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주전 조 조끼 벗어. 그리고 당장 운동장 50바퀴 돌아."

최길환 감독의 목소리가 흙먼지 날리는 청명고 운동장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50바퀴. 정규 규격의 육상 트랙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무려 2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였다. 그것도 완충재 하나 없이 돌덩이처럼 굳은 흙바닥 트랙이었다. 무릎 연골을 통째로 갈아 넣으라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못 돌겠다면, 당장 짐 싸서 나가라. 대학 진학 추천서고 뭐고 없을 줄 알아."

최길환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겁에 질려 무릎을 꿇고 빌어라. 그게 이 바닥의 지배자인 자신에게 대든 대가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태오는 침묵을 지켰다. 그의 시야 한구석에서 붉은색 경고창이 점멸하고 있었다.

[경고: 왼쪽 무릎 슬개건 부하도 35%] [흙바닥 트랙 주행 시 충격 하중 1.8배 증가 예상. 50바퀴 완주 시 부하도 90% 돌파, 반월판 연골 파열 위험 급증.]

전생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최길환의 이 독단과 혹사 전술에 짓눌려, 결국 스물넷이라는 젊은 나이에 양쪽 무릎 수술을 대여섯 번씩 거듭하며 은퇴해야 했던 비참한 결말.

하지만 지금의 태오는 그때의 무력한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스스륵.

태오는 아무런 대꾸 없이 가슴에 걸치고 있던 주전 조의 분홍색 조끼를 벗었다. 그리고 그것을 최길환의 발밑에 툭, 던져놓았다.

"돌겠습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 흔들림 없는 태오의 태도에 최길환의 눈썹이 꿈틀했다. 뒤에 서 있던 박성민은 코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미친 새끼. 오기 부릴 걸 부려야지. 50바퀴 돌고 나면 내일 기어 다니지도 못할 거다."

박성민의 비아냥을 뒤로하고, 태오는 흙바닥 트랙의 출발선으로 걸어갔다.

사각, 사각.

낡은 육상화가 거친 흙모래를 밟는 소리만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태오는 가볍게 숨을 고른 뒤, 이내 첫 발을 내디뎠다.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1바퀴, 2바퀴.

초반 페이스는 평이했다. 하지만 운동장 바닥은 최악이었다. 군데군데 파이고 굳은 흙은 디딜 때마다 발목과 무릎을 타고 척추까지 충격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물리학적으로 잔디 구장에 비해 흙바닥은 지면 반발력이 흡수되지 않고 신체 관절로 그대로 역류한다.

10바퀴를 넘어설 무렵, 태오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왼쪽 무릎 슬개건 부하도: 42%] [경고: 대퇴사두근의 피로 누적으로 인한 무릎 관절 가속 과부하 발생.]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미약한 편두통이 시작되었다. '강골의 장부'가 가동되면서 발생하는 신경적 동요였다. 뇌가 신체의 위기를 감지하고 경고를 보내는 것이다.

태오는 달리는 페이스를 잃지 않은 채, 마음속으로 장부의 인터페이스를 호출했다.

'장부 개방. 부하 대환(代換)을 신청한다.'

[대환 거래 시스템 활성화.] [현재 차입 가능한 무릎 부하 자산: 15%] [대환 대상 스탯을 선택하십시오: 1. 심폐 지구력(VO2 Max) / 2. 하체 근지구력]

'두 가지 모두 균등 분할 대환.'

[거래가 성립되었습니다.] [왼쪽 무릎 부하도 15%가 일시 차입되어 '심폐 지구력' 및 '하체 근지구력'으로 강제 전환됩니다.] [대환 버프 유지 시간: 60분] [대출 이자: 거래 종료 후 24시간 동안 왼쪽 무릎 부하 회복 속도 50% 저하.]

쏴아아아.

순간,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얼음물을 들이켠 듯한 극도의 청량감이 밀려왔다. 터질 것처럼 가쁘던 숨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허벅지와 종아리를 지배하던 지독한 젖산의 피로감이 마법처럼 씻겨 나갔다.

심박수가 분당 180회에서 130회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다리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20바퀴.

태오의 페이스는 오히려 처음보다 빨라졌다.

"어? 저 새끼 봐라?"

