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침대 시트의 주름은 언제나 완벽한 일직선을 그린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내 시야를 가장 먼저 채우는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팽팽하게 당겨진 흰색 사면체다. 먼지 한 톨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완벽하게 정돈된 방 안의 공기는 차갑고 건조하다.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소독약 냄새와 라벤더 향의 기묘한 조화. 그것이 이 집, 포레스트 힐 402호의 첫인상이자 매일 반복되는 시작이다.

귓가를 파고드는 것은 규칙적인 쇠붙이의 마찰음뿐이다.

째깍. 째깍. 째깍.

거실 복도 끝에 걸린 시계가 공기를 균등하게 잘라내는 소리다. 나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관자놀이 부근에서 미세한 통증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뒤통수를 무거운 둔기로 지그시 누르는 것 같은 둔탁한 압박감. 손가락 끝을 가볍게 쥐었다 펴 보았으나, 내 손가락이 아닌 타인의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것처럼 감각이 무디고 멀었다.

협탁 위를 보았다.

어김없이 그곳에는 빳빳하게 인쇄된 에이포 용지 한 장이 놓여 있다. 아내 한은혜가 매일 아침 남편인 나를 위해 준비해 두는 미니멀한 서식의 행동 규범, 이른바 '생활 수칙 가이드'다. 검은색 잉크로 정갈하게 인쇄된 문장들이 내 시선을 갈고리처럼 꿰어 올렸다.

[ 1. 아침 식사 전 제공되는 커피는 무조건 은빛 잔에 마셔라. 세라믹 잔이나 유리는 온도를 유지하지 못해 위벽에 자극을 준다. ]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차오르는 기묘한 불쾌감이 혀를 적셨다.

이상한 일이다. 평범한 가사 수칙일 뿐인데, 왜 이 문장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옥죄어오는 것일까. 머릿속에서 ‘만약 은빛 잔이 아닌 다른 잔에 마신다면?’이라는 사소한 의문이 고개를 들자마자, 갑자기 귓속에서 고주파의 이명이 삐 소리를 내며 고막을 찔렀다.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움이 명치끝에서부터 솟구쳤다.

스스로의 감각을 의심하는 병적인 불신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내 기억을 믿지 못한다. 3년 전의 화재 사고 이후, 내 뇌는 불완전한 파편들로 가득 찬 고장 난 서랍장이 되었다. 아내는 늘 내가 기억의 왜곡을 겪고 있다고 상냥하게 속삭였고, 나는 그 속삭임에 기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이 수칙은 내게 유일한 이정표이자 족쇄였다.

발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우현 씨, 일어났어요?"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등지고 은혜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다. 부드러운 실크 슬리퍼 바닥이 대리석 타일에 닿는 마찰음조차 철저히 지워진 것처럼, 소리 없는 그림자가 다가왔다. 상냥한 미소를 지은 아내의 손에는 은빛으로 번쩍이는 스테인리스 잔이 들려 있었다.

"오늘도 머리가 무겁나요?"

은혜의 목소리는 고요한 호수 위에 던져진 부드러운 낙엽 같았다. 그녀는 침대 가에 살포시 걸터앉았다. 그녀가 다가올수록 라벤더 향취 뒤에 숨은 차가운 소독약 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했다.

"조금…… 관자놀이가 찌르는 것 같아."

내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말 한마디를 뱉는 것조차 머뭇거림이 묻어났다. 내 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럴 줄 알았어요. 도진 씨가 처방해 준 약을 잘 챙겨 먹어도, 날씨가 흐린 날에는 늘 이렇더라고요."

은혜는 내 이마에 차가운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마치 얼음 조각 같았지만, 동시에 기묘한 안도감을 선사했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 묵직한 은빛 잔을 내밀었다. 잔 표면에 맺힌 미세한 물방울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어서 마셔요. 우현 씨를 위해 특별히 내린 캐러멜 향 커피예요. 따뜻할 때 마셔야 위가 보호돼요. 수칙 기억하죠?"

