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57분.
손목에 묶인 디지털시계의 액정은 가차 없는 숫자를 띄우고 있었다. 14:57. 하지만 내 시선이 닿은 거실 벽시계의 초침은 12의 자리에서 멈춰 선 채, 마치 뒤로 밀려나려는 태엽 인형처럼 기괴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띵- 동-.
귀를 찢는 기계음이 고요한 거실의 정적을 사정없이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단순한 초인종 소리가 아니었다. 둔중하고 단단한 쇳덩이가 현관문 방화문을 내리치는 듯한 쿵, 쿵, 쿵 하는 물리적 타격음이 벽면을 타고 내 발바닥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우현 씨! 안에 있는 거 다 압니다! 당장 문 열어요!"
문틈의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가뿐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현관을 향해 발을 내딛으려 했다. 그러나 무릎을 굽히기도 전에, 내 오른쪽 손목에 차갑고 단단한 감각이 옥죄어왔다.
"우현 씨……."
어느새 다가왔는지 기척도 없었다. 아내, 한은혜가 내 팔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가 손톱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녀린 체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기괴하고도 집요한 완력이다. 내 피부를 파고드는 그녀의 손끝은 냉동실에서 갓 꺼낸 얼음처럼 서늘했다.
"수칙 2호…… 기억하죠? 3시의 초인종은…… 환청이에요. 절대…… 흔들리면 안 돼요."
은혜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의 그 완벽하고 상냥한 미소 뒤에 가려져 있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검고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귓가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지직거리는 이명과 섞여 흘러들었다. 머릿속 한구석이 찌릿하며 무언가 무거운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두통이 일었다. 무의식중에 타이핑했던 소설 원고의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한 자 한 자 떠오를 때마다 겪는, 그 끔찍한 대가였다. 뇌세포가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는 느낌. 아주 소중한 기억의 파편 하나가, 이를테면 어린 시절 내 방 창가에 놓여 있던 화분의 색깔 같은 무해하고 따스한 기억 하나가 영구히 소멸해 가는 불길한 감각이 정수리를 관통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멈출 수 없었다.
쿵! 쿵! 쿵!
현관문이 다시 한번 사정없이 흔들렸다. 은혜는 내 손목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애원하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저 눈물은 진짜일까, 아니면 나를 이 정교한 가상 낙원에 영원히 가두기 위해 설계된 고도의 연출일까.
"우현 씨, 제발 내 말을 들어요. 주치 선생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외부의 소음은 당신의 망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문밖에는 아무도 없어요. 저 소리는…… 그냥 바람이 벽을 치는 소리가 당신 뇌에서 왜곡된 거예요. 나를 봐요. 나를 믿어야 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지극정성이어서, 하마터면 나 자신이 정말 미쳐버린 환자라고 수긍할 뻔했다. 내 안의 깊은 결함인 '자기 의심증'이 고개를 들며 속삭였다. *정말 환청이 아닐까? 네가 또 약을 제때 삼키지 않아서 뇌가 장난질을 치는 게 아닐까?*
그러나 내 시선은 거실 구석의 벽시계와 내 손목의 디지털시계를 번갈아 향했다.
은혜가 매일 아침 내게 건네는 미니멀한 서식의 행동 규범 가이드. [수칙 2호: 오후 3시의 초인종 소리는 환청이니 무시할 것.]
그녀가 설계한 룰은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그 규칙의 전제 조건은 '오후 3시'였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허파 가득 차가운 거실의 공기가 들어오자, 흐려지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내 주머니 속 디지털시계의 숫자는 여전히 14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분이라는 오차. 벽시계의 태엽을 미세하게 뒤로 밀어내며 억지로 '3시'를 만들어내려 했던 아내의 조작이, 오히려 내게 명백한 반증의 단서가 되어주었다.
환청은 물리적 진동을 만들지 못한다.
지금 현관문 하단의 틈새로 들어오는 미세한 먼지들이 진동에 맞춰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문틀의 이가 맞지 않아 덜덜 떨리는 기분 나쁜 마찰음이 온 집안을 울리고 있었다. 이것은 내 뇌가 만들어낸 가상의 파동이 아니다. 실제 질량을 가진 누군가가, 실제 물리적인 힘을 가해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은혜야."