벤치에 앉아 전술 판을 만지작거리던 최길환의 시선이 달리는 태오에게 고정되었다. 보통 20바퀴쯤 돌면 페이스가 눈에 띄게 떨어지고 다리가 풀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태오의 주행 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히려 보폭(Stride)이 일정하게 유지되며 군더더기 없는 크로스컨트리 주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30바퀴.

이제 운동장의 다른 부원들도 훈련을 멈추고 태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사각.

일정한 기계음 같은 발소리만이 고요한 운동장을 채웠다. 태오의 얼굴은 땀으로 젖었으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이 장부 경영이다.'

관절의 내구도를 담보로 잡고, 신체 효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하이리스크 플레이. 전생의 자신은 무식하게 버티다 무릎이 깨졌지만, 이번 생은 다르다. 리스크를 통제하고 자산으로 치환한다.

하지만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35바퀴를 넘어설 때쯤, 머릿속을 쥐어짜는 듯한 강박 신경증이 엄습했다. 이명이 들리고, 시야의 가장자리가 붉게 타들어 갔다. 신용 자산을 무리하게 당겨 쓴 대가였다.

태오는 이를 악물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마다 UCL 우승컵을 들어 올리던 전생의 갈망을 되새겼다. 이깟 흙바닥에서 쓰러질 순 없었다.

40바퀴 돌파.

"야, 강태오! 미쳤어? 페이스 늦춰!"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태오를 향해 달려왔다. 동기이자 미드필더 파트너인 한준우였다. 준우는 최길환 감독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품에 숨겨두었던 물병을 태오에게 내밀었다.

"이거 마셔! 너 그러다 진짜 무릎 나가! 감독님 성격 알잖아, 그냥 대충 도는 시늉만 해!"

걱정이 가득 담긴 준우의 얼굴. 하지만 태오의 시야에 비친 준우의 상태는 태오 자신보다 더 심각했다.

[인물 정보: 한준우] [오른쪽 무릎 전방십자인대 부하도: 78% (적색 위험 상태)] [분석: 가속 및 방향 전환 시 인대 파열 임계점 도달 우려.]

태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 병신 같은 새끼.'

전생에서도 준우는 태오를 돕겠다며 무리하게 경기를 뛰다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축구를 그만두었었다. 그 기억이 태오의 머릿속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동료를 믿는 것은 사치다. 결국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갉아먹거나, 스스로 파멸할 뿐이다.

준우를 이 징벌의 궤도에서 떼어내야 했다. 그리고 저 적색 신호를 어떻게든 꺼야 한다.

태오는 준우가 건넨 물병을 거칠게 쳐냈다.

툭!

플라스틱 물병이 흙바닥에 나뒹굴며 맑은 물이 쏟아졌다. 준우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렸다.

"귀찮게 굴지 말고 저리 꺼져."

태오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달리는 와중에도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번뜩였다.

"네 앞가림이나 잘해, 한준우. 네 그 굼뜬 몸뚱이로 누굴 돕겠다는 거야? 옆에서 알짱거리면 페이스만 흐트러지니까 썩 꺼지라고."

일부러 뱉은 독설이었다. 상처를 주어서라도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준우가 최길환의 눈 밖에 나지 않고, 무릎을 아낄 수 있으니까.

"태오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준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억울함과 서운함이 교차하는 표정이었지만, 태오는 돌아보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45바퀴. 이제 마지막 다섯 바퀴였다.

머릿속의 이명은 극에 달했다. 뇌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강박증이 태오의 이성을 시험했다. 하지만 대환된 심폐 능력과 근지구력은 그의 육체를 단단히 지탱하고 있었다.

마지막 50바퀴째.

태오는 오히려 속도를 더 올렸다.

타다다닷!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태오는 마치 경기 막판 결승 골을 향해 쇄도하는 공격수처럼 폭발적인 스프린트를 선보였다.

체력이 바닥나 헐떡이고 있어야 할 녀석이, 마지막 바퀴에서 시속 3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속도로 질주하자 벤치에 있던 최길환과 박성민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승선을 통과한 태오가 최길환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스윽.

태오는 옷깃으로 얼굴의 땀을 가볍게 닦아냈다. 호흡은 놀라울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심폐 대환 버프 덕분에 숨소리조차 거칠지 않았다.

태오는 흙빛이 된 최길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하지만 뼛속까지 시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50바퀴, 완주했습니다. 감독님."

"너... 너 어떻게..."