그녀의 매혹적인 눈빛이 내 눈동자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이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나는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손을 뻗어 은빛 잔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금속의 차가움은 비정상적이었다. 뜨거운 커피가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잔의 외벽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치 내부의 열기를 철저히 차단하고 가두어 둔 것처럼.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자, 달콤하고 진득한 캐러멜 향이 코를 찔렀다. 하지만 그것을 한 모금 삼키는 순간, 혀끝을 마비시키는 묘한 떫은맛과 비릿한 금속 향이 목구멍을 긁고 내려갔다.

"꿀꺽."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은혜는 그 모습을 아주 집요하게, 단 한 방울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내가 잔을 비우자마자, 그녀의 입꼬리가 완벽한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착하네요, 우현 씨."

은혜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이 뺨의 피부를 쓸고 지나갈 때마다, 뇌 속의 긴장감이 마법처럼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상냥한 손길은 나를 안심시키는 가장 강력한 마취제였다. 나는 그녀의 통제 아래 있을 때 비로소 안전하다는 착각에 깊이 빠져들었다.

"당신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돼요. 그러니까 내 말만 들어요, 알았죠?"

그녀의 속삭임이 고막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안의 의심은 그녀의 완벽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 아래로 고요히 침잠해 들어갔다. 그 순간만큼은 이 가상 낙원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요새처럼 느껴졌다.

***

포레스트 힐 402호의 밤은 낮보다 더 인공적이다.

중앙 제어 조명 시스템은 오후 8시가 되면 거실의 불빛을 어스름한 호박색으로 고정시킨다. 창밖의 평화로운 숲길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고, 오직 특수 방음벽이 걸러내지 못한 미세한 이조음만이 집 안을 채운다.

째깍. 째깍.

거실 복도의 벽시계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소파에 앉아 가만히 시계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이상한 일이다. 시계의 초침은 분명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정각이 다가올 때마다 기묘한 틈새가 발생했다. 분침이 12를 가리키기 직전, 11시 57분에서 초침 소리가 멈췄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완벽한 정적의 3분.

그리고 시계는 정각의 종소리 대신, 3분을 건너뛰어 바로 12시 3분을 가리키며 다시 "째깍"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시간의 왜곡. 마치 누군가 내 세계의 시간 축을 미세하게 뒤로 밀어내고 있는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시계 프레임 안에 무언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내 신경증적인 의심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나는 내 감각을 믿을 수 없으니까.

자정이 지나자, 내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몽유병 환자처럼 서재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머릿속은 안개가 가득 낀 것처럼 뿌옇고 혼몽했다. 하지만 손가락만은 기이할 정도로 명확한 방향성을 띠고 움직였다. 나는 전원을 켠 노트북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타다다닥. 탁. 타닥.

내 의식이 제어하지 않는 타이핑이 시작되었다.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추듯 미끄러졌고, 화면 위로 검은 글자들이 빠르게 새겨졌다. 나는 내 손이 움직이는 것을 그저 한 걸음 물러선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은 매일 밤 반복되는 나의 무의식적 집필 활동, 즉 '잔혹한 원고'의 창작 과정이었다.

약 한 시간의 타이핑이 끝나고, 프린터가 거친 소음을 내며 종이를 뱉어냈다.

"위잉- 척."

종이가 트레이에 떨어지는 순간, 내 머릿속을 강타하는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아윽……!"

우뇌 전체를 관통하는 강력한 과전류. 뇌세포가 하나하나 타들어가는 듯한 극심한 열감과 함께, 머릿속의 서랍 하나가 통째로 불타 없어지는 감각이 찾아왔다. 이번에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 아아, 대학 시절 은혜와 처음 만났던 미술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공간의 푸른 빛깔과 캔버스의 질감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져 하얀 무(無)로 돌아갔다. 진실을 인지한 대가로 치러야 하는 자기 소멸의 리스크. 내 가장 소중한 기억이 또 하나 영구히 사라진 것이다.

눈물이 핑 도는 두통을 참으며, 나는 인쇄된 원고를 손에 쥐었다.

