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신청인: 한은혜 (관계: 자매)]

종이 위에 박힌 정갈한 글씨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나를 오빠라 부르며 손을 뻗던 유일한 혈육, 정민아. 그리고 내 상냥한 아내이자 감시자인 한은혜. 두 사람이 자매라고 적힌 서류의 활자들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내 망막을 찢어발겼다.

그 순간, 관자놀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송곳으로 뇌를 후벼 파는 듯한 격통이 휘몰아쳤다.

아내가 정교하게 쌓아 올린 가상 낙원의 규칙을 깨부수고 날것의 진실을 마주할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대가. 뇌신경이 타오르는 과전류 속에서, 내 소중한 기억의 파편 하나가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감각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여덟 살 여름날, 어머니가 끓여주던 보리차의 구수한 냄새와 나를 보며 지어주던 그 따뜻한 미소.

그 하얗고 포근했던 기억이 순식간에 시커먼 잿가루로 변해 뇌리에서 영원히 소멸해 버렸다. 영혼의 일부가 뜯겨 나가는 참혹한 상실감에 나도 모르게 턱을 덜덜 떨었다.

"보지 마요…… 우현 씨, 제발……."

바닥에 주저앉은 은혜가 깨진 유리 조각에 손바닥이 찢기는지도 모른 채 손을 뻗어왔다.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것은 단순한 악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통제력을 잃어버린 지배자의 처절한 공포에 가까웠다.

나는 반사적으로 서류를 구겨 쥐었다. 그리고 젖은 코트를 입고 거실로 난입한 강태석 형사가 내 손을 주목하기 직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악! 아아악!"

비명은 절반의 연기이자 절반의 실제 비명이었다. 머릿속이 통째로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몸을 비틀었다. 손에 쥔 종이 뭉치를 바지 안쪽 깊숙한 주머니로 밀어 넣는 동작은 소작증 환자의 발작처럼 무질서하고 격렬하게 포장되었다.

"정우현! 이봐, 정신 차려!"

강태석의 무거운 군화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다가왔다. 그의 거친 손길이 내 어깨를 붙잡으려던 찰나, 피를 흘리던 은혜가 무서운 기세로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만지지 마세요! 당장 이 집에서 나가란 말이에요!"

언제나 우아하고 차분하던 은혜의 목소리가 쇳소리를 내며 긁혔다. 그녀는 깨진 이중창 너머로 불어닥치는 차가운 바람을 등진 채, 강태석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짐승처럼 맞섰다.

"이 사람은 환자예요! 당신이 제멋대로 침입해서 우리 남편의 뇌압을 올려놓은 거라고요! 당장 경찰에 무단가택침입과 정신적 상해죄로 고소하겠어요!"

"한은혜 씨, 난 지금 정민아의 실종 사건을 수사 중이고……."

"나가!"

은혜의 비명과 동시에 거실 인터폰에서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렸다. 단지 내 사설 보안요원들이 들이닥치는 소리가 현관 너머로 들려왔다. 강태석은 잇새로 거친 욕설을 뱉으며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충혈된 눈동자에는 의구심과 집착이 끈질기게 일렁이고 있었다.

"정우현, 너 눈빛이 아까랑 달라. 똑바로 봐. 너 진짜 미친 거 맞아?"

나는 초점을 흐린 채 입가에 침을 흘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아내의 손아귀에서 뇌가 녹아내린 무력한 인형의 연기를 완벽하게 수행해야 했다. 지금 이 서류의 비밀을 들키는 순간, 은혜는 나를 향한 통제의 수위를 한층 더 높일 것이 뻔했다.

보안요원들이 거실로 들이닥쳐 강태석의 양팔을 붙잡아 끌어냈다. 강태석은 끌려 나가면서도 내 주머니 쪽을 의심스럽게 훔쳐보았지만, 거칠게 쏟아지는 비바람과 혼란스러운 소음 속에 그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완벽한 차단이었다.

그리고 거실에는 오직 차가운 빗소리와, 바닥에 흩어진 유리 파편,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내와 나만이 남았다.

