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매 안에 숨긴 거, 얌전히 내놓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러면 여기서 네 목을 장작더미로 만들어 줄 테니까."
목줄기를 바짝 파고드는 불길한 열기.
살을 태울 듯 이글거리는 대검의 불꽃이 에드릭의 턱밑에서 일렁였다.
볼카 자카르.
5성급 마력 적성을 타고난 아카데미의 촉망받는 광전사.
그의 뒤편으로 황금 왕관회의 정예 수하들이 오만한 조소를 띠며 에드릭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마치 막다른 길에 몰린 쥐새끼를 구경하는 듯한 눈빛들이었다.
"귀머거리냐? 묻잖아, 쓰레기 새끼야."
볼카의 목소리에 깃든 살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보통의 낙제생이라면 이 기세에 눌려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했을 터였다.
하지만 에드릭의 심장은 기묘할 정도로 차분하게 뛰고 있었다.
'마 Bypass 도관'의 장착 효과는 확실했다. 전신을 짓누르던 마력 독성의 통증이 사라지니, 주변의 모든 메커니즘이 한층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에드릭은 겁에 질린 척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볼카의 불타는 대검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너머로, 붉게 타오르는 대검의 마력 흐름이 한 줄기 코드선이 되어 분해되기 시작했다.
[대상 무장: 플레임 싱글러 (Flame Singler)] [분류: 3등급 마동 대검] [마력 전송 주파수: 412Hz] [안전 제어 장치 작동 중 - 열 방출 지향성: 전방 90도]
고인물 유저 영민으로서, 에드릭은 이 무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마력이 부족한 사용자도 화염을 다룰 수 있게 설계된 보급형 마동 병기.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손잡이 쪽으로는 열이 전달되지 않도록 제어 장치가 걸려 있는 물건이다.
"뭘 꼬라봐?"
볼카가 이빨을 드러내며 대검을 한 치 더 밀어붙였다.
치이익-!
에드릭의 셔츠 깃이 타들어 가며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 에드릭이 조용히 손을 올렸다.
무기를 뽑으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앙상하고 무력한 손가락 끝을 볼카의 대검 날 바로 아래, 자루와 맞닿은 '마력 전송부'에 슬쩍 얹었을 뿐이었다.
"미쳤나, 이 새끼가?"
볼카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마력 한 톨 없는 낙제생의 손가락 따위, 대검에 흐르는 화염 마력만으로도 숯더미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드릭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디버깅 시작.'
서늘한 명령과 함께, 에드릭의 뇌리에 시스템 로그가 휘몰아쳤다.
================================== [시스템 로그 개입 - 메커니즘 디버깅 발동] - 대상: '플레임 싱글러' 안전 제어 인자 - 감지된 매개변수: [Heat_Dissipation_Limit = 0.85] - 강제 디버깅 실행: 매개변수 값 변조 [0.85 -> 0.00] - 동기화 오버로드 발생: 싱크로율 1.5% 소모 ==================================
찰나의 순간, 대검의 마력 경로가 완전히 꼬여버렸다.
무기의 안정을 유지하던 방열 지향 메커니즘의 제어 인자가 '0'으로 초기화되는 버그가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는 즉각적이고도 파괴적이었다.
화염의 방열 지향성이 전방이 아닌, 칼자루를 단단히 쥐고 있던 볼카의 손아귀로 직행했다.
콰르릉!
"……윽?!"
볼카의 눈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대검의 손잡이가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그가 움켜쥔 손바닥 가죽을 사정없이 태우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아아아아악?!"
짐승 같은 비명이 석조 복도를 찢어발겼다.
화염의 열기는 손바닥 가죽을 순식간에 녹여버리고, 근육을 지나 손목뼈의 심부까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볼카는 본능적으로 대검을 놓치려 했으나, 이미 녹아내린 손바닥 가죽이 칼자루의 금속과 끔찍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볼카 님?!"