내가 차분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은혜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금은 3시가 아니야."
"우현 씨……?"
"내 시계는 아직 2시 58분이야. 네가 준 수칙은 3시의 초인종을 무시하라고 했지. 그러니까 지금 이 소리는 무시할 대상이 아니야."
나는 손목을 비틀어 그녀의 손아귀에서 단번에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쉽게 풀려난 손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은혜는 예상치 못한 내 반항에 굳어버린 듯, 벌려진 입술을 다물지 못한 채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의 완벽한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가는 순간이었다. 그 찰나의 당혹감을 포착한 순간, 내 안에서 묘한 해방감과 통쾌함이 솟구쳤다.
아내가 만든 정교한 가상의 룰을, 그녀가 만든 규칙의 허점을 이용해 깨부순 것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현관 옆 벽면에 매립된 인터폰 시스템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귀가 먹먹해지는 이명이 머리를 흔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턌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정신만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안 돼요, 우현 씨! 누르면 안 돼요!"
뒤에서 은혜의 다급한 비명이 들렸다. 평소의 고요하고 우아한 목소리가 아닌, 날카롭게 찢어지는 비명이었다. 그녀가 내 등 뒤로 달려드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내 손가락이 더 빨랐다.
탁.
인터폰 하단의 액정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지직거리는 회색 노이즈가 가득 차올랐다. 흐릿한 수평선들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가운데, 카메라 렌즈 너머의 실루엣이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칠고 두꺼운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어깨가 거칠게 들썩이고 있었다.
나는 스피커 모양의 수화 버튼을 꾹 눌렀다.
- 치이이이익…… 정우현 씨! 안에 있죠? 당장 문 열어봐요!
인터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기계 음질 특유의 쇳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환청 따위가 비빌 수 없는 명확한 실제감을 띠고 있었다. 거칠고 물러설 줄 모르는, 집요함이 뚝뚝 떨어지는 남자의 목소리.
"누구…… 십니까?"
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너무 오랜만에 외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탓인지, 목이 메어 침을 삼켜야 했다.
내 질문에 인터폰 화면 속 사내가 고개를 홱 돌려 렌즈 쪽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매섭고 냉혹했다.
- 나 경기도 남부경찰서 강력팀 강태석 형사입니다. 3년 전 실종 사건 때문에 확인차 나왔으니까, 당장 문 열고 협조해요.
강태석.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 밑바닥에서 무언가 굳어 있던 응어리가 툭 하고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3년 전. 화재 참사. 그리고 실종. 내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며 나를 덮쳐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형사…… 라고요?"
- 그래요. 정우현 씨, 당신이 기억을 못 하든 미친 척을 하든 내 알 바 아니고, 지금 법원에서 발부받은 수색 영장 들고 왔으니까 시간 끌지 마요. 문 안 열면 강제로 개방합니다.
강태석 형사는 품 안에서 접힌 종이 몇 장을 꺼내 인터폰 카메라 바로 앞까지 들이밀었다. 흐릿한 가상 낙원의 모니터 너머로, 법원의 붉은 직인이 찍힌 영장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다른 손으로 들어 올린 또 하나의 서류철이 있었다.
- 이거 보여요? 당신이 그렇게 꽁꽁 숨어 있어도 진실은 안 가려져. 여기에 적힌 실종자 명단, 그리고 당신 이름…… 전부 다 확인 끝났으니까 가식 떨지 말고 나와!
그는 서류철을 펼쳐 카메라 렌즈에 바짝 붙였다.
카메라 렌즈의 초점이 흐려졌다 맞춰지기를 반복했다. 화면에 노이즈가 낄 때마다 백지 위에 인쇄된 검은 글자들이 조금씩 형체를 드러냈다.
[실종자 명단 및 관련 용의자 보고서]
가장 위에 적힌 이름은…… 내 이름이었다. 정우현.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몇 개의 이름들. 검은색 잉크로 인쇄된 글자들이 내 시신경을 타고 들어와 뇌리에 박히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해요."
갑자기 시야가 암전되었다.
아니, 화면이 꺼진 것이었다.