종이에서 풍기는 뜨거운 토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원고에 적힌 문장들은 지나칠 정도로 건조하고 냉혹했다. 그것은 아내의 상냥한 가스라이팅을 우회하여, 오직 현실의 물리적 실체만을 기록하는 내 무의식의 고발장이었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원고의 첫 줄을 읽어 내려갔다.

[ 그녀가 건넨 은빛 잔은 염화칼륨 희석액이다. 금속 잔의 이중 격벽은 약물의 미세한 화학적 발열을 감추기 위한 단열 장치에 불과하다. 매일 아침 주입되는 고농도의 칼륨 이온은 그의 심장 박동을 미세하게 교란하고, 전두엽의 인지 기능을 저하시켜 규칙에 순응하게 만든다. ]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다디단 일상의 낙원이, 단 한 줄의 건조한 문장에 의해 단숨에 찢겨 나갔다.

은혜가 매일 아침 내밀던 완벽한 미소. 나를 안심시키던 부드러운 손길. 내 위벽을 보호하기 위해 은빛 잔에 마셔야 한다던 그 상냥한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나를 영원히 이 유리 감옥에 가두기 위한 정교한 마취제이자 독약이었다는 진실이 날것 그대로 드러났다.

"허억…… 억……."

숨이 가빠왔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아침에 마신 캐러멜 향 커피의 비릿한 금속 맛이 다시 혀끝에서 맴도는 듯했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내가 설계한 완벽한 요새가, 무의식이 폭로한 차가운 물리적 사실 앞에서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원고지의 맨 아랫부분, 글자가 인쇄되지 않은 하얀 여백에 기묘한 잉크 눌림 자국이 보였다.

눈으로는 쉽게 식별하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무언가 날카로운 칼날로 종이를 깊게 내리누른 듯한 가늘고 뾰족한 칼자국 모양의 자국이었다.

나는 홀린 듯 원고지를 들어 서재 스탠드의 붉은 전등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그 순간, 종이를 통과한 붉은 불빛이 잉크 눌림 자국을 따라 기이하게 굴절되기 시작했다. 굴절된 빛은 단순한 잔상을 넘어, 서재의 사면 벽면과 천장 전체로 무섭게 번져 나갔다.

붉은 칼날 같은 형상의 빛들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마치 온 방안이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는 듯한 압도적인 시각적 환영이 내 시야를 지배했다. 3년 전 화재 사고의 끔찍한 탄내와 함께, 벽면 전체가 붉은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착각이 내 숨통을 조여 왔다.

나는 원고지를 쥔 채, 불타오르는 방 한가운데에서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얼어붙었다.

붉은 화염은 뜨겁지 않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열기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비현실적인 환영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제 불길이 아니었다. 스탠드의 붉은 할로겐 불빛이 종이의 짓눌린 칼자국 틈새를 통과해 벽면에 투사되어 만들어낸 정교한 착시일 뿐이었다. 그리고 내 손상된 뇌가 그 붉은 실선들을 목격하는 순간, 3년 전의 끔찍한 기억을 제멋대로 덧씌워 화재의 환각을 완성해 낸 것이다.

손바닥에 고인 식은땀이 원고지 모서리를 눅눅하게 적셨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부서져라 두드려 댔고, 호흡은 잘게 부서져 목구멍을 거칠게 긁었다.

"하아, 하아……."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원고지를 평평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종이 아랫부분의 칼자국을 다시 응시했다. 그것은 단순한 인쇄 오류가 아니었다. 프린터 헤드가 만들어낼 수 없는, 무겁고 날카로운 무언가로 종이를 꾹 눌러 새긴 듯한 물리적인 압착 흔적이었다.

문득 기묘한 위화감이 엄습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책상 표면을 유심히 살폈다. 짙은 고동색 마호가니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 상판. 그 매끄러운 광택 위로, 원고지의 칼자국과 정확히 일치하는 미세한 가로 홈이 파여 있었다. 아주 정교하게 깎여 수직으로 내려앉은, 두께 1밀리미터 남짓한 홈이었다.

홀린 듯 손가락을 뻗어 그 홈을 더듬었다.

손끝이 차가운 나뭇결을 따라 미끄러지다가, 홈의 가장 깊은 안쪽에 걸렸다. 손가락 끝에 약간의 힘을 주어 그 홈의 끝부분을 지그시 누르자, 책상 하단부에서 나직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툭.

