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심의 단호한 호각 소리가 상암 보조경기장의 뜨거운 공기를 갈랐다.
전광판이 가리키는 스코어는 0대 2. 청명고의 절망적인 열세였다. 후반전 시작을 알리는 휘슬과 동시에 터치라인을 밟는 강태오의 눈빛에는 타오르는 투지 대신, 얼음처럼 차갑고 영민한 계산기가 작동하고 있었다.
단순히 경기를 뒤집겠다는 객기가 아니었다. 90분이라는 한정된 전장 안에서 자신의 신체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고, 자신을 옭아매려는 적들을 어떻게 파멸시킬지에 대한 철저한 경영 계획서가 그의 머릿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주심에게 교체 카드를 내밀며 그라운드로 진입하는 순간, 태오의 시야 전면에 반투명한 청색 인터페이스가 명멸했다.
[강골의 장부(Ledger of Steel Bones)가 활성화됩니다.] [현재 가용 신용 한도: 100%] [사용자 강태오의 양측 무릎 피로도: 12%] [경고: 과도한 차입은 장부의 임계치를 초과하여 영구적인 신체 붕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태오는 가볍게 제자리 점프를 하며 잔디의 수분 상태를 점검했다. 어제 내린 비로 인해 피치가 다소 미끄러웠다. 디딤발에 걸리는 부하가 평소보다 1.5배는 더 높을 터였다.
"태오야."
3선에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한준우가 태오의 유니폼 자락을 잡았다. 그의 얼굴은 땀과 흙먼지로 뒤범벅되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태오의 등장을 학수고대했다는 듯 반짝였다.
"말한 대로 좌우 전환에만 집중해. 하프스페이스는 내가 완전히 찢어발길 테니까."
태오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준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성도고의 킥오프로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성도고는 전반전의 리드를 지키기 위해 두 줄 수비를 촘촘하게 세우는 전형적인 4-4-2 로우 블록(Low Block) 전술을 들고나왔다. 공격 라인조차 하프라인 아래로 내려앉아 공간을 극도로 제한하는 수비 형태였다.
본부석 VIP석에 앉아 있던 대한축구협회 김 전무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세운 채 옆에 서 있는 대학 카르텔 브로커 송민우를 바라보았다.
"송 감독, 저 녀석이 그렇게 물건이라며? 최길환이가 아주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던데."
송민우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물건은 무슨 물건이겠습니까, 전무님. 제 조카 성민이 발끝에도 못 미치는 놈입니다. 제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협회 손바닥 안이지요. 오늘 경기 끝나면 바로 대학 진학 길도 막히고, 연령별 대표팀 소집 불응 죄목으로 영구 제명 초안까지 준비해 두지 않았습니까."
"허허, 그렇지. 한국 축구의 기강을 흔드는 버릇없는 놈들은 싹부터 잘라내야지."
김 전무의 품 안에는 이미 태오의 발을 묶어둘 '국가대표 강제 혹사 및 독점 계약 조건 불응 시 징계 초안' 문서가 들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그라운드에서 볼을 잡은 강태오에게 향했다.
성도고의 미드필더 박성민이 태오를 향해 거칠게 압박을 가해왔다. 박성민은 협회 카르텔의 비호를 받으며 자라온 황태자답게, 태오의 앞길을 완전히 가로막겠다는 듯 어깨를 들이밀며 진로를 차단했다.
"여기서 끝이다, 강태오. 네까짓 게 발버둥 쳐봐야 갈 곳은 없어."
박성민이 낮게 읊조리며 오른발을 뻗었다. 공만을 정확하게 걷어내려는 정석적인 수비가 아니었다. 태오의 디딤발을 은근히 겨냥한, 교묘하고도 지저분한 발짓이었다.
태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뻔한 길목이군.'
태오는 박성민의 무게 중심이 오른쪽으로 쏠리는 아주 찰나의 순간을 포착했다. 상체를 왼쪽으로 굽히는 바디 페인팅 동작 한 번에 박성민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 순간, 태오는 디딤발을 가볍게 튕기며 공을 오른발 안쪽으로 긁어왔다. 라 크로케타(La Croqueta).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팬텀 드리블에 박성민은 허공을 가르며 잔디 위로 보기 좋게 고꾸라졌다.
