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석의 가죽 재킷 주머니에서 나온 사진들이 내 시야를 가로막았다.
3년 전, 시꺼멓게 그을린 단독 가옥 전소 현장의 정밀 부검 사진들. 누렇게 바랜 종이 가장자리마다 묻은 그을음과 굳어버린 핏자국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둔탁하게 반사되었다. 사진 속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숯처럼 타들어 가 있었고, 그 비정상적인 뒤틀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허파 깊은 곳에 가득한 탄내를 몰고 오는 듯했다.
"이걸 보고도 네가 무죄라고 우길 셈이냐, 정우현?"
태석의 거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하지만 내 시선은 그의 손에 들린 사진이 아닌, 내 왼쪽 손목으로 떨어졌다. 단정한 회색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리자, 살을 파고들 듯 조여 있는 차갑고 둔중한 백금 팔찌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혜가 가리킨 바로 그 팔찌였다. 금속 특유의 비릿하고 차가운 냄새가 손목을 타고 뇌수까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방화 사건의 밤, 불을 지른 진짜 범인의 손목에도... 똑같은 모양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답니다. 바로 지금, 당신이 차고 있는 그것처럼요."
은혜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서재의 밀폐된 공기 사이를 기어 다녔다.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과는 대조적으로, 입가에 걸린 완벽한 미소는 기괴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정해진 연극의 클라이맥스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대사를 뱉어내는 배우처럼.
심장이 늑골을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머릿속에서 이명이 날카롭게 솟구쳤다.
내가 범인이라고? 3년 전, 그 불길을 일으키고 사람을 태워 죽인 괴물이 바로 나였다는 말인가? 내 무의식이 거부하고 아내가 숨겨준 진실이 고작 그런 추악한 살인마의 정체였단 말인가.
머릿속에서 세차게 진동하는 자아 붕괴의 위기 속에서, 나는 턱을 악물었다. 쓰러지려는 이성의 기둥을 억지로 붙잡았다.
'아니야. 속지 마라, 정우현.'
나는 은혜가 설계한 가상 낙원의 규칙들을 부수며 여기까지 왔다. 그녀의 모든 말과 행동은 정교하게 짜인 통제 기제였다. 만약 내가 진짜 방화범이라면, 왜 그녀는 나를 경찰에 넘기지 않고 이토록 막대한 비용과 공을 들여 포레스트 힐 402호라는 거대한 유리 감옥에 가두어 두었는가? 왜 내 기억을 지우고, 왜 매일 아침 수칙을 쥐여주며 나를 보호하려 했는가?
논리의 모순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태석이 쥐고 있는 부검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진 속 시신의 왼쪽 어깨와 가슴 부위는 끔찍하게 소실되어 있었다. 불길 속에서 완전히 무너진 잔해에 짓눌린 흔적이었다.
그리고 내 눈은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은혜의 왼쪽 어깨로 향했다. 단정하고 우아한 실크 드레스가 그녀의 어깨 곡선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아래 숨겨진 일그러짐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밤마다 내 무의식이 타이핑했던 그 잔혹한 원고의 구절들이 뇌리에서 선명한 활자로 떠올랐다.
[...그녀의 왼쪽 어깨는 홀로 차가운 검정 잉크처럼 뭉개져 있었다. 피부가 녹아내려 굳어진 그 일그러진 골짜기에서는, 수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비릿하고 지린 탄내가 풍겼다. 그것은 가해자의 표식이 아닌,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누군가를 끄집어내기 위해 스스로를 불태운 자의 낙인이었다...]
"우현 씨... 내 말이 믿기지 않나요?"
은혜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손길이 내 뺨을 향해 뻗어왔다.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언제나처럼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단정한 실크 드레스의 깃을 움켜쥐었다.
"우현 씨!"
은혜의 완벽하던 미소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드레스의 왼쪽 어깨 부분을 거칠게 아래로 내리쳤다. 얇은 실크 천이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찢어지며 하얗게 드러나야 할 그녀의 살결이 허공에 노출되었다.
