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의 단선음이 고막을 찌르는 잔향으로 화했다.
문고리는 여전히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쇠붙이와 쇠붙이가 맞부딪치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좁은 서재의 공기를 잘게 찢어발겼다.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내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안방 침대에 누워 마취된 채 잠들어 있다는 은혜가 아니라면, 지금 내 서재 문을 뜯어내려는 저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순간,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원고지 뭉치로 시선이 미끄러졌다.
빛이 꺾였다. 아니, 방 안의 물리적인 광원 자체가 왜곡되고 있었다. 백색 형광등 아래에서 그저 평평하게만 보이던 종이 표면 위로, 보이지 않던 미세한 굴곡들이 도드라졌다. 누군가 날카로운 금속 날로 종이를 깊게 그어 내린 듯한, 칼자국 모양의 잉크 눌림 자국들.
그 무수한 칼자국들이 서재 천장과 사방의 벽면을 향해 붉은빛의 형상으로 반사되기 시작했다. 잉크의 잔흔이 허공에서 붉게 불기둥처럼 치솟았다. 시신경을 타고 들어온 기괴한 광경에 숨이 턱 막혔다. 환각이 아니다. 이것은 내 뇌가 비명을 지르는 방식이었다.
우뇌 측두엽을 관통하는 강렬한 과전류. 머리통 속에 뜨겁게 달군 쇠꼬챙이를 밀어 넣고 휘젓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귀 뒤쪽의 신경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나는 착각마저 들었다.
동시에 머릿속의 서랍 하나가 통째로 비워지는 서늘한 감각이 뒤따랐다.
아주 소중했던 무언가. 열두 살 여름, 동네 어귀의 오래된 문방구 앞에서 동생과 나누어 먹던 불량 식품의 달콤한 향기였던가. 아니면 어머니가 내 이마의 열을 짚어 주던 손길의 서늘함이었던가. 실체 없는 진공의 구멍만이 뇌 한구석에 뚫린 채, 방금 잃어버린 기억이 무엇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자아 소멸의 공포가 전신을 엄습했다. 이 원고의 진실을 읽어 낼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자아의 대가였다.
나는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책상 밑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입술을 깨물어 신음을 삼켰다. 비릿한 피 맛이 혀끝을 적셨다.
어느 순간, 문고리를 흔들던 난폭한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서재 안에는 오직 내 거친 숨소리와, 끊어진 유선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먹먹한 기계음만이 남았다. 문틈 사이로 들이치던 정체불명의 검은 그림자도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바르르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지탱하며 일어섰다. 이대로 이 밀폐된 방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손끝으로 차가운 청동 도어록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금속의 냉기가 척수를 타고 올랐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끼이익.
경첩의 마찰음이 고요한 집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불타오르는 듯한 뇌의 열감을 억누르며, 나는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포레스트 힐 402호는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통유리창 너머의 숲은 밤의 장막에 가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집안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거실 복도를 따라 몇 걸음 걸어 나갔을 때, 기묘한 이질감이 내 발끝을 붙잡았다.
정적.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 조용한 집안에서 늘 신경을 긁어대던 미세한 기계음들이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복도 벽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거실 복도 벽시계가 걸려 있었다.
짙은 원목 프레임으로 둘러싸인 아날로그시계. 유리 덮개 너머로 가느다란 빨간색 초침이 째깍, 째깍,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돌고 있었다.
분명히 초침은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가 없었다.
보통의 아날로그시계라면 조용한 밤에 거실을 가득 채워야 할 그 건조한 마찰음이, 단 한 자락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진공 상태에 갇힌 것처럼 무음으로 회전하는 붉은 바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정체 모를 불길함이 차올랐다. 초침은 12를 지나 1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시간이 진짜 현재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스마트폰도, 인터넷 연결도 차단된 이 요새 같은 집에서 벽시계는 유일한 시간의 척도였으나, 지금 그 척도가 침묵 속에서 기괴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 기러기 같은 초침의 움직임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나는 복도 끝 안방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민아의 말대로 은혜는 저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문고리를 흔들던 그 정체가 다시 저 어둠 속으로 기어 들어간 것일까.
의문은 꼬리를 물었지만, 뇌의 통증이 더 이상의 사고를 가로막았다. 나는 거실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억지로 눈을 감았다.
