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척축하고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머릿속이 도끼로 찍힌 것처럼 지끈거렸다.

"어이, 쓰레기. 정신 안 차려?"

귓가를 때리는 거친 음성.

바닥을 짚은 손바닥바닥으로 차가운 돌의 감촉이 전해졌다. 손끝에 닿은 것은 흩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미적지근한 피의 온기였다.

이영민은 천천히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거대하게 깎아지른 지하 암벽과, 그 사이사이를 메우고 있는 기괴한 이끼들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둥실 떠오른 투명한 시스템 창.

[동기화 오류: 영혼 싱크로율 41.2% (지속 하락 중)]

[경고: 마력 독성 과부하 발생. 세포 붕괴 지연 불가.]

[생명력 붕괴 잔여 시간: 00:14:22]

[대상 정보] · 이름: 에드릭 · 마력 측정 수치: 0 (LOCKED) · 상태: 마력 불능, 만년 낙제생, 도태 예정자

"……아."

신음이 짧게 새어 나왔다.

이영민은 이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극악의 난이도로 악명을 떨쳤던 가상현실 게임 <칼리아스 크로니클>. 그 안에서도 최악의 쓰레기 캐릭터이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버리는 카드'로 통했던 엑스트라.

칼리아스 사관학교의 만년 낙제생, 에드릭.

그것이 지금 자신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일어나라니까, 이 귀머거리 자식이!"

정수리 위로 서늘한 바람이 일더니, 묵직한 가죽 장화가 에드릭의 어깨를 가볍게 밀쳐 냈다.

바닥을 구른 에드릭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고 상체를 일으켰다.

눈앞에 서 있는 사내.

붉은 머리칼을 거칠게 뒤로 넘긴 채, 피비린내 나는 대검을 어깨에 들쳐 메고 있는 녀석.

칼리아스 사관학교의 엘리트이자, 약육강식을 뼈에 새긴 광전사.

볼카 자카르였다.

"마력 한 톨도 없는 새끼가 왜 이런 던전까지 기어 들어와서 짐이 되는지 모르겠군. 랭킹 최하위 낙제생 새끼들은 그냥 얌전히 훈련장 구석에서 흙이나 파먹다 뒤질 것이지."

볼카는 침을 뱉었다.

그의 뒤로는 화려한 마동 갑옷을 입은 황금 왕관회 소속의 엘리트 학생들이 에드릭을 싸늘한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에드릭은 인간이 아니었다.

던전의 난이도를 낮추기 위해 숫자를 채우는 소모품. 위험한 함정을 대신 밟아 터뜨려 줄 고기방패에 불과했다.

'칼리아스 사관학교.'

천재를 기른다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 숨겨진 제국의 거대한 가축 우리.

스탯이 낮은 낙제생들은 철저히 도태되어 죽음의 던전으로 내몰린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대마귀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시간벌이용 제물로 쓰인다.

지금 이곳이 바로 그 도태전장의 최전선이었다.

"시간 없다. 갈고일 둥지까지 몸빵이나 제대로 해라, 에드릭."

볼카가 비죽 웃으며 손짓했다.

에드릭은 대꾸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 항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세계는 오직 힘과 수치로만 가치를 증명하는 곳이니까.

대신, 그는 자신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마력 측정치 0.

스탯 성장 한계는 완벽하게 잠겨 있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이 지옥 같은 아카데미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이영민은 이 게임의 고인물이었다.

그가 가진 것은 단순한 스탯이 아니었다.

'로그가 보인다.'

에드릭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공기 중에 미세하게 일렁이는 푸른빛의 궤적들. 세상의 인과율을 구성하는 시스템 언어가 그의 시야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었다.

[고유 권능: 메커니즘 디버깅(Mechanism Debugging) 활성화]

대가로 주어지는 마력 독성 과부하가 뼛속을 갉아먹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에드릭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고통조차 도구로 써야 한다.

