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감금실을 자력으로 부수고 복도로 가쁘게 탈출해 기어 나온 도진이 가방에 든 불법 유해 마취 가스 봉지를 마구 난타해 퍼뜨렸다. 비닐이 찢어지는 파열음과 함께 기괴하도록 투명한 백색 가스가 지하 복도 전체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자... 3년 전의 그 아름다운 불꽃을... 다시 한 번 감상해 보자고."
도진의 목소리가 갈라진 틈새로 흘러나왔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튕겨 나간 작은 불씨가 백색 가스의 표면 위로 툭 떨어지는 찰나, 공기가 날카롭게 팽창했다.
화르륵, 하는 가벼운 폭발음이 귓전을 때렸다. 불꽃은 산소를 찾아 급격히 번지려 했으나, 복도를 가득 채운 가스의 밀도가 지나치게 높아 오히려 산소의 공급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기묘한 억제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의 지체에 불과했다. 밀폐된 지하 복도의 산소가 희박해지는 것과 동시에, 보일러실의 고온 압력이 벽면을 타고 올라와 실내 온도를 가파르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코끝을 찌르는 시큼하고도 달콤한 냄새가 비강을 마비시켰다. 마인드 아키텍처 실험을 위해 도진이 조제했다던 특수 유해 마취 가스였다. 한 모금 흡입할 때마다 뇌의 전두엽이 가라앉고 오감이 정전되듯 꺼져가는 감각이 밀려왔다.
나는 거칠게 기침을 토해내며 주머니 속을 더듬었다.
손끝에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 캔이 걸렸다. 서재의 책장 뒤쪽, 아내 은혜가 나 몰래 숨겨두었던 비상 구호용 장비였다. 아내가 설계한 행동 수칙 제7조에는 '서재 세 번째 칸의 빈 상자에는 손을 대지 말 것'이라는 문항이 있었다. 나는 그 규칙의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역으로 해독해 냈었다. 은혜는 내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거나 이 가상 낙원이 붕괴하는 최악의 순간을 대비해, 가장 안전하고 은밀한 장소에 생존 도구를 숨겨두었던 것이다.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간이 호흡용 초소형 산소 캔 두 개와 고밀도 정전 필터가 장착된 실리콘 마스크 세 개였다.
"흡입해... 어서!"
나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형사 강태석의 얼굴에 마스크를 강제로 씌웠다. 그리고 호스 끝의 밸브를 비틀어 기화된 산소를 공급했다. 태석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굳어 있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 이게 무슨..."
태석이 웅얼거리는 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남은 마스크 하나를 낚아채 은혜의 얼굴로 가져갔다. 은혜는 산소마스크를 거부하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맑고 깊은 눈동자너머로 무거운 체념이 일렁이고 있었다.
"우현 씨... 난 괜찮아요. 이미 늦었어요. 당신이라도 여기서..."
"아니, 같이 나가."
나는 은혜의 턱을 단단히 붙잡고 마스크를 밀착시켰다. 끈을 머리 뒤로 단단히 조이자, 그녀의 얇은 입술 사이로 하얀 산소 기포가 부드럽게 흘러 들어갔다.
마스크를 씌우는 과정에서 내 손끝이 은혜의 얇은 셔츠 깃을 스쳤다. 흘러내린 옷가지 사이로 가려져 있던 그녀의 왼쪽 어깨가 완전히 드러났다.
그 순간, 내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의 왼쪽 어깨부터 등덜미까지, 마치 기괴한 검은 잉크가 뭉개진 것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진 화상 흉터가 길게 뻗어 있었다.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붉고 거무스름한 살점이 엉겨 붙어 있는, 참혹한 불의 흔적이었다. 동시에 내 코끝으로 환청 같은 탄내가 훅 끼쳤다. 지린내와 함께 살점이 타들어 가던 3년 전 그날 밤의 냄새가 뇌하수체를 직접 타격했다.
머릿속에서 번쩍이는 우뇌의 과전류가 나를 덮쳤다.
아아악!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극심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뇌세포가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는 통증과 함께, 내 기억의 한 자락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대학 시절 처음으로 샀던 낡은 자전거의 색깔, 그리고 은혜와 처음 만났던 미술관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져 영구히 소멸했다.
하지만 고통의 심연 속에서,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잔혹한 원고]의 한 구절. '어깨 위의 검은 낙인은 구원자의 표식이다. 지옥의 불길 속에서 스스로를 던져 그를 끄집어낸 손길의 증거.'
