술자로서의 광적인 호기심과 생존에 대한 갈망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좋아요. 계약할게요. 대신, 제 연구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세요."
"약속하지."
에드릭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감정적 연대 따위는 필요 없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한, 이 계약은 그 어떤 동료애보다 단단한 밧줄이 될 터였다.
[조력자 '레이라 윈필드'와의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골렘 마동 네트워크 우회로 확보 성공.] [마력 독성 정화 효율이 영구적으로 5% 상승합니다.]
* * *
그날 저녁.
가상 미궁 에레보스의 붕괴 사고는 아카데미 상층부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관리국은 침입자들이 미궁과 함께 소멸했다고 결론지었으나, 황금 왕관회의 총수 레오폴드 크리스판의 의구심까지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작 아카데미 학생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어스름한 어둠이 깔린 아카데미 중앙 광장.
수백 명의 학생이 웅성거리며 거대한 대리석 판 앞에 모여들었다.
그곳은 아카데미의 공적인 명성과 서열을 다투는 '명성 결투 서판'이 위치한 곳이었다.
스스스스스……!
서판의 차가운 돌 표면 위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붉은 마력의 핏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결투 신청이 아니었다.
패배자의 모든 명성과 스탯 보유권을 승리자에게 양도하겠다는 극단적인 서약.
[피의 즉결 도살 계약 (Blood Duel Contract)]
서판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서명인은 단 한 명이었다.
- 볼카 자카르 (Volka Jakar)
붉은 마력 흔적이 허공으로 뻗어 나가며, 광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귓가에 핏빛 선언문이 환청처럼 낭독되었다.
"낙제생 에드릭. 네놈이 숨긴 기만과 유물을 내 대검으로 직접 뜯어내 주마. 사흘 뒤 결투의 장에서, 네놈의 뼈와 살을 분리해 주지."
광장이 발칵 뒤집혔다.
황금 왕관회 소속의 광전사이자 학내 서열 상위권인 볼카 자카르가, 마력 불능의 쓰레기라 불리던 에드릭에게 공식적인 사설 혈투를 선포한 것이다.
그 시각, 광장 모퉁이 그늘막 아래 서 있던 에드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귓가에 시스템의 기계음이 차갑게 울렸다.
[경고: 적대 대상 '볼카 자카르'가 상시 가동 중인 '마법 마력 흔적 추적(Mana Flow Tracking)'의 수신 감도가 당신의 위치를 지향하기 시작합니다.]
에드릭의 입꼬리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기어이 제 무덤을 파는군."
사냥감이 스스로 미끼를 물러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