최길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징벌을 가했거늘, 눈앞의 소년은 마치 가벼운 아침 조깅을 마친 표정이었다. 오히려 태오의 당당하고 프로페셔널한 미소가 최길환의 권위를 사정없이 짓밟고 있었다.

"덕분에 심폐 기능 트레이닝이 아주 잘 되었습니다. 좋은 전술 훈련 지시, 감사합니다."

태오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미련 없이 락커룸 방향으로 걸어갔다.

운동장에는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박성민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태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고, 최길환의 얼굴은 수치심과 분노로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

샤워를 마친 태오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락커룸을 나섰다.

[대환 거래 종료.] [일시 차입된 무릎 부하도가 반환됩니다.] [현재 왼쪽 무릎 슬개건 부하도: 45%] [대출 이자 적용: 향후 24시간 동안 자가 회복 속도가 50% 저하됩니다. 무리한 관절 가동을 금합니다.]

욱신.

왼쪽 무릎에 둔탁한 통증이 찾아왔다. 확실히 리스크 대환은 양날의 검이었다. 당겨 쓴 만큼의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 하지만 오늘 최길환의 기를 꺾어놓은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가방을 메고 복도를 지나던 태오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반쯤 열린 감독실 문틈 사이로 최길환의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 민우 형. 나 최길환이야."

송민우.

태오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대학 축구계의 거물이자, 학연 카르텔의 핵심 브로커. 전생에서 수많은 유망주들의 명줄을 쥐고 흔들며 뒷돈을 챙기던 악질적인 인물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성민이 포트폴리오는 계획대로 갈 겁니다. 이번에 있을 비공식 쇼케이스 매치, 성민이 원맨쇼로 만들어놓을 테니까요."

최길환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 강태오라는 새끼요? 아주 눈에 가시입니다. 감독 지시를 밥 먹듯이 무시해요. 오늘 50바퀴 돌렸는데도 멀쩡하더군요. 독종입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싹수가 노란 놈은 아예 밟아놓으면 그만입니다. 다음 경기부터 명단에서 완전히 제외할 겁니다. 쇼케이스고 뭐고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야죠. 그래야 대학 카르텔에서도 성민이를 에이스로 깔끔하게 받아줄 것 아닙니까."

태오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자신을 망가뜨려서라도 박성민을 기득권의 황태자로 밀어 올리겠다는 음모. 전생의 비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추악한 퍼즐의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태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꿈틀거렸다.

'어디 마음대로 해보시지.'

그들이 짜놓은 판을 통째로 뒤흔들어 주리라 다짐하며, 태오는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빠져나갔다.

***

다음 날 아침.

청명고 축구부원들이 운동장에 모여 서 있었다. 주말에 있을 지역 대항전 선발 명단이 발표되는 시간이었다.

최길환 감독이 거만한 걸음으로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주전 명단이 적힌 전술 판이 들려 있었다.

"이번 주말 경기는 우리 팀의 조직력을 다지는 중요한 일전이다. 전술의 핵심은 박성민을 중심으로 한 섀도 스트라이커 빌드업이다."

최길환은 보드마카를 들어 주전 명단을 적어 내려갔다.

[FW: 박성민, 김대진] [MF: 한준우, 이민수, 최태양...]

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미드필더진의 이름 중, 당연히 있어야 할 이름이 빠져 있었다. 어제 자체 청백전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고, 최길환의 징벌마저 완벽하게 버텨낸 천재 미드필더.

강태오의 이름은 주전 명단은커녕, 하단의 교체 멤버 리스트(Sub)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완벽한 배제였다.

최길환이 전술 판을 툭툭 치며, 강태오를 향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강태오는 이번 경기 명단에서 제외한다. 팀의 규율을 어지럽히고 개인행동을 일삼는 선수는 청명고의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없다. 당분간 훈련장 청소와 볼 보이만 전담하도록."

운동장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박성민은 승리감에 도취한 표정으로 태오를 힐끗 보며 비웃었다.

태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최길환의 일그러진 욕망이 담긴 화이트보드를 차갑게 응시할 뿐이었다.

눈앞의 적들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고 생각하겠지만, 태오에게는 이 썩어빠진 판을 뒤집을 또 다른 카드가 준비되어 있었다.

대환 거래를 통한 정면 돌파. 그리고 곧 찾아올 쇼케이스의 기회.

태오의 입술 끝이 보이지 않게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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