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시작했다. 그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이 집이 감추고 있는 가장 잔혹한 현실의 탄내였다. 나는 은혜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어둠이 지배하는 계단 아래로 첫발을 내디뎠다. 뒤돌아본 서재의 창밖, 가시나무 숲속의 잠망경은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나를 구원할 유일한 사냥개마저 사라진 지옥에서, 나는 홀로 심연을 향해 걸어 내려가야만 했다.

계단이 끝나는 곳, 지하실의 무거운 철문이 서서히 열리며 차가운 백색광이 흘러나왔다. 그 빛 속에서 나를 맞이하는 것은, 주사기를 든 채 오만하게 미소 짓고 있는 주치의 김도진의 실루엣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정우현 씨. 당신의 진짜 낙원을 완성할 시간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지하실의 콘크리트 벽을 타고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내 등 뒤에서 철문이 둔탁한 굉음과 함께 닫혔고, 완벽한 어둠이 우리를 격리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자아를 건 마지막 사투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종막의 시간이, 마침내 지하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 톱니바퀴를 맞물리기 시작했다. 은혜의 손아귀는 내 손목을 부러뜨릴 듯이 강하게 쥐고 있었고, 내 시야는 인지 과전류의 여파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현 씨, 무서워할 것 없어요. 전부 당신을 위한 거니까요."

은혜는 내 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 상냥한 목소리가 지옥의 안내장처럼 뇌리를 파고들었다.

김도진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은빛 안경테로 지하실의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이 차갑게 반사되었다. 주사기 끝에서 흘러내린 투명한 액체 한 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져 툭, 하고 무거운 소리를 냈다.

"뇌의 불필요한 노이즈를 제거하는 작업일 뿐입니다. 이번 단계만 넘어서면, 당신은 더 이상 고통스러운 기억에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완벽하게 평화로운 소설가로서의 삶만이 남는 거죠."

도진이 주사기를 치켜들며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오만한 눈빛 속에는 나를 인간이 아닌, 제어가 가능한 유기체 하드웨어로 취급하는 냉혹함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슬며시 오른손

가 소매 안쪽에 감춰둔 차가운 금속 침의 자루를 손가락 끝으로 밀어 올렸다. 은혜의 손가락이 내 왼쪽 손목을 옥죄는 압박감이 뼈마디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의 손아귀는 비정상적으로 단단했고, 그 온도는 가사 상태의 시체처럼 서늘했다.

"우현 씨, 힘 빼요. 금방 끝날 테니까."

도진이 주사기 피스톤을 미세하게 밀어 올렸다. 바늘 끝에서 맺힌 투명한 액체 방울이 떨어져 시멘트 바닥에 번졌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지 않았다. 가슴팍의 오르내림을 멈춘 채, 도진이 내 팔뚝으로 바늘끝을 가져오는 순간을 노렸다. 3년 전 방화 사건의 실마리, 그리고 지하실로 끌려 내려오기 전 식사 준비 시간 동안 안방 수첩에 적어 넣었던 강태석 형사의 차량 번호와 은혜의 흉터 자국에 대한 인과 관계가 머릿속에서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자아는 영원히 지워진다.

번쩍.

도진의 손끝이 내 피부에 닿기 직전, 나는 상체를 비틀며 왼쪽 손목을 뒤틀었다. 은혜의 악력이 순간적으로 흔들린 틈을 타, 오른손에 쥔 마취 침을 도진의 목덜미를 향해 호선을 그리며 찔러 넣었다.

푸석, 하는 불쾌한 마찰음과 함께 침 끝이 도진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윽……!"

도진의 단발마가 지하실의 사방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주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주입된 강력한 진정 성분이 그의 경동맥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도진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흐려지더니, 커다란 덩치가 무너지듯 시멘트 바닥 위로 고꾸라졌다.

"우현 씨!"

은혜의 목소리에서 비로소 이성이 거세된 서늘함이 묻어났다. 그녀가 내 어깨를 붙잡고 뒤로 잡아당겼다. 옷자락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막을 찔렀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넘어지듯 바닥을 기어 지하실 한구석에 위치한 중앙 제어반으로 몸을 던졌다. 포레스트 힐 402호의 모든 오감과 감시망을 통제하는 물리적 심장부, 홈 허브 보드가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등 뒤에서 은혜의 거친 숨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손끝이 덜덜 떨렸지만, 이성만큼은 기괴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허브 보드의 플라스틱 커버를 뜯어내고 메인 전산 케이블 옆의 콘솔 패드에 손가락을 얹었다.

침입자 차단 매뉴얼 제3조. 중앙 전산의 맥(MAC) 주소를 강제 분리할 것.

자판을 두드리는 내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은혜의 모바일 기기와 거실 메인 패드의 고유 맥 주소를 차단 목록에 등록하고 엔터키를 내리쳤다.

삑. 띠리리링-.

기계적인 음향과 함께 초록색 제어등이 붉은색으로 반전되었다. 이제 은혜는 이 집의 스마트홈 시스템을 통해 나를 감시할 수도, 외부의 도진의 하수인들과 통신할 수도 없었다. 지독하게 완벽했던 그녀의 감시망에 거대한 블랙아웃이 찾아온 것이다.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콘솔 화면의 시스템 로그를 아래로 쓸어내렸다. 은혜가 숨겨둔 데이터의 흔적들을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화면 가장 하단에 위치한 암호화된 숨김 폴더 하나가 붉은 빛으로 깜빡였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손가락이 굳어졌다. 마우스를 조작해 폴더를 강제로 열자, 최근에 기록된 보안 비디오 파일 하나가 자동 재생되었다.