"이, 이게 무슨……?!"
뒤에 서 있던 수하 기사들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콰창-!
볼카가 미친 듯이 손을 흔든 끝에야 겨우 대검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의 오른손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커멓게 숯처럼 변해 있었다.
살이 타는 구역질 나는 냄새가 복도 전체에 진동했다.
"커, 헉…… 끄아아악! 내 손! 내 손이!"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는 5성급 엘리트 광전사.
그 비참한 꼴을 내려다보는 에드릭의 눈빛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그저 차갑게 식어가는 볼카의 대검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화염이 꺼져가는 대검의 잔해 속에서, 붉은색 마력 주파수가 미세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찾았다.'
그 주파수는 볼카가 상시 가동하는 전투 보조 마법식, '마법 마력 흔적 추적(Mana Flow Tracking)'의 실시간 전송 주파수였다.
에드릭은 디버깅 권능의 잔상을 이용해 그 고유 소스 변수들을 자신의 뇌리 속 메모리에 정밀하게 각인했다.
================================== [디버깅 메모리 저장 완료] - 식별 코드: [MFT-Track-VK99] - 주파수 대역: 144.2MHz (실시간 동기화 상태) ==================================
나중에 이 광전사 놈이 다시 이빨을 드러낼 때, 이 추적식을 역이용해 뇌수를 터뜨려 버릴 좋은 무기가 확보되었다.
"에드릭! 너, 정말 제정신이야?!"
그때, 소란을 듣고 던전 입구에서 뒤늦게 달려온 플로렌시아 세이라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처참하게 타버린 볼카의 손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급히 손을 뻗어 백색의 치유 마력을 불어넣으며, 그녀는 에드릭을 쏘아보았다.
"동급생을 상대로 이런 잔인한 짓을 하다니! 아무리 볼카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해도 도가 지나치잖아! 게다가 황금 왕관회를 적으로 돌려서 네가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진심으로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한, 동시에 그의 초상식적인 대처에 공포를 느끼는 눈빛.
하지만 에드릭은 그녀의 외침을 들으며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동료? 적?'
가소롭군.
이 세계의 인간들은 그저 게임 속의 움직이는 오브젝트이자,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배치된 일회성 장치들에 불과하다.
감정적 연대 따위는 생존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사치일 뿐이다.
"시끄럽군."
에드릭이 차갑게 내뱉었다.
"상대가 칼을 겨누었으면, 목이 날아갈 각오 정도는 해야 하는 법이지."
"에드릭……!"
"걸치적거리니까 비켜라. 내 갈 길을 방해하는 지형물은 전부 부숴버릴 뿐이니까."
플로렌시아가 멍하니 입을 벌린 사이, 에드릭은 그녀를 스쳐 지나 어두운 복도 너머로 걸어갔다.
단 한 번의 뒤돌아봄도 없는, 완벽한 단절이었다.
"끄, 으으으……!"
치유 마력을 받으며 겨우 진정해 가던 볼카가, 멀어져 가는 에드릭의 등을 향해 핏발 선 눈을 부릅떴다.
타버린 손가락 뼈마디가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것은 패배감이 아니었다.
자신 같은 천재가, 쓰레기라 불리던 비마력자 낙제생에게 이토록 처참하게 유린당했다는 굴욕과 광기 어린 살의였다.
볼카는 떨리는 왼손으로 수하 기사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준비해라."
"예, 예? 볼카 님?"
"학급 교시 살인 청부 계약…… '그것'을 발안한다. 다음 주에 있을 아카데미 랭킹전의 전초전…… '정기 평가 의식'에서 저 새끼의 사지를 합법적으로 찢어발겨 죽여버리겠다."
볼카의 목구멍에서 피 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살의가 아카데미의 어두운 천장을 가득 메웠지만, 어둠 속으로 사라진 에드릭의 발걸음은 그저 묵직하고 거침없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