내 시선이 닿기도 전에, 언제 다가왔는지 알 수 없는 은혜가 내 앞을 완전히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녀의 한 손은 인터폰의 주 전원 스위치를 꾹 누르고 있었다. 액정의 푸르스름한 빛이 사라지자, 거실은 순식간에 어두컴컴한 음영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방금 전의 당혹감도, 슬픔도 없었다. 오직 얼음처럼 차갑고 무감각한,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무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우현 씨는 치료 중이에요. 외부인의 자극은 용납할 수 없어요."
은혜는 싱크대 서랍에서 꺼낸 듯한, 커다란 주방용 가위를 다른 한 손에 쥐고 있었다. 가위의 날카로운 금속 날이 거실의 미세한 빛을 받아 번뜩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인터폰 본체 아래로 손을 뻗었다.
서걱-!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면 틈새로 연결되어 있던 랜선과 전원 케이블이 단번에 잘려 나갔다. 잘려 나간 선 끝에서 미세한 스파크가 튀며 타는 냄새가 거실에 퍼졌다.
인터폰은 완전히 침묵했다. 현관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강태석 형사의 고함도, 쿵쿵거리던 거친 타격음도, 잘려 나간 선 끝의 침묵 속으로 완전히 매몰되어 버렸다.
은혜는 잘려 나간 케이블 조각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위를 쥔 그녀의 손끝에는 아직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제…… 조용해졌네요, 우현 씨."
그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올라갔다. 완벽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진실은, 방금 전 잘려 나간 랜선 너머의 세계보다 훨씬 더 깊고 잔혹한 심연이었다.
나는 바닥에 뒹구는 잘린 케이블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문밖의 진실은 차단되었고, 나는 다시 이 완벽한 감옥 속에 아내와 단둘이 남겨졌다.
가위 날이 맞물리며 서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짓눌렀다.
잘려 나간 전선 단면에서 피어오른 초라한 연기가 거실의 희끄무레한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타들어 가는 고무 냄새가 콧가에 매캐하게 맴돌았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정적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현관 너머에서 거칠게 문을 두드리던 그 둔탁한 타격음도, 강태석이라 자칭하던 남자의 포악한 고함도, 단번에 잘려 나간 구리선 너머로 증발해 버렸다.
은혜는 가위를 쥔 손을 천천히 내렸다. 날카로운 가위 끝이 그녀의 하얀 원피스 자락을 스치며 가벼운 마찰음을 냈다.
"우현 씨……."
그녀가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기괴한 걸음걸이였다. 내 시선은 그녀의 손에 쥐인 가위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굳어 가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내가…… 무서워요?"
은혜의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고, 상냥했다. 방금 전 전선줄을 단숨에 잘라내던 그 과감한 동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만적인 부드러움이었다. 그녀가 가위를 거실 테이블 위에 툭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유리에 금속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청동음이 뇌막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녀가 내 뺨으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끝이 내 살죽에 닿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섰다.
은혜의 눈동자에 아주 잠깐, 기묘한 상실감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생긋 웃어 보였다.
"당신…… 또 약을 거른 거군요. 그러니까 이런…… 기괴한 환청을 진짜라고 믿는 거예요. 도진 씨가 말했잖아요. 시각과 청각의 왜곡은…… 당신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내는 가장 흔한 방어기제라고."
"환청이…… 아니야."
내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목구멍이 모래를 삼킨 것처럼 까끌거렸다.
"문이…… 문이 흔들렸어. 먼지가 튀었다고. 은혜야, 내 눈앞에서 먼지가……."
"우현 씨."
은혜가 내 말을 부드럽게 가로막았다. 그녀는 내 어깨를 양손으로 지긋이 누르며, 나를 소파 쪽으로 인도하려 했다.
"먼지가 흔들리는 것도, 그 남자의 목소리도…… 전부 당신의 망상이 빚어낸 정교한 연출이에요. 3년 전의 그 끔찍한 기억을…… 당신 뇌가 억지로 가공해 내고 있는 거라고요. 제발…… 내 말을 믿어요. 난 당신의 아내잖아요."