"이게...!"
태석이 권총을 쥔 채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드러난 은혜의 왼쪽 어깨는 참혹했다.
그것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다. 붉고 검게 뒤틀린 살덩이가 불규칙한 파도처럼 엉겨 붙어 있었고, 뼈의 윤곽마저 미세하게 변형시킨 거대한 화상의 흔적이었다. 마치 뜨거운 쇳물이 흘러내려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은 형상. 그 지독한 일그러짐을 마주하는 순간, 내 코끝으로 환각 같은 탄내가 들이닥쳤다. 원고에 기록되어 있던 바로 그 '지린 탄내'였다.
나는 그녀의 화상 자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은혜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 흉터의 방향을 봐."
나는 태석을 매섭게 노려보며 외쳤다.
"사진 속 시신은 불길 속에서 무너진 서까래를 똑바로 맞닥뜨렸어. 그래서 가슴과 안면 전체가 소실되었지. 하지만 은혜의 흉터는 왼쪽 어깨 뒤에서부터 앞쪽으로 굽어 들어가는 형태다. 이건... 누군가를 자기 품에 안고, 등 뒤에서 쏟아지는 불길과 잔해를 온몸으로 막아냈을 때만 생길 수 있는 흔적이야!"
태석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
"상관이 있지. 아주 아주 밀접한 상관이."
나는 은혜의 젖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는 내 손길을 피하지 못한 채, 찢어진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참혹한 흉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3년 전 그날 밤, 불길이 치솟던 그 단독주택 안에서, 내 여동생 민아가 진짜 공범에게 위협받고 있었어. 그리고 그 현장에 불을 지른 실체적 용의자는 내가 아니야."
내 머릿속에서 톱니바퀴들이 무서운 속도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잔혹한 원고의 텍스트들이, 가상 낙원의 수칙들이 가리키던 단 하나의 진실이 마침내 수면 위로 솟구쳤다.
"그 밤, 불을 지른 진짜 용의자는... 김도진이었어."
내 목소리가 서재 안을 무겁게 울렸다.
"그리고 나는 방화범이 아니라, 그 불길 속에서 민아와 은혜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구조자였던 거야."
은혜의 눈에서 마침내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려 화상 흉터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입가에 억지로 걸려 있던 완벽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깊은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한 인간의 얼굴만이 남았다.
"김도진은 민아를 인질로 삼아 나를 협박했고, 현장을 은폐하기 위해 불을 질렀어."
나는 내 왼쪽 손목의 백금 팔찌를 풀어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금속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청아하지만 쓸쓸한 소리를 냈다.
"이 팔찌는 내가 방화범이라는 증거가 아니야. 김도진이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채워둔 족쇄였지. 그리고 은혜, 당신은..."
나는 비로소 모든 맥락을 이해했다.
왜 그녀가 나에게 스스로를 '방화 살인마'로 인지하게 만드는 잔인한 규칙들을 강요했는지. 왜 주치의 김도진과 손을 잡고 내 뇌를 유린하는 마인드 아키텍처 시스템을 가동했는지.
"당신은 나를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김도진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숨기기 위해 이 연극을 시작한 거였어."
은혜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현 씨... 미안해요... 나는... 그 방법밖에는..."
"내가 스스로를 살인범이라 믿고 이 집안에 갇혀 지내야만, 김도진이 만족하고 나를 살려둘 테니까."
나는 은혜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실크 천 너머로 느껴지는 화상의 흉터는 더 이상 불길하고 기괴한 비밀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짊어진 숭고한 희생의 증거였고, 우리가 함께 통과해 온 지옥의 잔해였다.
