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끝났군."
"가자, 정산하러 가야지."
무기를 거두며 안도하는 낙제생들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볼카 역시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대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모두가 승리와 안전을 확신하고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그 순간.
에드릭의 눈앞에 펼쳐진 디버깅 시야가 격렬하게 붉은빛으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이이!
고막을 찢을 듯한 경고음이 뇌리를 때렸다.
[경고: 시스템 로그 위조 감지.] [가짜 통보(Fake Notification) 기믹 작동 중.] [사망한 개체 '갈고일(Grade 2)'의 생명력 정합성 불일치.]
에드릭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갈고일의 시체로 향했다.
갈고일의 쩍 갈라진 석질 피부 틈새로 검은 마력이 실타래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면에 흥건한 핏물과 융합하며, 그것들은 거대하고 기괴한 마법진을 그리며 요동쳤다.
단순한 시체가 아니었다.
방심한 사냥꾼들을 일격에 몰살하기 위한 덫.
[이벤트 ID: 9901 - 진(眞) 보스 '고르곤 유충' 강림 프로세스 개시] [도살 로그 시각화율: 98%…… 99%……]
에드릭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이래야 칼리아스의 던전답지."
쿠구구구궁-!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바닥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출구로 향하던 낙제생들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어, 어라? 진동이 왜 이래?"
"클리어된 거 아니었어?!"
그들의 의문은 비명으로 바뀌기까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콰아아앙!
갈고일의 시체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그 밑바닥에서 거대한 세그먼트 형태의 마수 구체가 솟구쳤다.
수십 개의 징그러운 마디로 이루어진 몸체.
강산을 머금은 녹색 독액이 주둥이 사이로 질질 흘러내렸다.
"고, 고르곤 유충?! 3급 마수가 왜 여기서 나와?!"
"안전 구역이라며! 시스템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낙제생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무기를 완전히 내려놓았던 탓에 방어 태세를 갖출 시간조차 없었다.
혼비백산한 이들이 꼴사납게 바닥을 기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볼카의 따르개들 역시 안색이 하얗게 질려 대검을 허둥지둥 뽑아 들었다.
"미친, 가짜 클리어 기믹이라고?!"
"볼카 님! 퇴로가 막혔습니다!"
사방에서 솟구친 암석 장벽이 던전의 출구를 완벽히 봉쇄하고 있었다.
고르곤 유충의 거대한 겹눈이 살아남은 생명체들을 향해 기괴하게 번뜩였다.
그 압도적인 위압감 앞에 낙제생들은 오줌을 지릴 기세로 주저앉았다.
그 아수라장의 한가운데에서, 에드릭만이 홀로 고요했다.
그의 눈앞에는 오직 푸르고 붉은 시스템 로그의 흐름만이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디버깅 제한 시간: 03:00] [남은 싱크로율: 82%] [마력 독성 수치: 18%]
"3분이라."
에드릭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었다.
전신을 찌르는 마력 독성의 고통이 세포 단위로 몰아쳤지만, 에드릭은 소리 내어 앓는 대신 턱끝으로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훔쳐냈다.
고인물에게 이 정도 디버프는 일상적인 패널티에 불과했다.
스륵.
에드릭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야, 에드릭! 미쳤어?! 도망쳐!"
한 낙제생이 비명을 질렀지만, 에드릭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고르곤 유충이 거대한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그의 주둥이 안쪽에서 에메랄드빛 독액이 끓어오르며 엄청난 열기를 뿜어냈다.
대기를 녹여버릴 듯한 산성 독포.
그것이 에드릭을 조준하는 순간, 에드릭의 디버깅 시야에 독액의 발사 궤적이 붉은 선으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로그 식별: Vector_Acid_Spit (Target: Player_Edric)] [투사체 속도: 45m/s] [예상 피해: 즉사]
"타겟팅이 고정되었군."
에드릭이 차갑게 웃었다.
그가 바란 바였다.
만약 마력이 흘러넘치는 천재들이라면 화려한 회피기나 방어 마법으로 이를 막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스탯 한계가 묶여 마력조차 없는 에드릭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
세상의 인과율을 비틀어버리는 버그적 개입.
그것이 그의 힘이었다.
에드릭이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푸른빛의 디버깅 노드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뻗어 나갔다.