지직거리는 노이즈 너머로 차갑고 어두운 지하 주차장의 전경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화면 중앙에서, 익숙한 붉은색 패딩을 입은 여자가 거칠게 반항하고 있었다.

정민아였다.

민아의 입을 마취 천으로 틀어막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방금 전 바닥에 쓰러진 주치의 김도진이었다. 민아의 몸이 무기력하게 꺾이며 도진의 차량 뒷좌석으로 밀려 들어가는 장면이, 무음의 화면 속에서 잔혹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영상 하단에 찍힌 타임스탬프의 시간은 불과 세 시간 전이었다.

머릿속에서 퓨즈가 타들어 가는 듯한 날카로운 과전류가 스파크를 일으켰다.

눈앞의 백색광이 순간적으로 붉고 푸른 잔상으로 쪼개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이 턱끝에서 툭, 떨어졌다.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들어차 있던 무언가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감각이 뒤따랐다.

기억의 소멸. 진실을 인지한 대가로 치러야 하는 자아의 박탈이었다.

열 살 무렵,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민아가 내 손을 잡고 조잘거리던 목소리가 기억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무리 붙잡으려 손을 뻗어도 그 아이의 얼굴은 물에 젖은 도화지처럼 흐릿하게 번지다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소중한 기억 하나가 영구히 소실되었음을 자각하는 순간, 목구멍 안쪽이 모래를 삼킨 것처럼 까칠하게 타들어 갔다.

"우현 씨…… 제발……."

내 어깨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늘 나를 지배하던 완벽한 아내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유일한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자의 처절한 신음이었다.

은혜는 화면 속에서 마취된 채 끌려가는 민아의 모습을,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도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잘게 흔들렸다.

"내가…… 내가 전부 통제하려고 했는데. 도진 씨가 결국 선을 넘었어. 저 사람은 처음부터 당신을……."

그녀가 내 어깨를 붙잡기 위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 거친 몸짓에 은혜의 실크 홈웨어가 왼쪽 어깨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 아래, 그녀의 살결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것은 인간의 피부라고 믿기 힘든 기괴한 형상이었다.

촛농이 녹아내린 것처럼 흉측하게 짓무르고 굳어버린 화상 흉터가 쇄골 라인에서부터 왼쪽 어깨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 순간, 지하실의 차가운 소독약 냄새를 뚫고 지독한 탄내와 살이 타들어 가던 3년 전의 매캐한 공기가 내 후각을 마비시켰다. 뇌가 기억하지 못하는 육체의 공포가 본능적인 구역질을 유도했다.

"그 어깨…… 그 흉터는 대체……."

내 목소리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갈라져 나왔다.

은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옷가지를 추슬렀다. 그녀의 눈에 서린 것은 분노가 아닌, 지독한 슬픔과 두려움이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기서 나가야 해요, 우현 씨. 도진 씨가 움직였다는 건…… 그의 밑에 있는 사람들이 이 집으로 오고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 가상 낙원에서 나를 속여온 이들의 말을 더는 단 한 마디도 신뢰할 수 없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허브 콘솔의 비상 잠금 버튼을 강하게 내리쳤다.

철커덕!

무거운 철제 슬라이딩 도어가 지하실 입구를 완전히 차단하며 육중한 소리를 냈다. 이제 이 안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요새이자 밀실이 되었다.

그때였다.

네트워크가 차단되자, 홈 허브 보드의 진단용 스피커가 거친 노이즈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찢어지는 듯한 이조음이 밀폐된 지하실 안을 가득 메웠다. 은혜의 스마트홈 제어망을 격리하자, 집 안의 백업 주파수 채널이 강제로 개방된 형국이었다.

스피커 너머로 흙이 서걱거리며 바닥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방 구석, 화분이 뒤집히고 깨지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쇠를 긁는 듯한 낮고 무거운 음성이 스피커를 뚫고 흘러나왔다.

- 정우현. 거기 있나.

강태석이었다.

그 사냥개가 결국 은혜가 비워둔 안방의 장벽을 넘어 집 안까지 침투한 것이 분명했다.

- 네 여동생이 숨겨둔 무전기가 이 화분 밑에 아주 얌전하게 묻혀 있더군.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잘 들어라.

"안 돼…… 듣지 마요, 우현 씨! 저 사람 말을 믿으면 안 돼!"

은혜가 비명을 지르며 콘솔로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톱이 제어판의 전선을 뜯어내기 위해 사납게 움직였으나, 나는 그녀의 손목을 억세게 낚아채 바닥으로 밀쳐냈다. 은혜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지만, 내 시선은 오직 스피커에 고정되어 있었다.

- 한은혜가 널 이 402호에 가둔 진짜 이유를 알고 싶겠지. 네 진짜 기억을 되찾고 싶다고 했나? 3년 전 그 화재 현장에서 네 진짜 가족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불을 지른 건…… 네가 아니야.

가슴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맥박이 관자놀이를 칠 때마다 눈앞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 진짜 방화범은 바로…….

말소리가 최고조에 달한 순간, 지하실 철문 너머에서 기이한 전자음이 들려왔다.

삑. 삑. 삑. 삑.

누군가 지하실 도어락의 마스터 패스워드를 누르고 있었다.

중앙 제어반 옆의 소형 모니터 화면이 거칠게 깜빡이며 지하실 앞 복도의 실시간 영상을 띄웠다. 화면 속에는 검은색 우비를 깊게 눌러쓴 정체불명의 거구의 사내가 차가운 금속 파이프를 손에 쥔 채, 도어락의 키패드를 침착하게 누르고 있었다.

마지막 승인음이 지하실의 적막을 깨뜨렸다.

띠리리링-.

철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서서히 안쪽으로 밀려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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