3년 전 화재 사건의 진짜 범인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방화범이 아니었다. 불길 속에 갇혀 죽어가던 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무릅쓰고 불속으로 뛰어들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아내, 한 은혜였다.
그녀는 내가 살인자라는 죄책감에 미쳐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도진의 불법 임상 실험을 빌려 이 정교한 가상 낙원을 설계했던 것이다. 나를 통제하고, 나에게 매일 밤 규칙을 주입하며, 약물을 먹여서라도 나를 보호하려 했던 은혜의 모든 기괴한 행동들이 단 하나의 진실로 수렴했다.
그것은 지독하고도 비틀린 사랑의 형태였다.
나는 이가 맞물리지 않아 떨리는 턱을 악물고 은혜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왼쪽 어깨 흉터에 내 뺨이 닿았다. 차가운 살갗 아래로 그녀의 가녀린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우리가 설계한 비극은... 오늘 여기서 진짜 끝내."
내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은혜의 눈가에서 마침내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려 내 뺨을 적셨다.
"우현 씨... 하지만 도진이는... 저 사람은 우리를 보내주지 않을 거예요. 이 집의 모든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어요."
은혜의 속삭임은 절망에 차 있었다.
지하 복도 저편에서 도진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미 가스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면서도, 손에 쥔 라이터의 불꽃을 켜고 끄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우현! 너희는 여기서 못 나가! 이 포레스트 힐은 내 완벽한 실험실이자, 너희들의 거대한 관이다! 환풍기를 막았으니 가스는 계속해서 차오를 테고, 곧 불꽃이 모든 것을 삼킬 거다!"
도진의 말대로였다. 벽면에 장착된 환기구에서는 아무런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부의 공기는 완전히 정체되어 있었고, 가스의 농도는 임계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도진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 집은 완벽한 밀폐 기지이자 스마트홈 시스템으로 제어되는 요새다. 그리고 나는 지난 며칠 동안, 아내가 준 수칙의 모순점을 역추적하며 이 집의 중앙 제어 장치인 '마스터 패드'의 보안 코드를 완전히 해킹해 둔 상태였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태석의 재킷 주머니에서 스마트패드를 꺼내 들었다. 화면의 푸른 빛이 내 얼굴을 차갑게 비추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미끄러졌다.
"포레스트 힐의 환기 시스템은 단방향 제어가 아니야."
나는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은혜가 나를 감시하고 공기를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환풍 전동 펜... 그것의 모터는 역회전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내 손끝이 마스터 패드의 공조 시스템 설정창에 닿았다. 관리자 권한으로 접속하자, 시스템의 코드가 나열되었다. 나는 환풍기 제어 모드를 '배출'이 아닌 '음압 급기(Negative Pressure Supply)'로 강제 변경했다. 그리고 전동 펜의 회전 속도를 최대치인 150%로 가속 설정했다.
잉이이잉—!
벽면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하 통로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어... 어떻게... 시스템 권한은 나한테만 있을 텐데!"
도진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서렸다.
나는 마스터 패드의 엔터 키를 강하게 눌렀다.
"지금부터 이 방공호의 규칙을 새로 쓴다."
순간, 천장에 달린 거대한 환풍 전동 펜이 굉음을 내며 역회전하기 시작했다. 외부의 차가운 공기가 엄청난 압력으로 실내로 빨려 들어왔다. 역회전하는 바람은 방 안의 공기 흐름을 기하학적으로 뒤틀어버렸다.
강력한 급기 압력으로 인해 발생한 음압은 실내에 고여 있던 하얀 마취 가스를 한곳으로 몰아붙였다. 바람의 방향은 정확히 도진이 서 있는 복도 끝 통로를 향하고 있었다.
"끄악! 끄흡!"
사방으로 흩어지던 투명한 유독 가스가 급격한 기류를 타고 도진의 안면을 향해 직분사되었다. 가스의 파도에 정면으로 직격당한 도진이 허공을 휘저으며 비틀거렸다.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고농도의 유독 가스를 들이마신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풀리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는... 내가 만든... 내 완벽한..."
도진은 말을 맺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며 발버둥 쳤다. 가스 중독으로 인한 급격한 호흡 곤란과 근육 경련이 그의 온몸을 덮친 것이다.
