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뒤.
칼리아스 사관학교의 중앙 광장은 이른 아침부터 짓눌린 듯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낙제생 에드릭의 목에 천문학적인 현상금이 걸렸다는 소문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손목이 부러진 채 퇴장했던 황금 왕관회의 광전사, 볼카 자카르가 발안한 피의 서약.
'학급 교시 살인 청부 계약.'
공식 평가전이라는 합법적인 무대 위에서 에드릭을 찢어발기겠다는 광기 어린 선언에 아카데미 전체가 숨을 죽였다.
지나가는 생도들의 시선에는 동정과 조소,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열망이 기괴하게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무수한 시선들의 중심에 선 에드릭의 표정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어이, 쓰레기. 오늘이 네 제삿날인 건 알고 기어 나왔냐?"
대기실 입구에서 황금 왕관회 소속의 상급 생도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비아냥거렸다.
에드릭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어깨를 스쳐 지나가며, 시선은 허공에 띄워진 파란색 시스템 로그의 수치만을 쫓을 뿐이었다.
[싱크로율: 94%] [마력 독성 수치: 3.1%] [마 bypass 도관 작동 중 - 안정 상태]
도관 덕분에 몸을 짓누르던 타는 듯한 통증은 거의 사라졌다.
지금 에드릭에게 볼카의 살인 청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진짜 목표는 따로 있었으니까.
"정기 평가 의식, 가상 유적 미궁 '에레보스'의 문을 개방합니다. 생도들은 차례대로 진입하십시오."
웅장한 마도 도선들이 바닥을 타고 흐르며 거대한 석문이 거칠게 열렸다.
시퍼런 마력 장막이 일렁이는 미궁의 입구.
에드릭은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장막을 통과하는 순간,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틀리며 차가운 대리석 벽과 기괴하게 얽힌 고대 도선들로 가득 찬 가상 미궁으로 전환되었다.
스스스스.
벽면 곳곳에 박힌 붉은 보석들이 안구처럼 회전하며 에드릭을 조준했다.
아카데미 통제실과 황금 왕관회가 실시간으로 생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관측의 눈'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거대한 미궁.
평범한 생도들이라면 길을 찾기 위해 마력을 방출하거나 지도 마법을 펼치며 헤맸을 터였다.
하지만 에드릭은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서 벽면의 특정 이음새로 손을 뻗었다.
'여기군.'
에드릭의 눈동자가 기괴한 보랏빛으로 안착했다.
[메커니즘 디버깅] 권능이 안구의 망막 위에 미궁의 내부 데이터 흐름을 실시간으로 펼쳐 보였다.
================================== [구역 식별자: 가상 유적 미궁 에레보스 - 세그먼트 4] [액티브 보안 프로토콜: 감시 지표 88% 가동 중] [숨겨진 인덱스 세션 감지: ID: ARCH-709 (임시 대기 상태)] ==================================
1일 차 밤, 폐기 던전의 낡은 단말기 깊숙한 곳에서 발견해 임시 인덱스 세션에 가등록해 두었던 고대 유물의 코드였다.
당시 에드릭은 아카데미의 메인 프레임이 감지하지 못하도록 이 코드를 미등록 세션에 숨겨 두었다.
오늘, 이 정기 평가 의식이라는 공식적인 무대야말로 그 숨겨둔 패를 꺼내기에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에드릭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손끝에서 미세한 마력 불꽃 대신, 투명한 인과율의 스파크가 튀었다.
"인덱스 세션 ARCH-709. 임시 대기 상태 해제. 로컬 메모리 주소 0x00FF90으로 강제 매핑."
스윽.
에드릭이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아무런 마력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
그저 미궁 벽면에 흐르던 푸른 마력 도선들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지며, 인과관계의 로그가 강제로 재작성되기 시작했을 뿐이다.
삐-!
[경고: 허가되지 않은 세션 호출 시도 감지.] [통제실 차단 프로토콜 순위 1단계 가동.]
