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뒤, 벽란도 포구는 차가운 바닷안개 대신 서슬 퍼런 철갑의 물결로 뒤덮였다.
평소라면 아라비아 상인들의 거친 압착어와 여진족 마부들의 고함으로 가득했을 선착장에는 오직 군마의 거친 숨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금속성 소음만이 무겁게 내리앉아 있었다. 황해에서 불어오는 갯비린내 섞인 바람이 장강 상회의 깃발을 세차게 흔들었다.
"이것은 도평의사사의 정식 국경 통제령에 따른 집행이다! 명나라와 북원의 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조정의 허가를 받지 않은 모든 사선(私船)의 출항을 금하며, 벽란도 내 모든 철강 및 군수 물자의 유통을 임시 압류한다!"
황색 관복을 입은 지방 감찰사 임익상이 관인을 찍은 공문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의 뒤편으로는 창을 꼿꼿이 세운 지방 군영의 병사 백여 명이 장강 상회의 거대한 창고 입구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임 감찰사! 이것은 명백한 월권이오!"
판결청의 서류 봉투를 움켜쥔 기철민이 붉어진 얼굴로 군사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고지식한 눈매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도평의사사의 명의라 하나, 이는 전리사의 정식 합의를 거치지 않은 독단적인 집행이오. 더구나 장강 상회가 보유한 철강 원석은 조정의 군기시와 정식 계약된 공물인데, 이를 압류하는 것은 고려의 군비를 스스로 갉아먹는 이적 행위란 말이오!"
"시끄럽소, 기 판관!"
임익상은 기철민의 항변을 콧방귀로 맞받아쳤다.
"우리는 상부의 명을 따를 뿐이오. 최영조 대감의 직인이 찍힌 비망록이 이 권한을 증명하오. 장강 상회가 사사로이 서경의 광산 채굴권을 참칭하고, 조세를 포탈하려 했다는 혐의가 상소로 올라왔소. 조사가 끝날 때까지 단 한 근의 쇠붙이도 이 포구를 빠져나갈 수 없소!"
장강 상회의 행수, 은아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창고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호위 무사들의 칼자루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최영조가 도평의사사에서의 사법 패배를 이런 식의 거친 무력 봉쇄로 되받아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상회의 배들이 묶이고 원자재 수급이 차단되면, 며칠 만에 장강 상회는 물론이고 신우와 약조한 모든 제련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다.
그때, 군사들의 포위망 바깥쪽에서 나직하면서도 사방을 압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방 감찰사가 도성의 법제와 군령을 참으로 기이하게 해석하는구려."
군사들이 웅성거리며 길을 열었다.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유신우였다. 그는 여전히 왼손을 두터운 비단 소매 속에 깊이 감춘 채, 오른손에는 가죽으로 장정된 낡은 서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으나, 자세히 보면 왼쪽 다리가 미세하게 무겁게 끌리고 있었다. 역사 왜곡 동기화율 28.2%의 대가는 여전히 그의 골수를 갉아 먹고 있었다.
"유신우……!"
임익상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놈이 이곳의 실질적인 배후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서자 놈이 제련소를 사사로이 운영하며 국법을 어지럽히더니, 이제는 도평의사사의 처분마저 막아서려 하느냐?"
신우는 임익상의 모욕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들고 있던 서책을 천천히 펼치며, 한 걸음씩 임익상을 향해 다가갔다. 신우의 무감각한 눈동자가 임익상의 얼굴을 꿰뚫듯 응시했다.
"임 감찰사. 그대가 휘두르는 그 공문의 근거가 태조 개태 연간의 '지방 방수군 동원령'에 기인한 것임은 알고 있소?"
"그,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최 대감의 밀령과 도평의사사의 합의가 있으면……."
"상관이 아주 많소."
신우가 책장을 소리 나게 넘겼다.
"고려 관습법 제4조와 공민왕 즉위년 개정된 '공험진 관관조 세입 예칙' 사본이오. 여기에 명시된 규정을 읽어드리지. '국경 및 관문의 폐쇄와 사선 통제는 오직 군사적 실효 지배가 위협받는 전시 상황에 한하며, 이를 집행하는 지방 군영은 통제 기간 동안 발생하는 상업적 손실의 10분의 3을 해군 방위세로 조정에 즉각 대납해야 한다'고 되어 있소."
임익상의 안색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신우의 목소리는 법관의 그것처럼 차갑고 정밀했다.
"또한, 동법 제7조에 따르면, 지방 감찰단이 합당한 조세 포탈의 물증 없이 국기(國器)인 군기시 납품 원석을 24시간 이상 억류할 경우, 이는 '군수 조달 방해죄'에 해당하며, 집행 책임자는 평생 감봉 및 관직 임용 박탈, 그리고 가산의 2분의 1을 군비로 몰수당하게 되어 있소. 임 감찰사, 그대는 최 대감의 사적인 사주를 받고 자신의 평생 감봉과 가산 몰수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 해괴한 법령이 어디 있단 말이냐!"