포레스트 힐이라는 불법 밀폐 기지는, 이제 그들에게 최고의 안전 방공호가 되었고, 주치의 김도진에게는 스스로 판 무덤이 되었다. 가스는 오직 도진이 서 있는 통로 구역에만 집중적으로 몰렸고, 나와 은혜, 태석이 있는 구역은 역회전하는 깨끗한 외부 공기로 가득 차올랐다.
"가자, 은혜야."
나는 은혜를 부축해 일으켰다. 태석 역시 벽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도진을 향해 권총을 겨누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가스 중독으로 완전히 이성을 잃고 발작하던 도진이 비틀거리며 복도 벽면에 설치된 고전압 배전반을 붙잡았다. 그의 젖은 손이 전류가 흐르는 단자에 닿는 순간, 파지직하는 고전압 스파크가 튀었다.
합선이었다.
배전반에서 터져 나온 붉은 불꽃이, 아직 도진의 주변에 밀집해 있던 유독 가스의 코어에 정확히 맞닿았다.
쿠우우웅!
지하 통로 전체를 뒤흔드는 맹렬한 파열음과 함께, 붉은 화염이 도진의 몸을 집어삼키며 하우스 전체로 무섭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화염은 순식간에 복도의 산소를 집어삼키며 거대한 혀처럼 일렁였다.
배전반에서 시작된 전류의 폭발은 벽면을 타고 흐르던 미세한 가스 입자들을 도화선 삼아 천장으로 치솟았다. 쾅,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천장의 마감재가 녹아내리며 불타는 잔해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열기가 얼굴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피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으나, 내 감각은 기묘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현 씨...!"
은혜가 내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설계한 이 완벽한 유리 감옥이, 그리고 그 안에서 간신히 붙잡아 두고 있던 내 왜곡된 평온이 이 불길 속에서 영구히 재가 되어 사라질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철컥. 철컥.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불길한 기계음이 울렸다. 지하실의 방화문 상단에 설치된 전자식 도어락이 붉은빛을 토해내며 강제로 잠겼다. 마스터 패드의 화면에 굵은 적색 경고등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Warning: 화재 감지로 인한 구역 폐쇄. 시스템 락다운(Lockdown) 기동.]
"이런... 빌어먹을!"
태석이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방화문으로 달려갔다. 그는 마스크 너머로 연기를 뱉어내며 철제 문손잡이를 미친 듯이 돌려댔으나, 두꺼운 철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권총 손잡이로 잠금장치를 내리쳐 보아도 차가운 금속음만 지하실을 울릴 뿐이었다.
"안 열려...! 야, 정우현! 이거 안 열린다고!"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박혀 있던 [잔혹한 원고]의 마지막 구절이 다시금 붉은 활자가 되어 날뛰었다.
[...낙원이 불타오를 때, 문은 안에서 열리지 않으리라...]
도진이 설계하고 은혜가 동조했던 이 시스템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 동시에 내부의 '샘플'이 이탈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는 이중 잠금 구조였다. 화재가 발생하면 시스템은 피실험자가 외부로 나가 진실을 유포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구역 전체를 완전한 밀폐형 무덤으로 전환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하... 컥, 하하핫!"
불길 저편, 자욱한 연기 속에서 도진이 피를 토하며 웃었다. 가스에 중독되어 초점을 잃은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말했잖아... 여긴... 너희들의 관이라고... 은혜야, 네가 만든 그 상냥한 규칙들이... 결국 이 새끼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된 거야..."
도진의 목소리가 불길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절망의 잔향은 자욱한 연기보다 더 빠르게 우리를 조여왔다.
화기(火氣)가 폐부를 찌를 때마다 뇌 속의 전두엽이 다시금 강한 경고음을 울렸다. 진실을 인지하려는 의지가 강해질수록, 뇌신경을 관통하는 과전류가 내 자아를 사정없이 갉아먹었다.
스파크가 튀듯 눈앞이 번쩍였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어떤 기억일까.
...어머니가 내 졸업식 날 손에 쥐여주었던, 향긋한 안개꽃의 냄새. ...내가 첫 소설을 출판하고 밤새도록 혼자 마셨던 싸구려 와인의 텁텁한 맛.
그 소중하고 사소한 삶의 흔적들이, 마치 뜨거운 달궈진 철판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기억의 소멸이 가져다주는 공포는 물리적인 죽음보다 더 차갑고 끔찍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기둥들이 하나씩 부러져 내리고 있었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나는 내 허벅지를 손톱이 박히도록 쥐어뜯었다. 솟구치는 핏방울의 통증을 이정표 삼아, 나는 마스터 패드의 숨겨진 코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은혜야."