"그럴 줄 알았지."
에드릭이 냉소했다.
아카데미의 중앙 통제실 시스템은 멍청하지 않다.
비정상적인 데이터의 유입이 감지되자마자 즉각 차단벽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에드릭은 이미 그 차단벽의 '논리적 허점'을 꿰뚫고 있었다.
"차단 프로토콜 입력 신호의 패리티 비트를 반전한다. 에러 검출 코드를 정상 응답(ACK)으로 오인식 유도."
탁, 탁.
손가락이 허공의 가상 키보드를 두드리듯 정밀하게 움직였다.
세상의 법칙을 해킹하는 극도로 정교한 컨트롤.
싱크로율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며 관자놀이가 찌릿하게 아파왔지만, 에드릭의 손끝은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스으으읍!
순간, 미궁 벽면의 붉은 보석들이 일제히 빛을 잃고 회색으로 죽어 버렸다.
================================== [디버깅 성공: 패리티 오류 유도 완료] [통제실 차단 프로토콜 상태: 강제 비활성화(BYPASS)] [고대 장막 권한 코드(ARCH-709) 일괄 인가 성공] ==================================
철컥!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에드릭 바로 앞의 대리석 바닥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수백 년 동안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았던 고대의 미등록 유물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그것은 기괴할 정도로 정교하게 맞물린 톱니바퀴들로 이루어진, 황금빛의 작은 구체였다.
[고대 전유 유물: 크로노스의 톱니바퀴 (ID: ARCH-709)] - 분류: 제어계 고대 아티팩트 (에픽 등급) - 효과: 착용 시 주변 공간의 마력 흐름 정밀 제어, 간섭 및 왜곡 권능 부여.
"이게 바로 진짜 보상이지."
에드릭이 입꼬리를 올리며 황금 구체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미궁 전체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
[시스템 비상사태 방출!] [유물의 강제 이동 감지!] [보안 시스템: 강제 탈출 오류 정합 루프(Feedback Loop) 발포!]
데이터 관리 체계가 유물의 무단 탈출을 인지하고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궁의 벽면들이 기괴하게 변형되며 사방에서 수십 개의 날카로운 마력 가시들이 에드릭을 향해 조준되었다.
한 번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걸레짝이 될 정도의 압도적인 마력 밀도.
통제실의 감시 장치들이 이 이례적인 폭주를 감지하고 카메라를 이쪽으로 돌리려는 찰나였다.
"어딜 보려고."
에드릭은 당황하지 않고 황금 구체를 움켜잡았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빌어먹을 볼카 놈이 상시 가동하고 있다던 '마법 마력 흔적 추적(Mana Flow Tracking)'의 주파수 데이터가 번뜩였다.
사흘 전 볼카의 대검을 해킹할 때 백업해 두었던 주파수였다.
"추적식 주파수 공유. 미궁의 피격 대상을 내가 아닌 볼카 자카르의 좌표로 강제 정합 유도."
쉭!
에드릭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투명한 인과율의 실타래가 미궁의 폭주 루프와 연결되었다.
동시에 미궁의 보안 시스템은 유물을 훔친 침입자의 위치를 에드릭이 아닌, 저 멀리 다른 구역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을 볼카 자카르로 오인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끄아아악?!"
미궁 저편에서 볼카의 비명 소리가 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자신이 왜 미궁의 방어 체계에 정밀 타격을 당하는지도 모른 채, 벼락같은 마력 가시 폭격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을 터였다.
그 틈을 타 에드릭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탈출 경로의 잔여 충돌 피격점들을 디버깅 권능으로 하나씩 지워 나갔다.
[피격 판정 범위 우회 성공.] [충돌 대미지 100% 무효화.]
가장 정교하고 완벽한 버그 플레이.
에드릭은 단 한 방울의 마력도 소모하지 않은 채, 쏟아지는 마력 가시들을 유유히 걸어서 통과했다.