* * *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는 적막했다. 깨진 거실 유리창은 어느새 두꺼운 합판으로 임시 차단되어 있었고, 집 안의 공기는 평소보다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혜는 손바닥에 하얀 붕대를 감은 채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허브차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차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 안에는 내 뇌를 마비시키는 무색무취의 약물이 들어있을 것이 뻔했기에.

"많이 놀랐죠, 우현 씨?"

은혜의 목소리는 다시 평소의 부드럽고 상냥한 어조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가라앉은 눈동자는 내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흉포한 형사 때문에 우현 씨의 치료가 전부 수포로 돌아갈 뻔했어요. 다행히 김도진 박사님이 곧 오셔서 약을 처방해 주시기로 했어요."

"은혜 씨……."

나는 일부러 초점을 약간 흐리고 목소리를 가볍게 떨었다.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어. 그리고 아까 바닥에 떨어진 종이……."

은혜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붕대를 감은 그녀의 손가락이 찻잔 손잡이를 꽉 쥐는 바람에 하얗게 피가 통하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종이 말인가요, 여보? 아까 거실엔 유리 파편밖에 없었어요. 머리가 아파서 환각을 본 거예요."

"그랬나……? 머리가 너무 깨질 것처럼 아파서 무슨 글씨가 보인 것 같았는데…… 사방이 온통 붉은색이었어."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주머니 속에 숨겨둔 거친 종이 질감이 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지만, 내 안면 근육은 단 한 터럭의 긴장도 드러내지 않았다. 완벽한 무지. 그것만이 이 요새에서 내가 살아남아 반격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패였다.

은혜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관찰하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아주 미세하게 내쉬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다시 인위적이고 완벽한 미소의 형태로 휘어졌다.

"그래요, 전부 환각이에요. 우현 씨는 지금 아파서 그래요.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그러니까 내 가이드라인만 잘 따르면 돼요, 알겠죠?"

"응…… 은혜 씨 말만 들을게."

나는 얌전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구역질 나는 가스라이팅을 묵묵히 받아내며, 속으로는 주머니 속 서류의 내용을 곱씹었다.

민아가 은혜의 동생이라면, 나를 오빠라고 불렀던 그 아이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3년 전 화재 사고 일주일 전에 발행된 정신병원 격리 의뢰서. 은혜는 왜 제 동생을 강제로 가두려 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얽혔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그리고 은혜의 감시망을 우회해 외부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확보해야만 했다.

‘안방 구석, 화분 흙 아래.’

기억 속에서 민아가 사라지기 전 내게 남겨두었던 다급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녀가 은혜의 눈을 피해 집 안 어딘가에 밀수해 두었다는 초소형 주파수 무전 장치. 그것이 지금 내가 쥘 수 있는 유일한 실질적 탄환이었다.

"우현 씨, 머리 식힐 겸 서재 정리나 같이 할까요? 도진 박사님이 오시기 전에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게 좋아요."

은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안했다. 돕는 척하면서 나를 한순간도 시야에서 놓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좋아. 서재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니까."

나는 은혜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적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은 고요하고 대담했다.

서재는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밀실과 같았다. 이중 방음창 너머로 임시로 덧댄 합판의 실루엣이 보였다. 은혜는 서재 책상 위의 원고지들을 정리하는 척하며, 비스듬한 각도로 내 뒤통수를 끈질기게 응시했다.

나는 일부러 책장 구석의 오래된 인문학 서적들을 하나씩 꺼내 먼지를 터는 시늉을 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임을 크게 하며 서재 안쪽에 위치한 실내 화분 쪽으로 동선을 좁혀나갔다.

서재 구석에는 사람 허리 높이만 한 거대한 청자 화분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이 집의 미니멀한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게 잎이 시들어가는 은사시나무가 심겨 있었다.

"이 나무…… 물을 안 준 지 오래된 것 같아."

나는 화분 앞에 쪼그리고 앉아 흙을 만지작거렸다.