[메커니즘 디버깅(Mechanism Debugging) 가동.] [대상 로그: Vector_Acid_Spit] [인과율 강제 조율 시도 중……]
위이잉!
머릿속이 깨질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마력 독성 수치가 실시간으로 상승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에드릭은 이빨을 악물며 로그의 좌표값을 강제로 수정했다.
[조율 완료: Target -> Self (Monster_Gorgon_Larva)] [각도 보정: 180도 반전]
캬아아아악!
고르곤 유충이 굉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녹색 독액을 뿜어냈다.
사방의 바위마저 녹여버릴 듯한 기세로 쏘아진 독액.
낙제생들이 절망 어린 눈으로 눈을 감았던 그 찰나.
치이이이익-!
기이한 공간의 뒤틀림이 일어났다.
에드릭의 바로 코앞에서, 보이지 않는 거울에 부딪힌 것처럼 독액의 궤적이 완전히 꺾였다.
꺾인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물리 법칙을 비웃듯, 180도 회전하여 유충의 거대한 목구멍과 얼굴을 향해 그대로 역류했다.
콰르릉!
"크샤아아아악?!"
고르곤 유충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내뿜은 치명적인 독액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뒤집어쓴 것이다.
아무리 독 속성의 마수라 할지라도, 제 내부 장기를 녹여버릴 정도의 고농도 산성 독액을 맨몸으로 버텨낼 수는 없었다.
치이익!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황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유충의 단단한 외피가 스스로의 독액에 허무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녹색 액체와 붉은 피가 뒤섞여 바닥을 적셨다.
쿵! 쿵!
거대한 몸체가 발작하듯 바닥을 뒹굴며 던전 벽면을 들이받았다.
하지만 이미 내부 장기까지 완전히 녹아내린 괴수에게 남은 생명력은 없었다.
[알림: 대상의 생명력이 0%에 도달했습니다.] [진(眞) 보스 '고르곤 유충' 처치 완료.]
괴수의 거대한 시체가 무너지며 사방으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고요함이 던전을 지배했다.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낙제생들도, 대검을 쥐고 벌벌 떨던 볼카의 수하들도 모두 얼어붙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본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마력 불능의 쓰레기, 에드릭.
그가 제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손짓 한 번으로 3급 마수를 자멸시켰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방금 마법을 쓴 건가? 에드릭이?"
"아니야, 마력의 흐름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경악과 혼란이 뒤섞인 수군거림이 동굴 안을 채웠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던전의 입구 장벽이 부서지며, 은빛으로 빛나는 정교한 갑옷을 입은 무리가 난입했다.
그 선두에 선 것은 눈부신 금발을 휘날리는 소녀였다.
플로렌시아 세이라.
마력 지상주의 가문의 차기 가주이자, 칼리아스 사관학교의 초엘리트 특급 훈련생.
그녀는 낙제생들이 폐기 던전에서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는 첩보를 듣고 급히 지원을 온 참이었다.
"모두 무사…… 한가?"
플로렌시아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녀의 아름다운 벽안이 던전 내부의 참상을 담았다.
그녀가 예상한 것은 피와 비명, 그리고 마수에게 짓밟힌 쓰레기들의 시체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스스로의 독액에 녹아내려 뼈를 드러낸 채 죽어 있는 거대한 고르곤 유충의 사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에드릭.
그는 뺨에 묻은 피를 무심히 닦아내며, 무너진 괴수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아주 미세한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한 무(無)의 상태.
그런 자가 어떻게 이 강력한 마수를 홀로 참살했단 말인가.
플로렌시아의 검끝이 가늘게 떨렸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의 질문에 에드릭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에게 플로렌시아 같은 '정의로운 천재'는 던전 공략에 방해만 되는 성가신 장치일 뿐이었다.
감정적인 교류 따위는 필요 없다.
오직 실리와 보상만이 중요할 뿐.
에드릭의 시선은 이미 괴수의 시체 너머, 허공에 생성되기 시작한 보상 상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스스스스……
빛무리와 함께 낡고 투박한 나무 상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의 학생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보, 보상 상자다!"
"3급 마수를 잡았으니 엄청난 아티팩트가 들어있겠지?"
하지만 에드릭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아카데미 상층부가 설계한 '다층적 정산 기믹'의 초입이라는 것을.