감시 장치들은 여전히 먹통이었고, 통제실에서는 그저 단순한 '시스템 일시 오작동'으로 인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경이로운 광경을, 미궁의 어두운 구석 숨겨진 틈새에서 지켜보고 있던 단 한 사람이 있었다.
"……말도 안 돼."
작은 체구에 헐렁한 연구원 가운을 걸친 소녀.
오토마타 제작의 천재이자, 아카데미의 외톨이인 레이라 윈필드였다.
그녀는 원래 이번 평가전에서 자신의 마도 인형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은밀히 구석에 숨어 미궁의 마력 흐름을 관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마도 장치에 기록된 데이터는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다.
"마력 반응이…… 전혀 없어. 그런데 어떻게 고대 미궁의 제어 코드를 통째로 덮어씌운 거지? 저건 단순한 마법이 아니야. 시스템 자체의 인과를…… 설마 해킹한 건가?"
레이라의 둥근 안경 너머로 드러난 눈동자가 광기 어린 호기심으로 잘게 떨렸다.
쓰레기 낙제생이라 불리던 에드릭.
가문도 없고, 마력도 없는 낙인찍힌 고아.
그가 방금 보여준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대마도사도 해내지 못한, 완벽한 '법칙의 지배'였다.
"에드릭…… 대체 정체가 뭐야?"
레이라가 마른침을 삼키며 손에 쥔 마도 기록 장치를 꽉 쥐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억눌려 있던 제작자로서의 집착과 호기심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지만, 에드릭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 역시 이 미궁을 공략하고 아카데미를 장악하기 위해 배치된 유용한 '장치' 중 하나일 뿐이니까.
에드릭은 손바닥 위의 황금 구체, '크로노스의 톱니바퀴'를 가볍게 쥐었다.
[고대 전유 유물의 잠재력 개방을 시작합니다.] [개방 진행률: 1%... 5%...]
황금빛 정수가 에드릭의 전신으로 흘러들며, 그의 마 bypass 도관이 기분 좋은 진동을 일으켰다.
완벽한 정산의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미궁의 입구 쪽에서 묵직한 철갑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순한 생도들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이어서 들려오는 차갑고 고압적인 목소리.
"이 구역의 마력 흐름에 이상 수급 변동이 감지되었다. 전원 동작을 멈춰라."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자들은 붉은색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었다.
아카데미의 절대적인 지배자이자 황금 왕관회의 총수, 레오폴드가 부리는 '감찰국 정예 경비대'였다.
그들의 손에는 살기가 흐르는 마동 병기들이 쥐어져 있었고, 그들의 시선은 정확히 에드릭이 서 있는 통로를 향해 고정되었다.
"인가되지 않은 유물 반응이 감지되었다. 낙제생 에드릭,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저항할 시 즉결 처분한다."
붉은 제복의 사내들이 에드릭을 둘러싸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미궁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사내들의 손에 들린 마동 창끝에서 시퍼런 마력 불꽃이 일렁였다.
칼리아스 사관학교의 정예 감찰관들.
황금 왕관회의 수장 레오폴드의 손발이 되어, 규칙을 어긴 낙제생들을 소리 소문 없이 청소하는 사냥개들이었다.
"3초 주겠다. 유물을 넘기고 투항해라."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낙제생 하나쯤 여기서 숨통을 끊어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 있었다.
하지만 에드릭은 황금빛 구체를 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을 뿐이다.
그의 시선은 감찰관들의 머리 위에 떠오른 붉은색 시스템 로그에 꽂혀 있었다.
| 항목 | 정보 | | :--- | :--- | | 아티팩트 명 | 크로노스의 톱니바퀴 (ARCH-709) | | 동조 상태 | 강제 결합 진행 중 (12%) | | 소모 시간 | 완전 각성까지 180초 소요 |
180초.
저 사냥개들의 목을 비틀거나, 혹은 발을 묶어두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1초."
감찰관의 손가락이 방전 트리거를 당기려 했다.