*
창신(創新)의 빛이 통유리창을 통과해 거실 바닥에 긴 사각형의 그림자를 그릴 때쯤, 나는 눈을 떴다.
"우현 씨, 일어났어요……?"
나긋나긋하고 우아한 목소리.
어제와 조금도 다름없는, 완벽하게 다려진 리넨 원피스를 입은 은혜가 부엌 아일랜드 식탁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과 매끄러운 은빛 약통, 그리고 단정한 미니멀 서식으로 인쇄된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녀의 발소리는 카펫 위에서 완벽하게 소거되어 있었다.
"어제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아서…… 걱정했어요. 얼굴이 많이 까칠해졌네요. 자, 아침 약 먹을 시간이에요."
은혜는 백색의 하트 모양 알약 두 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입꼬리는 정확히 좌우 대칭을 이루며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매일 아침 내가 마주하던 그 완벽한 미소였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 너머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마치 잘 짜인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인형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어제……."
내가 입을 열자, 은혜의 고개가 미세하게 옆으로 기울어졌다.
"어제 밤에 서재에 오지 않았어? 문을 흔드는 소리가 났는데."
은혜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무슨 소리에요…… 우현 씨. 나는 어제 밤에 안방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걸요. 요즘 소설 집필 때문에 예민해져서……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요? 주치의 선생님도 그러셨잖아요. 뇌가 피로하면 사소한 바람 소리도 침입자의 발소리로 왜곡해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환청. 왜곡.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었다. 내 감각을 불신하게 만들고, 나 스스로를 미쳐가는 환자로 규정짓게 만드는 은밀한 언어의 덫.
"그랬나. 바람 소리였나 보네."
나는 순종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슴속에서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평온을 가장했다. 지금 그녀에게 의심을 들켜서는 안 된다. 내가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이 완벽한 낙원의 가두리 양식장은 더 꼼꼼하게 나를 옥죄어 올 터였다.
"그래요, 우현 씨. 약을 먹고 나면…… 머리가 한결 맑아질 거예요. 얼른 삼켜요."
은혜가 약을 내 입술 앞까지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목소리, 손짓,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들.
'약을 먹고 나면 머리가 한결 맑아질 거예요.'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어제 아침에도, 그저께 아침에도 그녀는 정확히 이 타이밍에 똑같은 억양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문장으로 나를 다그쳤다.
[약을 먹고 나면…… 머리가 한결 맑아질 거예요. 얼른 삼켜요.]
미묘한 문장 반복. 일상적인 대화에서 인간이 이토록 정형화된 구문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수는 없다. 이것은 그녀가 학습한, 혹은 내 뇌에 주입하려는 일종의 '메시지 프로토콜'이었다.
나는 알약을 받아 드는 척하며, 찻잔을 들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슬쩍 약을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찻물을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고마워, 은혜야. 약을 먹으니 벌써 좀 나아지는 것 같네."
"다행이에요, 우현 씨. 다 우현 씨를 위해서니까요……."
은혜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녀는 내 손등 위에 매일 아침 건네는 행동 지침 수칙 가이드를 올려놓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엌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녀가 돌아서자마자 소매 속의 알약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남겨둔 오늘 자 행동 지침 수칙을 내려다보았다.
[포레스트 힐 402호 가사 행동 지침]
단출한 검은색 폰트로 인쇄된 수칙서의 두 번째 항목이 내 눈을 자극했다.
'2. 오후 3시의 초인종 소리는 외부 선로 보수 작업으로 인한 오작동 및 환청이니 절대 문을 열지 말고 무시할 것.'
오후 3시의 초인종.
왜 하필 특정 시간대를 지정해 놓았을까. 그리고 왜 그것을 '오작동' 혹은 '환청'이라 미리 규정짓는 것일까.
나는 은혜의 눈을 피해 거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복도에 걸린 벽시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다.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손목시계를 꺼냈다. 이 손목시계는 은혜가 내게 선물한 것이 아닌, 예전 작업실 서랍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해 숨겨둔 구형 디지털시계였다.
현재 시각 14시 50분.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선명하게 반짝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복도의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벽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2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분의 차이.
단순히 시계가 느리게 가는 것일까? 아니다. 어제 낮에도, 그저께 낮에도 이 시계는 분명히 디지털시계와 정확히 일치하는 시간을 보여주었었다. 왜 지금에 와서야 3분의 오차가 생겨난 것일까.