지극정성 어린 목소리. 나를 향한 무조건적인 헌신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
내 안의 심각한 자기 의심증이 다시금 독사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정말인가? 내가 또 약을 먹지 않아서 미쳐버린 걸까? 외부의 자극이 정말 내 망상이 만들어낸 허상일까?* 머릿속이 핑 글 돌며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아내가 내민 정교한 가상 낙원의 룰이 내 인지 체계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내 발끝에 무언가 밟혔다.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은혜가 잘라버린 인터폰의 검은색 랜선 조각이 뒹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선의 단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순간, 내 호흡이 멎었다.
일반적인 인터넷 랜선 안쪽에는 여덟 가닥의 오색 빛깔 구리선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자 물리적 법칙이다. 하지만 바닥에 잘려 나간 검은색 피복 안쪽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구리선이 아니었다.
얇고 투명한, 실리콘 재질의 미세한 튜브 여러 가닥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투명한 튜브의 잘린 끝부분에서, 점성이 있는 무색무취의 액체가 뚝뚝 떨어져 대리석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지독하게 익숙한 액체였다. 아침마다 은혜가 내게 건네던, 전두엽의 인지 기능을 저하시키는 약물.
머릿속에서 벼락이 치는 듯한 격렬한 진동이 일었다. 어젯밤, 내 무의식이 타이핑했던 [잔혹한 원고]의 한 구절이 뇌막을 찢고 튀어나왔다.
*‘벽면을 흐르는 것은 정보를 전달하는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벽 너머에서 공급되는, 사육당하는 짐승을 위한 진정제 수액이다.’*
"아……!"
진실을 인지하는 순간, 우뇌를 관통하는 무시무시한 과전류가 흘렀다.
"커헉!"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극심한 통증과 함께, 내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소중한 기억 하나가 거칠게 뜯겨 나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 내가 첫 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되던 날, 나를 안아주며 울리던 어머니의 목소리. 그 따뜻하고 소중했던 기억의 파편이 실시간으로 재가 되어 바스러져 갔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공포에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는 쇳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대가다. 진실을 인지하고 아내의 왜곡을 깨부술 때마다 치러야 하는, 내 자아 소멸의 리스크.
"우현 씨! 왜 그래요? 괜찮아요?"
은혜가 깜짝 놀라 내 곁에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나를 붙잡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걱정은 진짜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바닥에 엎드린 채,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 잘린 튜브 끝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찍어 올렸다. 손가락 끝에 닿는 미적지근하고 끈적한 감각.
이 집은 단순히 방음 요새가 아니다. 벽면 가득 채워진 전선관들을 통해, 내 인지를 마비시키고 조종하는 약물이 실시간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폰 역시 외부와 연결된 통신기기가 아니었다. 그저 아내와 김도진이 설계한, 나를 가두기 위한 인지 재구성 기술의 일부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방금 전 문을 두드리던 형사의 목소리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나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문밖은 고요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거실 천장에 매립된 스마트 홈 시스템의 스피커가 지직거리며 켜졌다.
- 정우현 씨…… 문 열어요…….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강태석 형사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음조는 기괴할 정도로 일정했고, 음절과 음절 사이의 간격이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조각조각 잘라 붙여 인위적으로 합성한 듯한 불쾌한 기계음.
- 정우현 씨…… 문 열어요…… 3년 전의…… 진실을…… 마주해야지…….
목소리는 거실뿐만 아니라 안방, 부엌, 심지어 화장실 안쪽 스피커에서도 동시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입체적으로 들려오는 기계적인 외침이 온 집안을 흔들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은혜를 바라보았다.
은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내 손가락 끝에 묻은 약물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조금 전의 상냥한 미소가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대신, 서늘하기 이를 데 없는 차가운 눈빛이 나를 향해 꽂혔다.
"우현 씨……."
그녀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집안을 가득 채운 기계음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명확하게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당신……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 말이에요."
그녀가 내 왼쪽 손목을 가리켰다.
나는 홀린 듯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은 텅 비어 있었다. 디지털시계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오직 붉게 쓸린 아내의 손자국만이 흉측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당신한테 시계 같은 건 준 적 없어요."
은혜의 부드러운 속삭임과 함께, 사방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기계음이 일제히 날카로운 이명으로 변해 내 머릿속을 사정없이 후벼 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