"당신은 내 살인 기억을 환각 주입 방어막으로 안전 전치시킨 거야. 진짜 진실을 알게 된 내가 김도진에게 덤벼들다 죽는 것을 막으려고. 나를 이 가상 낙원에 가두어 서서히 말려 죽이려는 게 아니라, 그 미친 의사의 칼날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방패막이로 이 규칙들을 만든 거였어."
내 진중한 각성이 서재의 공기를 투명하게 정화했다. 나를 짓누르던 거대한 가스라이팅의 안개가 걷히고, 아내 한은혜는 나를 지배하던 구속자가 아닌, 나와 함께 사투를 벌여온 동조자로 내 곁에 정렬했다.
태석은 권총을 쥔 손을 완전히 내렸다. 그의 황망한 눈빛이 바닥에 떨어진 백금 팔찌와 은혜의 흉터를 번갈아 쫓았다.
"그럼... 김도진 그 새끼가... 진짜 범인이라는 건가?"
"그래. 이 모든 인지 제어 데이터와 마인드 아키텍처 임상 실험은 내 자아를 지우기 위한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3년 전 방화 살인의 진실을 영원히 묻어버리기 위한 김도진의 알리바이 설계도였어."
내가 말을 마친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지하 감금실 방향에서 무겁고 기괴한 타격음이 벽을 타고 올라왔다. 집안 전체의 스마트홈 시스템이 미친 듯이 경고음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붉은 비상등이 서재의 벽면을 피처럼 물들였다.
"무슨 소리지?"
태석이 본능적으로 권총을 다시 치켜들며 문쪽을 바라보았다.
복도 끝, 어두운 지하실 계단 입구에서 철문이 우그러지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려왔다. 이윽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실 문이 바깥쪽으로 거칠게 튕겨 나갔다.
"정... 우... 현..."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음침한 목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지하 감금실에서 자력으로 결박을 풀고 부수고 나온 김도진이었다. 그의 양손은 피투성이였고, 안경은 깨져 한쪽 알이 나간 채였다. 그의 눈동자는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도진은 비틀거리며 복도로 기어 나왔다. 그의 한쪽 손에는 검은색 특수 방수 가방이 들려 있었다.
"너희들이... 내 평생의 연구를... 내 아키텍처를 망쳐?"
도진이 미친 듯이 웃으며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은색 알루미늄 팩으로 포장된 액화 가스 용기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포레스트 힐의 공조 시스템을 장악하기 위해 그가 준비해 두었던, 인체에 치명적인 불법 유해 마취 가스였다.
"다 같이 죽는 거야. 이 낙원과 함께!"
도진이 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구두굽으로 가스 봉지들을 마구 난타하기 시작했다.
퍽! 퍽!
가죽 봉투가 찢어지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투명하고 기이한 아지랑이를 뿜어내는 백색 가스가 무서운 속도로 복도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가스가 닿는 곳마다 미세한 화학적 타는 냄새가 진동하며, 우리의 시야를 가차 없이 차단해 들어왔다.
치익―
가방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가스가 카펫 바닥을 적시며 무서운 속도로 솟구쳤다. 차가운 연기가 발목을 감싸 쥐는 순간, 허파 깊은 곳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들이닥쳤다.
"커흑! 으그극..."
태석이 목을 움켜쥐며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그가 쥐고 있던 권총이 바닥으로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냈다. 강인하던 형사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빠르게 풀려갔다.
나는 은혜의 손목을 잡아채 내 등 뒤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얇은 셔츠 손잡이를 쥔 내 손가락바닥에 축축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어깨의 흉터를 가린 은혜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진동하는 것이 등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현 씨... 피해야... 해요... 이건..."
은혜가 내 등을 밀어내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손엔 이미 힘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가스에 섞인 마취 성분이 호흡기를 통해 침투해 들어오며 우리의 대뇌 신경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머릿속이 핑 글 돌며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삐이― 하는 고주파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이 감각은 익숙했다. 매일 아침 알약을 삼켰을 때, 혹은 아내가 건넨 음료를 마셨을 때 겪었던 자아 소멸의 전조 증상이었다.