"어디를 보고 있는 거지?"
태오의 서늘한 목소리가 박성민의 귓가를 스쳤다.
박성민을 가볍게 제쳐낸 태오는 성도고의 하프스페이스(Half-space), 즉 상대 풀백과 센터백 사이의 애매한 공간을 완전히 장악했다. 상대 수비진이 태오의 침투에 당황하여 대형을 좁히는 순간, 태오의 시야는 그라운드 전체를 3D 입체 지도로 펼쳐놓은 것처럼 선명해졌다.
송민우가 장담했던 성도고의 완벽한 패스 차단선은 태오의 영민한 포지셔닝 한 번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태오가 가볍게 공을 횡으로 굴리며 템포를 조절하자, 성도고의 수비진 전체가 그의 발끝에 매달린 인형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저, 저놈 보게……?"
본부석의 송민우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설계한 쇼케이스 참관 계획에 따라 대학 관계자들에게 보여주려 했던 박성민의 압도적인 면모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강태오라는 괴물 한 명에게 중원이 유린당하는 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오가 볼을 소유한 지 불과 10분 만에, 청명고의 경기 흐름은 완전히 180도 뒤바뀌었다. 성도고의 미드필더진은 태오의 볼 키핑과 패스 타이밍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쫓아다니기 바빴다.
바로 그때였다.
태오의 시야 우측 하단에서 붉은색 경고 신호가 격렬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 위험 감지 !!] [대상: 한준우]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누적 피로도: 91%] [파열 위험도: 극도로 높음 (Red Zone)]
준우가 성도고의 역습을 차단하기 위해 무리하게 방향 전환을 시도하던 중이었다. 잔디에 박힌 그의 오른쪽 축구화가 미끄러지며 무릎 관절이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이려는 찰나였다. 이대로 두면 전생의 자신처럼 준우 역시 선수 생명이 끝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터였다.
태오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내 그라운드에서 내 동료가 쓰러지는 꼴은 두 번 다시 보지 않는다.'
태오는 즉각 장부의 권한을 실행했다.
[강골의 장부 - 자산 이전 프로토콜 작동.] [대상 한준우의 무릎 과부하(전량)를 사용자 강태오의 장부로 이전합니다.] [이전 규모: 피로도 45% 차입.] [대환 조건: 이전된 부하를 '임시 킥력 및 시야 버프'로 강제 환산합니다.]
순간 태오의 오른쪽 무릎으로 벼락이 치는 듯한 뻐근한 가 통증과 함께, 뇌리를 찌르는 강박적인 신경증이 밀려왔다. 심장 박동수가 분당 180회까지 치솟으며 시야의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었다. 장부의 차입 한도를 억지로 당겨 쓴 대가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오른발 끝에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가 응축되었다.
"준우야! 뛰어!"
태오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무릎의 통증이 마법처럼 사라진 준우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준우는 망설임 없이 성도고의 오프사이드 라인을 깨부수며 전방으로 쇄도했다.
태오가 오른발을 휘둘렀다.
콰아앙!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태오의 발끝을 떠난 공이 역회전을 걸며 수려한 궤적을 그렸다. 성도고의 센터백 두 명의 키를 정밀하게 넘겨, 페널티 박스 안으로 침투하는 준우의 가슴팍에 정확히 배달되는 자로 잰 듯한 롱패스였다.
"미친 패스다……!"
관중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준우는 달려오는 탄력을 그대로 살려 가슴 트래핑 후, 골키퍼가 각도를 좁히며 나오기 직전에 오른발 발리슛을 날렸다.
그물을 찢을 듯한 기세로 날아간 공이 성도고의 골망 오른쪽 구석에 꽂혔다.
철썩!
후반 15분, 스코어 1대 2. 추격의 불씨를 당기는 만회 골이었다.