나는 시계의 초침을 가만히 응시했다.
무음으로 회전하던 붉은 초침이 12의 자리에 도달하는 순간, 기묘한 현상이 발생했다.
초침이 정각 12에 멈춰 섰다.
그리고 1초, 2초, 3초…….
시간이 흐르는데도 초침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미세하게 뒤로 밀려났다. 마치 보이지 않는 강력한 자석에 이끌리듯, 12의 경계선 앞에서 덜덜 떨며 뒤로 3칸을 후퇴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3초의 교란 뒤에, 초침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째깍거리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것은 단순한 고장이 아니었다. 시계의 물리적인 메커니즘 자체를 왜곡하여, 특정 시간대에 진입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지연시키는 장치였다. 3분. 그 3분이라는 공백 동안 이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머릿속의 소설가적 직관이 빠르게 회로를 돌렸다.
은혜가 건넨 수칙서에는 '오후 3시의 초인종 선로 보수'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벽시계는 실제 시간보다 정확히 3분 늦게 가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 시간으로 오후 3시가 되는 순간, 이 벽시계는 2시 57분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만약 진짜 외부인이 오후 3시에 초인종을 누른다면, 나는 벽시계를 보고 '아직 3시가 되지 않았으니 이것은 환청이구나'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며 문을 열지 않게 된다. 은혜는 바로 이 3분의 시간 왜곡을 이용해, 실제 외부의 자극을 내 뇌가 '환청'으로 인지하도록 정교한 덫을 놓은 것이다.
가스라이팅의 실체가 물리적인 도구의 모순을 통해 완전히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쳤다. 나를 미치광이로 만들려던 아내의 정교한 규칙이, 겨우 3분의 시차라는 사소한 틈새 때문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자책과 자기 의심으로 가득 찼던 내 영혼에 처음으로 서늘한 승리감이 깃들었다.
"알아챘어……."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내 한은혜가 설계한 이 완벽한 가상 낙원의 지배권을 뒤흔들 수 있는 첫 번째 물리적 단서. 이 벽시계의 프레임 내부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 시간 인지를 왜곡하고 교란하는 안테나, 혹은 주파수 발진기 같은 장치가 분명히 저 원목 틀 안에 박혀 있을 것이다.
나는 거실 한구석에서 벽시계를 매섭게 쏘아보며, 디지털시계의 초 단위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오후 2시 55분.
벽시계는 여전히 2시 52분을 가리키며 무음의 초침을 돌리고 있었다.
부엌 쪽에서 그릇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은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일랜드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내리쬐는 햇살이 너무도 평화로워, 방금 내가 발견한 진실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 손목의 디지털시계는 가차 없이 진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후 2시 56분.
그리고 2시 57분.
마침내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14시 57분을 가리켰다. 벽시계의 기준대로라면 아직 3시가 되려면 6분이 더 남은 시점이었다.
바로 그 순간, 벽시계의 초침이 다시 한 번 12의 자리에 걸려 멈칫거리며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시계 바늘이 기괴하게 덜덜 떨리며 멈추려는 찰나였다.
띵- 동-.
고요를 찢어발기듯, 현관문 밖에서 둔탁하고 거친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순한 전자음이 아니었다. 무언가 쇠파이프 같은 단단한 물체로 방화문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듯한, 귀를 찢는 물리적 타격음이 초인종 소리와 뒤섞여 거실을 뒤흔들었다.
쿵! 쿵! 쿵!
"정우현 씨! 안에 있는 거 다 압니다! 당장 문 열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는 거친 남성의 묵직한 고함이 문틈을 타고 밀려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현관을 향해 발을 내딛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부엌에 있던 은혜가 언제 다가왔는지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녀의 얼굴에서 상냥한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오직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고 무감각한 시선만이 나를 꿰뚫고 있었다.
"우현 씨……."
은혜가 내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가녀린 체구에서 나온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완력이었다.
"수칙 2호…… 기억하죠? 3시의 초인종은…… 환청이에요. 절대…… 흔들리면 안 돼요."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지직거리며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현관 너머의 거친 타격음은 한층 더 포악해지고 있었다.
실제 시간 오후 2시 57분.
나는 은혜의 차가운 눈동자와, 광포하게 흔들리는 현관문 사이에서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