나는 연기 속에서 은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규칙 제4조... '거실의 대형 벽시계가 멈추었을 때, 절대로 태엽을 억지로 감지 말 것'... 기억해?"
은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건... 시계가 아니라..."
"그래. 시계의 아랫부분, 벽면 내부와 연결된 수동 바이패스(Bypass) 밸브의 위치를 숨기기 위한 규칙이었어."
포레스트 힐의 모든 벽면은 빛의 투과율과 시각적 왜곡을 위해 이중 격벽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격벽 내부에는 화재나 시스템 마비 시 중앙 통제실을 거치지 않고 직접 방화문을 수동으로 개폐할 수 있는 물리적 레버가 존재했다. 은혜는 내가 그 레버를 찾아내 이 가상 낙원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시계라는 시각적 차단막을 세워두고 접근을 금지하는 수칙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현 씨... 그걸 만지면... 대가가..."
은혜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 집의 물리적 설계 구조를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재구성하고 진실을 인지할 때마다, 내 뇌에 가해질 영구적인 손상을.
"나를 잃어버려도 상관없어."
나는 건조하게 웃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잊는 고통보다는, 가짜 낙원에서 껍데기로 사는 게 더 끔찍해."
나는 마스터 패드를 바닥에 던져 깨부수었다. 그리고 태석이 쏘아둔 권총의 탄피가 흩어진 바닥을 기어, 굳게 닫힌 방화문 우측 벽면의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벽면에 걸린 해바라기 그림. 아내가 집안의 생기를 위해 걸어두었다던 그 그림의 뒤편이다.
나는 거칠게 그림을 뜯어냈다. 석고보드로 마감된 벽면이 드러났다. 나는 태석의 권총을 빼앗아 들고, 총구로 벽면의 특정 지점을 조준했다.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밀폐된 지하실을 찢었다. 부서진 석고 가루 너머로,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진 낡은 철제 레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혜가 숨겨두었던, 이 집의 진짜 탈출구였다.
"태석 씨...! 잡아당겨!"
내가 소리치자, 정신을 차린 태석이 달려들어 레버를 잡고 온 힘을 다해 아래로 꺾었다.
쿠구구궁—!
도어락의 붉은 불빛이 꺼지며, 굳게 닫혀 있던 방화문이 몇 센티미터가량 틈을 벌렸다. 뜨거운 불길을 피해 외부의 차가운 밤공기가 그 틈새로 들이쳤다.
"하아... 하아..."
우리는 틈새를 향해 몸을 던졌다. 은혜의 가녀린 몸을 내 품에 꼭 안은 채, 불타오르는 지하실의 문턱을 넘어 복도로 기어 나왔다. 복도 너머 정원으로 이어지는 유리창들이 열기 때문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탈출했다는 안도감이 전신을 감싸던 바로 그 순간.
내 귓가에, 지옥의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듯한 기괴한 기계음이 다시 한 번 고막을 두드렸다.
지 지 직...
그것은 은혜의 셔츠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주치의 도진의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수신음이었다. 도진은 이미 저 아래 불길 속에서 질식해 쓰러졌을 텐데, 무전기 너머의 수신기는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 ...도진아. 상황은 정리되었나.
무전기에서 흘러나온 것은, 도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조차도 들어본 적 없는, 그러나 내 무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한기를 불러일으키는 아주 낯설고도 거대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 정우현의 인지 왜곡이 3단계를 넘어섰다면... 즉시 '프로젝트'의 최종 단계인 자아 포맷을 실행해라.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든... 진짜 '원화재의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절대로 깨닫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굳어버린 채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은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며 무전기를 빼앗아 끄려 했으나, 내 손이 더 빨랐다.
"은혜야..."
내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이 목소리... 누구야?"
3년 전의 방화 사건. 내가 범인이 아니었고, 은혜가 나를 구했다는 진실 뒤에,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심연이 도사리고 있었다. 도진과 은혜를 움직여 나를 이 가상 낙원에 가둔 배후. 그리고 은혜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내게 숨기려 했던, '진짜 가해자'의 정체.
그 순간, 거실의 고전압 전기 울타리가 합선되면서 하우스 전체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맹렬한 폭발 화염 속에 휩싸였다. 우리의 등 뒤로 거대한 불길의 장벽이 다시 한 번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