"태오야!!!"
골을 넣은 준우가 셀레브레이션을 잊은 채 제일 먼저 태오에게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준우의 얼굴에는 벅찬 감동과 함께 태오를 향한 무한한 신뢰가 서려 있었다.
"봤지? 내가 찔러준다고 했잖아."
태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준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무릎에 가해진 부하로 인해 다리가 조금 시큰거렸지만, 동료를 구원하고 골을 만들어냈다는 희열이 통증을 압도했다.
이 극적인 골로 경기장의 분위기는 청명고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수세에 몰린 것은 성도고뿐만이 아니었다. 본부석의 김 전무는 초조함에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이대로 강태오가 경기를 뒤집고 영웅이 된다면, 자신이 준비한 징계와 착취 시나리오는 완전히 물거품이 될 터였다.
"송 감독, 더는 못 봐주겠군. 하프타임도 지났으니 내가 직접 내려가서 저 건방진 놈의 기를 꺾어놓겠네."
김 전무가 품 안의 서류 봉투를 움켜쥐고 VIP석을 나섰다. 송민우가 그 뒤를 황급히 따랐다.
경기 중 잠시 선수의 부상 치료를 위해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킨 어수선한 틈을 타, 김 전무가 청명고 벤치 뒤편 터치라인 근처까지 내려왔다. 그는 최길환 감독을 벤치 밖으로 불러내어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최 감독! 지금 뭐 하는 건가? 저 강태오라는 놈, 당장 빼지 않고! 협회의 지시를 우습게 아는 놈을 감히 결승전 그라운드에 세워 두다니!"
최길환은 협회 실세인 김 전무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안절부절못했다.
"저, 전무님…… 하지만 지금 태오가 없으면 경기가 안 됩니다……."
"당장 빼! 그리고 강태오, 너 이리 와봐!"
김 전무가 그라운드 가장자리에 서 있던 태오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태오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터치라인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등 뒤로는 어느새 데이비드 스타인이 양복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무님? 경기 중에 독단적으로 감독과 선수를 흔드는 건 엄연한 규정 위반일 텐데요."
태오의 직설적인 지적에 김 전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버릇없는 놈이 감히 누군 줄 알고! 네놈이 아무리 날뛰어봐야 내 서명 한 줄이면 연령별 대표팀 소집 제외는 물론이고, 국내 프로 구단 드래프트 전면 금지까지 갈 수 있어! 여기 이 서류 보이지? 당장 서명하고 무릎 꿇어!"
김 전무가 품 안에서 '국가대표 의무 소집 및 혹사 징계 합의서' 초안을 꺼내 들어 태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때, 태오의 뒤에 서 있던 데이비드 스타인이 영어로 유창하게 읊조렸다. 그의 손에는 이미 태오의 스마트폰으로 녹음되고 있는 녹취 화면과 함께 한 장의 영문 서류가 들려 있었다.
"김 전무님. 저는 영국 '스타인 스포츠 에이전시'의 대표 데이비드 스타인입니다. 현재 강태오 선수는 저희 에이전시의 전속 보호 아래 있으며, 프리미어리그(EPL) 구단과의 가계약 절차를 진행 중입니다. 지금 행하시는 행위는 FIFA 규정 제19조 및 프로 선수 권익 보호 규정에 의거, 명백한 '협박 및 부당 외압'에 해당합니다."
"뭐, 뭐라고? 외국인 쪼가리가 감히 어디서 협회 일을 간섭해!"
김 전무가 펄펄 뛰었으나, 태오는 흔들림 없이 품 안에서 미리 준비해 둔 또 다른 서류 한 장을 꺼내 김 전무의 가슴팍에 툭 던지듯 건넸다.
"이게 뭡니까?"
김 전무가 얼떨결에 서류를 받아들었다. 서류의 제목은 단호했다.
[국가대표 소집 시 부상 방지 및 무제한 손해배상 담보 계약서]
태오가 서늘한 목소리로 김 전무를 압박했다.