에드릭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경고: 고위 마력 억제 네트워크 '체인 브레이크' 가동 예정.] [피격 시: 모든 마력 도선 차단 및 전신 마비.]
"마력이 없는 나한테 마력 억제망이라."
에드릭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범재들의 표준 전술이다.
상대가 마력을 쓰지 못하는 낙제생이라 해도, 자신들의 교과서적인 프로토콜을 그대로 고수하는 나태함.
에드릭에게는 그 나태함이야말로 가장 비집고 들어가기 좋은 버그 포트였다.
"디버깅 시퀀스 가동."
두통이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마 bypass 도관이 빠르게 마력 독성을 걸러내고 있었지만, 고위 시스템을 직접 건드리는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싱크로율: 94% → 89%] [마력 독성 수치: 3.1% → 5.7%]
에드릭의 시야가 붉게 물들며, 감찰관들이 전개하는 결계의 논리 구조가 투명하게 분해되어 나타났다.
================================== [마력 억제 결계 '체인 브레이크' 구조 분석] - 타깃 필터링 조건: 영역 내 '마력 반응을 가진 모든 유기체' - 예외 처리 대상: 감찰관 제복에 내장된 '인증 마도 소자' ==================================
"간단하군."
에드릭이 숨을 낮게 내쉬었다.
"필터링 조건을 반전한다. 예외 처리 대상을 타깃으로, 타깃 필터링 대상을 예외로 변경."
인과율의 스파크가 허공을 갈랐다.
그 정교한 핑거 스냅 한 번에, 결계의 작동 메커니즘이 완전히 뒤집혔다.
지이이이잉!
"……?! 머, 몸이……!"
방전 트리거를 당기려던 감찰관 대장의 전신이 기괴하게 굳어졌다.
그들의 제복에서 뿜어져 나와 에드릭을 옭아매어야 할 푸른색 마력 사슬들이, 역류하며 감찰관들의 목과 사지를 사정없이 휘감았다.
철커덕! 철컥!
"으아아악! 마력 제어가 안 된다! 결계가 역류하고 있어!"
"바, 바이패스 프로토콜이 먹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펼친 고위 결계에 스스로 묶여 비명을 지르는 사냥개들.
그들은 전신을 강타하는 고압 마력 전류에 부르르 떨며 바닥으로 처참하게 고꾸라졌다.
단 한 번의 마법도 쓰지 않은, 완벽한 자멸 유도.
에드릭은 단지 그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 지나갔다.
바닥에서 피를 토하며 신음하는 감찰관 대장의 머리를 가볍게 짓밟으며.
"레오폴드에게 전해라."
에드릭이 낮게 읊조렸다.
"사냥개를 보낼 거면, 최소한 쓸모 있는 놈들로 고르라고."
그때, 에드릭의 주머니 속에서 황금빛 구체가 맥박치듯 강하게 요동쳤다.
두근!
[크로노스의 톱니바퀴 동조율 100% 도달.] [고대 전유 유물의 잠재력이 완전히 개방됩니다!] [시스템 권한 등급 상승: '임시 관측자' → '미궁 편집자']
쿠구구구구!
동시에 미궁 에레보스의 심장부가 기괴한 기계음을 내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지형 변화가 아니었다.
가상 유적의 데이터 전체가 에드릭의 지배 하에 놓이려는 순간.
[위잉- 위잉- 위잉-]
미궁의 하늘 한가운데에 거대한 붉은색 균열이 찢어졌다.
[경고! 시스템의 비정상적 권한 탈취를 감지한 중앙 제어핵이 '강제 초기화 프로토콜'을 가동합니다!] [재난 등급 재기동: 가상 미궁 내부의 모든 생명체를 소멸시키는 '차원 붕괴 폭풍'이 발생합니다!] [잔여 시간: 60초]
"……미친."
저 멀리 숨어 있던 레이라가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미궁 전체가 붕괴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대재앙의 폭풍이 눈앞까지 몰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