서랍 안쪽 깊은 곳에서 무언가 걸쇠가 풀리는 소리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 우측의 가장 깊은 서랍을 끝까지 잡아당겼다. 서랍은 평소처럼 부드럽게 열렸지만, 끝까지 열린 서랍의 이중 바닥면에 숨겨져 있던 얇은 비밀 칸이 비스듬히 솟아올랐다. 그 틈새 사이로 먼지 쌓인 플라스틱 케이스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환자 기록용 차트 파일이었다.

표지에는 내 이름이 정갈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 환자명: 정우현 / 세부 사항: 마인드 아키텍처 인지 교정 프로세스 ].

첫 장을 넘기려던 찰나, 서재 안의 모든 공기가 일시에 얼어붙는 듯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스르륵.

문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미세한 마찰음. 부드러운 실크 슬리퍼가 대리석 바닥을 쓸며 다가오는 소리였다. 아내의 걸음걸이였다. 분명 자정을 넘긴 이 시간에는 침실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어야 할 그녀가, 이 어둡고 고요한 복도를 지나 서재로 향하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12분.

아침 수칙 가이드의 뒤편에 아주 작은 글씨로 적혀 있던 경고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 *. 자정 이후 서재의 문은 반드시 안에서 잠글 것. 밤의 어둠 속에서 문을 두드리는 존재는 당신이 아는 사람이 아니다. ]

침을 삼키는 소리가 서재 안에서 기괴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내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비밀 칸에서 꺼낸 차트 파일을 움켜쥐었다. 이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만약 은혜가 내가 진실에 접근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면, 내 뇌 신경망은 또다시 주치의 김도진의 손에 의해 강제로 재구성될 터였다. 이번에 지워질 기억이 내 이름일지, 아니면 내 존재 자체일지는 알 수 없었다.

달칵.

서재의 청동 도어록 손잡이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철컥거리는 금속의 마찰음이 밀폐된 공간을 잔인하게 난도질했다. 문은 다행히 안쪽에서 잠겨 있었기에 열리지 않았지만, 손잡이는 끈질기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문틀을 흔들어 댔다.

"우현 씨……."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은혜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평소의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톤이 아니었다. 어딘가 테이프가 늘어진 것처럼 미세하게 늘어지고,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처럼 지직거리는 기분 나쁜 음색이었다.

"아직 안 자요……? 은빛 잔은…… 깨끗하게 비웠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문틈의 미세한 틈새를 타고 들어와 내 고막을 진득하게 적셨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책상 뒤로 몸을 숨겼다. 손톱이 차트 표지를 파고들 만큼 세게 쥐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책상 한구석, 수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울린 적 없던 낡은 아날로그 유선 전화기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울리기 시작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정적을 깨부수는 날카로운 금속성 기계음이 서재 안을 가득 메웠다. 문고리를 흔들던 기척이 찰나의 순간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울려 대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이 집의 유선 전화선은 은혜가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 진작에 끊어 놓았다고 했던 라인이었다.

전화기는 끊어질 기색 없이 집요하게 울려 댔다.

나는 홀린 듯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귀에 가져다 댄 수화기 너머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극심한 정전기 노이즈가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오빠……! 내 말 잘 들어. 지금 절대 문 열어주면 안 돼.

여동생, 정민아의 목소리였다. 잔뜩 겁에 질려 덜덜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다급하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 내가 지금 해킹한 홈 카메라 화면으로 안방 보고 있어. 언니는 지금 안방 침대에서 완전히 마취된 채 잠들어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오빠 서재 문고리 잡고 흔드는 거, 언니가 아니야! 절대 문 열지 마……!

뚝.

전화가 끊겼다.

동시에, 내 등 뒤에 있는 서재 문고리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칠고 난폭하게 철컥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문틈의 이가 맞지 않는 틈새가 미친 듯이 흔들리며 가느다란 틈을 벌렸다. 벌어진 문틈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서재 안의 붉은 불빛을 가로막으며 길게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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