"협회가 저를 강제로 소집해 혹사시키겠다면, 이 서류에 먼저 서명하십시오. 소집 기간 중 제 무릎에 단 1%의 부상이라도 발생할 경우, 사후 재활 비용 전액은 물론이고 유럽 진출 좌절에 따른 기대 수익 손실금 200억 원을 대한축구협회와 김 전무님 '개인'이 연대하여 무한 책임으로 배상한다는 조항입니다."
"이, 이 미친놈이…… 지금 제정신이냐?!"
"제정신입니다. 마침 저기 공중파 중계 카메라와 기자들이 이쪽을 촬영하고 있군요."
태오가 경기장 상단의 카메라 플랫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실제로 몇몇 카메라가 터치라인 근처에서 벌어지는 이 기묘한 대치 상황을 줌인하여 촬영하고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서명하시죠. 애국심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서 선수의 몸을 갈아 넣는 당신들의 카르텔이 얼마나 추악한지, 대중 앞에서 법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봅시다. 서명 안 하실 거면, 당장 제 그라운드에서 꺼지십시오."
태오의 눈빛은 포식자의 그것과 같았다. 일개 고교생의 기세라고는 믿을 수 없는 절대적인 압박감에 김 전무는 숨을 턱 막혔다.
"너, 너…… 정말 감당할 수 있겠냐?"
김 전무가 서류를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물었지만, 태오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며 김 전무의 숨통을 조였다.
"감당은 당신이 하셔야 할 겁니다. 서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협박 문서를 내일 자 아침 뉴스로 전 국민에게 공개할까요?"
김 전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잔디 위로 떨어졌다. 수많은 눈과 귀가 지켜보는 대낮의 그라운드에서, 그는 강태오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완벽하게 굴복당하고 있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김 전무는 비참하게 뒤돌아서서 본부석으로 도망치듯 걸어 올라갔다.
송민우 역시 사색이 되어 그 뒤를 쫓아갔다.
"휴우."
최길환 감독은 그 광경을 보며 넋을 잃은 채 침을 꼴깍 삼켰다. 강태오는 이미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선을 아득히 넘어선 존재였다.
태오는 승리감에 도취되지 않고 즉시 몸을 돌려 그라운드로 복귀했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이 경기의 완벽한 지배와 승리뿐이었다.
경기가 재개되었다.
청명고의 파상공세가 이어졌다. 태오의 조율 아래 한준우와 공격진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성도고의 수비 라인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당황한 성도고 수비진은 거친 반칙으로 일관했으나, 태오는 장부의 시각 정보를 적극 활용해 교묘하게 반칙을 유도하며 상대의 옐로카드를 누적시켰다.
후반 40분.
게임의 템포는 완전히 청명고의 지배 하에 있었다. 스코어는 여전히 1대 2였지만, 동점 골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성도고의 미드필더 박성민은 극도의 불안감과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주인공이어야 할 쇼케이스 무대에서, 강태오라는 존재에게 완벽히 지워진 채 조연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저 새끼만 없으면…… 저 새끼 무릎만 다시 부숴버릴 수 있다면!'
박성민의 눈빛에 살기가 서렸다.
태오가 중원 하프라인 부근에서 준우의 패스를 받기 위해 오픈 스페이스로 돌아 나가는 순간이었다. 태오의 디딤발인 왼쪽 무릎이 지면에 단단히 고정되며 다음 동작을 준비하는 찰나.
박성민이 눈을 뒤집은 채 태오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궤적이었다. 축구화 밑창이 완전히 드러난 채, 태오의 체중이 고스란히 실려 있는 왼쪽 디딤발의 무릎 관절을 정면으로 겨냥한 살인적인 양발 크러시 태클이었다.
"태오야, 피해야 돼!!!"
준우의 비명 섞인 외침이 그라운드에 울려 퍼졌다.
빛의 속도로 다가오는 박성민의 축구화 스터드가 태오의 시야에 가득 찼다.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위기의 순간, 태오의 눈앞에 붉은색 시스템 경고등이 폭발하듯 명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