"내버려 두세요, 여보. 어차피 곧 시들어 죽을 나무예요. 사람을 불러서 치울 테니까 신경 쓰지 마요."

뒤편에서 은혜의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타일 바닥을 쓰르릉 긁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등을 돌린 채,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화분 구석의 단단한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손톱 밑으로 거칠고 축축한 흙이 끼어들어 가며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서너 번 깊게 흙을 파내려 갔을 때, 손가락 끝에 서늘하고 이질적인 촉감이 걸려들었다.

질긴 비닐 방수포.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더 깊이 찔러 넣어 흙 속에 묻혀 있던 작은 뭉치를 움켜쥐었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묵직한 물건이 비닐에 싸인 채 딸려 나왔다.

"우현 씨? 뭐 하고 있어요?"

은혜의 발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구두 굽이 바닥을 딛는 규칙적인 소리가 내 목을 조여오는 감시카메라의 셔터 음처럼 들렸다.

나는 순식간에 비닐 뭉치를 넓은 리넨 셔츠 소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동시에 화분 위에 얹혀 있던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뚝 꺾어 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가지가 다 말랐어. 은혜 씨, 나 때문에 이 나무도 병든 걸까?"

내 얼굴에는 초점 잃은 슬픔과 자책감이 가득 피어올라 있었다. 눈가에 억지로 눈물까지 고이게 만들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은혜는 내 손에 들린 마른 나뭇가지와, 흙투성이가 된 손가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화분 바닥의 파헤쳐진 흔적을 잠시 훑었지만, 내가 슬픈 표정으로 흙 묻은 손을 제 옷자락에 비벼대는 모습을 보며 이내 긴장을 풀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요, 우현 씨. 그건 그냥 식물일 뿐이에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손에 묻은 흙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그 손길은 지극히 다정했으나, 나를 옭아맨 쇠사슬처럼 무겁고 차가웠다.

"손이 더러워졌으니 어서 씻고 쉬어요. 내가 차를 새로 끓여 올게요."

"응, 고마워. 은혜 씨밖에 없어."

나는 순종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서재를 나섰다. 셔츠 소매 안쪽에서 묵직한 비닐 뭉치가 내 팔뚝의 살가죽을 긁어내렸지만, 나는 그 통증 속에서 짜릿한 승리감을 맛보았다.

완벽한 격리라고 믿었던 그녀의 거미줄 같은 감시망 한복판에서, 나는 마침내 세상을 향해 쏠 수 있는 단 한 발의 탄환을 확보했다.

* * *

새벽 두 시.

포레스트 힐 402호의 중앙 조명 시스템이 완전히 꺼진 시각, 집 안은 심해의 바닥처럼 적막하고 어두웠다. 옆 침대에서 들려오는 은혜의 규칙적이고 얕은 숨소리를 확인한 나는 고요히 이불을 걷어찼다.

소리 죽여 욕실로 걸어가 문을 잠갔다.

환풍기 소음이 윙윙거리는 좁은 공간 속에서, 나는 변기 등 뒤의 수조 안쪽에 숨겨두었던 비닐 뭉치를 꺼냈다. 젖은 비닐을 조심스럽게 벗겨내자, 흙먼지가 묻은 구형 군용 초소형 무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싸구려 플라스틱 재질에 안테나가 반쯤 부러진 고물이었지만, 배터리 잔량 표시등에는 아직 희미한 초록빛이 남아 있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무전기의 다이얼을 미세하게 돌렸다. 이중 방음창 밑바닥의 깊은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미약한 전파를 잡기 위해, 안테나를 욕실 환풍기 틈새로 밀어 넣었다.

치이이익—

날카로운 노이즈가 욕실의 타일 벽을 타고 퍼져나갔다. 나는 숨을 멈추고 볼륨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리고 약 3분간의 피를 말리는 침묵 끝에, 스피커 너머로 쇠가 긁히는 듯한 파지직 소리와 함께 긴급 발신음이 켜졌다.

- ……오빠?

그것은 내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가던, 하지만 영혼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던 여동생 정민아의 갈라진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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