쿠구구구궁-!

그때, 동굴 천장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낙석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어둠 저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날개를 펼치며 강림했다.

크르르르르……!

회색빛의 단단한 석질 피부. 칼날처럼 날카로운 발톱과 붉게 타오르는 안구.

2등급 마수, 갈고일이었다.

"나왔군, 똥개 새끼."

볼카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주위로 황금 왕관회 녀석들이 일제히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화려한 불꽃과 바람의 정령력이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갈고일의 반응은 빨랐다.

괴수는 날개를 펄럭이며 순식간에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가장 약해 보이는 먹잇감을 향해 돌진했다.

목표는 에드릭이었다.

"비켜, 쓰레기! 진로 방해하지 말고!"

볼카의 외침은 구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공격 궤도에 에드릭이 걸리적거린다는 짜증에 불과했다.

지면을 부수며 돌진하는 갈고일의 동선.

그 엄청난 질량의 돌격 앞에서, 일반적인 낙제생이라면 얼어붙어 뼈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릭의 시야는 달랐다.

갈고일이 밟고 지나가는 허공과 대지 위로, 붉은색 에러 마크가 점멸하는 궤적 로그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벤트 ID: 9021 - 갈고일 물리 돌격 궤적] [오류 감지: 지질 구조 피격 판정 버퍼 오버플로우 가능성 존재]

'찾았다.'

에드릭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는 피하는 대신, 구석에 버려져 있던 낡은 마도 단말기로 시선을 돌렸다. 폐기 던전 구획의 제어용 단말기였다.

그의 손가락이 단말기의 깨진 화면 위를 보이지 않는 속도로 두드렸다.

마력이 없는 에드릭이 던전 시스템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디버깅 해킹이었다.

스르륵.

[시스템 인덱스 우회 접근 완료.] [미등록 고대 암호 코드 발견 (ID: ARCH-709)] [임시 세션 등록 중…… 가등록 완료.]

(이 유물 코드는 나중에 아주 유용하게 쓰이겠지.)

에드릭은 가등록한 코드를 주머니 속 지갑 깊숙한 곳에 인덱스화해 밀어 넣듯 뇌리에 새겼다.

그리고 곧바로 눈앞의 갈고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쐐애애액-!

갈고일의 날카로운 발톱이 에드릭의 목덜미에 닿기 직전.

에드릭의 손가락이 허공을 튕겼다.

[메커니즘 디버깅: 충돌 판정 좌표 교환(Swap) 실행]

위이잉!

순간, 갈고일이 들이받으려던 에드릭의 신체 좌표와, 저 멀리 단단하게 솟아 있는 지하 바위산의 피격 충격 위치 판정이 강제로 맞교환되었다.

인과율의 버그가 발생한 것이다.

갈고일의 눈앞에 분명히 서 있던 에드릭은 그대로 존재했다.

하지만 갈고일의 몸이 인지한 '물리적 충돌의 대상'은 에드릭이 아닌, 수십 미터 뒤의 거대한 바위산이었다.

쉽게 말해, 허공을 들이받았는데 바위대포에 정면으로 들이받은 충격을 몸뚱이 전체로 두들겨 맞는 격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정적을 깨뜨리는 폭음이 동굴을 뒤흔들었다.

"끄아아아악?!"

갈고일이 비명을 지르며 공중에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녀석의 단단한 석질 가죽이 사방으로 튀어나갔고, 날개뼈는 완전히 뒤틀려 으스러졌다.

스스로의 돌격 위력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낸 괴수는 지면에 처박힌 채 피를 토하며 발작했다.

단 한 방.

마력 수치 0의 낙제생이 손가락 하나로 2등급 괴수의 뼈대를 완전히 분쇄해 버린 것이다.

"……어?"

뒤에서 마법을 준비하던 황금 왕관회의 마법사가 영창을 멈추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마력의 파동도, 화려한 검기도 없었다. 그저 에드릭이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갈고일이 혼자 벽에 머리를 들이받은 것처럼 자멸해 버렸으니까.