"하하... 아하하핫!"
복도 저편에서 도진이 깨진 안경 너머로 피눈물을 흘리며 웃어댔다. 그의 발밑에서 짓겨진 가스 팩들이 쉭쉭 소리를 내며 마지막 가스를 토해내고 있었다.
"결국... 다 같이... 지우는 거야... 이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기억들을...!"
도진이 품틀거리며 품 안에서 소형 리모컨을 꺼내 들었다. 붉은색 LED 등이 깜빡이는 조잡한 기기였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거칠게 내리눌렀다.
철컥! 투두둑!
서재의 두꺼운 방음창 너머로 둔중한 기계음이 울렸다. 집안 전체의 창문 위에서 거무죽죽한 강철 셔츠들이 일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외부의 빛을 완전히 차단하는 방범용 금속 패널들이었다. 순식간에 포레스트 힐 402호는 한 줌의 빛도, 한 모금의 공기도 통하지 않는 거대한 강철 관으로 변모했다.
"도진아... 그만해..."
은혜가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하듯 속삭였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진의 광기는 이미 멈출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그는 벽면의 중앙 스마트 제어 장치를 향해 기어갔다. 그의 피 묻은 손가락이 터치스크린을 마구 뭉개자, 화면에 '강제 환기 차단'과 '보일러 과열 가동'이라는 적색 경고등이 동시에 점멸했다.
웅― 하는 불길한 진동음이 바닥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쳤다. 지하실의 보일러가 비정상적인 압력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번쩍이는 활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매일 밤 무의식 속에서 써 내려갔던 [잔혹한 원고]의 마지막 페이지, 아직 내가 해석하지 못했던 그 기괴한 문장들이 뇌 우뇌 신경망을 타고 강한 전류처럼 흘렀다.
[...하얀 안개는 잠을 부르는 안식이 아니다. 그것은 작은 불씨 하나에도 스스로의 몸을 불태우는, 보이지 않는 연료다. 낙원이 불타오를 때, 문은 안에서 열리지 않으리라...]
"이 가스는..."
나는 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구멍이 바짝 말라붙어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단순히 잠을 재우는 게... 아니야..."
"눈치가... 빠르네, 정우현 소설가님."
도진이 제어 장치 옆에 달린 비상용 가스차단 밸브를 손으로 비틀어 꺾어버렸다. 쇠파이프가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이건 인화성이 극도로 높은... 특수 마취제야. 보일러의 열기가 이 방 안의 온도와 만나는 순간..."
그가 주머니에서 낡은 가스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찰칵, 하고 가벼운 마찰음이 밀폐된 공간을 두드렸다. 노란 불꽃이 그의 광기 어린 얼굴을 기괴하게 비추었다.
백색 가스가 불꽃을 향해 자석처럼 끌려가듯 미세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가스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본 태석이 바닥을 기며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의 손귀에 들어간 힘은 이미 죽어가는 짐승의 것에 불과했다.
"막아... 저 새끼... 불 붙이면... 다 죽어..."
머리가 터질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진실을 인지한 대가로 내 뇌신경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따뜻했던 손길, 어린 시절 놀이터의 풍경 같은 소중한 기억들의 파편이 머릿속에서 하얗게 바래지며 영구히 소멸하는 감각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나를 구하기 위해 평생을 지옥 같은 규칙 속에 살아야 했던 은혜의 삶도, 내 진짜 정체성도 모두 이 낙원과 함께 잿더미로 변할 터였다.
나는 이가 맞물리지 않아 덜덜 떨리는 턱을 힘겹게 악물었다. 그리고 은혜를 부축한 채, 바닥에 떨어진 태석의 권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도진이 라이터를 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자... 3년 전의 그 아름다운 불꽃을... 다시 한 번 감상해 보자고."
탁. 작은 고철 소리와 함께, 붉은 불씨가 백색 가스의 파도 위로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