아카데미 감시관들이 모니터링하는 시스템 로그에는 지금 이 상자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을 터였다.
[감시 시스템 로그: 던전 보상 상자 생성 - 등급: 하(下)] [내용물: 하급 마력 결정 1개]
"쳇, 겨우 저딴 쓰레기가 보상이라고?"
"3급 마수를 잡았는데 고작 하급 결정이라니, 말도 안 돼!"
낙제생들이 실망 섞인 욕설을 내뱉었다.
플로렌시아 역시 의아한 눈빛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드릭의 디버깅 시야에는 전혀 다른 정보가 보이고 있었다.
[분석 완료: 보상 상자 이중 봉인 해제 코드 감지.] [물리적 외각: 위조용 하급 상자 (감시 로그 유도용)] [정밀 레이어 2단계: 고대 암호화 블록 (ID: ARCH-709 연동 세션)] [정밀 레이어 3단계: 심연의 틈새 - 진짜 고가치 보상 잠복 중]
"멍청한 놈들."
에드릭이 조용히 상자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주머니에서 아주 작은 마도 도구의 파편을 꺼내 상자의 틈새에 찔러 넣었다.
동시에 마음속으로 디버깅 권능을 실행했다.
[이중 정산 프로토콜(Double Settlement Protocol) 강제 승인.] [감시 로그 우회 필터 작동 완료.]
딸깍.
경쾌한 소리와 함께 상자의 밑바닥이 이중으로 갈라졌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에드릭이 하급 마력 결정을 꺼내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의 손끝은 이미 상자 밑바닥 숨겨진 다차원 틈새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곳에는 영롱하게 푸른빛을 내뿜는, 손가락 굵기만 한 결정체가 잠들어 있었다.
[획득 완료: 마 Bypass 도관 (Grade: 에픽)] [효과: 장착 시 신체 마력 우회로 개설. 마력 독성 과부하 면역 15% 증가. 디버깅 권능 사용 시 싱크로율 소모량 20% 감소.]
'심봤군.'
에드릭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이것이야말로 마력이 막힌 그가 디버깅 권능을 리스크 없이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했던 핵심 유물이었다.
이 도관만 있다면, 앞으로의 싱크로율 소모와 마력 독성으로 인한 생명력 붕괴를 혁신적으로 늦출 수 있다.
에드릭은 감시관들의 시스템 로그가 감지하기 전에, 신속하게 '마 Bypass 도관'을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도관이 피부에 닿는 순간, 전신을 짓누르던 극심한 통증과 한기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 독성 수치: 18% -> 3%] [싱크로율 회복 속도 증가 완료.]
숨통이 트였다.
에드릭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상자에서 꺼낸 가짜 보상인 '하급 마력 결정'을 툭 던지며 뒤를 돌았다.
"쓸모없는 쓰레기군."
그 냉소적인 태도에 플로렌시아는 물론이고, 살아남은 낙제생들 모두가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에드릭은 시선을 주지 않고 묵묵히 던전의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그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쿠웅.
먼지가 자욱한 던전 입구를 지나, 아카데미 건물의 어두운 석조 복도로 발을 내딛는 순간.
사방에서 차가운 마력의 기운이 에드릭의 전신을 압박해 왔다.
"어이, 쓰레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인물.
볼카 자카르였다.
그의 뒤에는 황금 왕관회 소속의 정예 수하 기사들이 오연한 표정으로 대열을 맞추고 서 있었다.
볼카의 눈은 에드릭의 소매 안쪽,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기묘한 푸른 빛무리를 똑똑히 포착하고 있었다.
"혼자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감히 우리 황금 왕관회의 전리품에 손을 대?"
볼카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스릉!
그의 거대한 대검이 칼집에서 뽑혀 나왔다.
동시에 칼날 위에 붉은 불꽃이 사납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볼카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불타는 불꽃 장검의 서슬 퍼런 날을 에드릭의 목줄기에 바짝 밀어붙였다.
치이익-!
피부를 태울 듯한 뜨거운 열기가 에드릭의 목덜미를 엄습했다.
"그 소매 안에 숨긴 거, 얌전히 내놓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러면 여기서 네 목을 장작더미로 만들어 줄 테니까."
볼카의 살기 어린 눈빛이 에드릭의 얼굴에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