샤아아악!

그 침묵을 깨고 움직인 것은 볼카였다.

"하하! 이 멍청한 짐승 새끼가 혼자 자빠지는구나!"

볼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약했다.

그의 대검이 붉은 마력을 뿜어내며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갈고일의 목덜미를 깊숙이 찔러 들어갔다.

푸하악!

검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갈고일은 제대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단숨에 숨이 끊어졌다.

쿵.

거대한 괴수의 사체가 바닥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볼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대검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에드릭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콰드득.

볼카의 더러운 군화 굽이 에드릭의 구두 끝을 짓밟았다.

"운이 좋았군, 쓰레기."

볼카가 비죽 웃으며 에드릭의 뺨을 대검의 평평한 면으로 툭툭 쳤다. 차갑고 비린 피가 에드릭의 뺨에 묻어났다.

"네놈이 얼어붙어 있는 바람에 갈고일 녀석이 조준을 잘못해서 바위에 처박힌 모양이군. 덕분에 막타는 내가 맛있게 먹었다만."

"……."

"새끼, 겁에 질려 말도 못 하는군. 역시 낙제생 쓰레기답다. 앞으로도 그렇게 딱 좋은 미끼로 굴러라. 그래야 황금 왕관회의 위대한 전사들이 편하게 사냥을 하지 않겠나?"

볼카는 비열하게 웃으며 에드릭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뒤를 따르는 동료 전사들도 에드릭을 보며 킥킥거렸다.

"야, 방금 쟤 오줌 지린 거 아니냐?" "저러다 다음 구역에선 진짜 뼈도 못 추리겠는데?"

그들의 조소를 받으면서도 에드릭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뺨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천천히 닦아낼 뿐이었다.

'어리석은 놈들.'

에드릭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감정적인 분노 따위는 사치다. 그에게 볼카나 황금 왕관회 녀석들은 그저 이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잠시 늘어놓은 '소모성 장치'에 불과했다.

저 오만한 전사 녀석이 앞에서 날뛰어 주는 동안, 자신은 뒤에서 진짜 이득을 챙기면 그만이다.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맑은 종소리와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알림: 던전 클리어 정보 로딩 완료.] [안전 구역(Safe Zone)이 설정됩니다. 모든 위협 요소가 제거되었습니다.]

"휴, 끝났군." "가자, 정산하러 가야지."

학생들이 긴장을 풀고 무기를 거두었다. 볼카 역시 대검을 칼집에 꽂아 넣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걸어가려 했다.

모두가 승리와 안전을 확신한 순간.

에드릭의 눈앞에 떠오른 디버깅 시야가 격렬하게 붉은빛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이이-!

귀가 먹먹할 정도의 경고음이 그의 뇌리를 때렸다.

[경고: 시스템 로그 위조 감지.] [가짜 통보(Fake Notification) 기믹 작동 중.] [사망한 개체 '갈고일(Grade 2)'의 생명력 정합성 불일치.]

에드릭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갈고일의 시체로 향했다.

시체 밑바닥.

갈고일의 깨진 석질 피부 틈새로, 검은 마력이 실타래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지면의 피와 융합하며 거대한 마법진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시체가 아니었다.

진짜 보스를 깨우기 위한 '껍데기'이자, 방심한 사냥꾼들을 일격에 몰살시키기 위한 잔인한 함정이었다.

[이벤트 ID: 9901 - 진(眞) 보스 '심연의 파수꾼' 강림 프로세스 개시] [도살 로그 시각화율: 98%…… 99%……]

에드릭의 입꼬리가 천천히 비틀려 올라갔다.

"이래야 칼리아스의 던전답지."

모두가 안전하다고 믿고 무기를 내린 그 순간.

사망한 벌레의 사체 속에서, 피에 젖은 거대한 손아귀가 서서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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