임익상이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물러설 길을 찾는 장수의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신우는 서책의 한 페이지를 임익상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그곳에는 고려 건국 초부터 내려온 붉은 관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세법과 군령의 엄격한 자구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현대 외교부 아카이브에서 인출해 낸, 철저히 검증된 법리적 칼날이었다.
"이 서책은 조정의 전리사와 판결청이 공동으로 보관하는 세법 선례집의 공인 사본이오. 기철민 판관이 이미 서명날인한 정식 법적 효력을 지닌 문서지."
신우의 시선이 임익상의 뒤에 서 있는 지방 군영의 중랑장에게로 향했다.
"중랑장 대인. 그대 역시 들으시오. 이 봉쇄가 유지되는 매시간마다, 그대 군영이 조정에 납부해야 할 해군 방위세는 은(銀) 50냥씩 누적될 것이오. 만약 사흘 이내에 이 금액이 전리사에 입금되지 않으면, 조정은 그대 군영의 한 해 군량을 가압류할 권한을 갖게 되오. 최영조 가문이 그대들의 굶주린 군사들에게 쌀을 대어줄 것 같소?"
군사들 사이에서 거친 동요가 일었다. 중랑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 임익상을 바라보았다.
"임 감찰사! 이것이 어찌 된 일이오? 최 대감께서는 그저 상인들의 밀거래를 단속하는 것이라 하지 않으셨소! 우리 군영이 군량 감봉의 화를 입게 된다면, 난 이 일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소!"
"중랑장! 흔들리지 마시오! 저 서자 놈의 세설에 놀아나선 안 되오!"
임익상이 표독스럽게 소리쳤으나, 신우는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놀아나는 것인지, 아니면 국법의 단두대 위에 서 있는 것인지는 지금 당장 도성으로 전령을 보내 확인해 보면 될 일이오. 다만, 전령이 왕복하는 이틀 동안 누적될 방위세와 군수 방해죄의 책임은 오롯이 임 감찰사, 그대 개인의 가산으로 청구될 것이오."
신우의 손끝이 임익상의 관복 소매를 가볍게 쳤다.
"그대의 저택과 전답, 그리고 가솔들의 노비 문서가 전리사의 법정에 매물로 나오게 될 날이 머지않았구려."
임익상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신우의 압박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철저히 고려 조정의 실무 법령과 세법의 빈틈을 해킹하듯 파고드는 법리적 공세였다. 만약 실제로 군수 조달 방해죄가 적용된다면, 권문세족의 수장인 최영조는 자신 같은 말단 감찰사 따위는 언제든 꼬리 자르기로 버릴 것이 뻔했다.
"내…… 내 잠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오."
임익상이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군기시의 공물 수급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나 역시 원치 않는 바요. 일단…… 상소의 사실 여부를 재조사하기 위해 봉쇄를 일시 해제하겠소."
"임 감찰사!"
중랑장이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며 즉각 소리쳤다.
"군사들을 물려라! 항만 봉쇄를 풀고 포구를 원상 복구한다!"
서슬 퍼렇던 군사들이 밀물 빠지듯 신속하게 대열을 정비해 벽란도 외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임익상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신우를 매섭게 노려본 뒤, 말에 올라타 도성 방향으로 급히 채찍을 가했다.
순식간에 포구에 평온이 찾아왔다. 장강 상회의 일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묶여 있던 선박의 닻줄을 풀기 시작했다.
은아랑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신우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경외감과 함께, 이 남자가 가진 비정할 정도의 치밀함에 대한 정제되지 않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유 도련님…… 참으로 대담하십니다. 조정의 군령과 세법을 이토록 완벽하게 엮어서 군사들을 물리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법도란 칼날과 같아서, 쥐는 법을 아는 자에게는 최고의 방패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스스로의 목을 베는 흉기가 되는 법이오."
신우는 차갑게 대꾸하며 펼쳐진 서책을 덮었다. 그의 왼손 끝이 다시금 가늘게 떨려왔다. 아카이브에서 고려 초기의 세법 조항을 급격히 인출하고 왜곡한 대가로, 가슴 안쪽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그는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안으로 드시지요. 도련님께 보여드릴 중요한 장부와 정보가 있습니다."
은아랑의 안내에 따라 상회 내부의 밀실로 들어선 신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은아랑이 내민 낡은 서책 한 권을 받아들었다.
"이것은 서경의 밀무역 상인들을 조사하던 중 입수한 장강 상회의 비밀 장부입니다. 그리고……."
은아랑은 장부의 겉표지 가죽 안쪽에 숨겨져 있던 얇은 한지 조각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신우의 앞에 놓았다.
"그 장부 틈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요동의 여진 밀무역 거상인 '아라카'의 표식이 새겨진 밀지 조각입니다. 최영조 가문이 원나라 세력뿐만 아니라, 요동의 밀무역 세력을 통해 명나라 내부의 군사 움직임까지 비공식적으로 탐지하려 했던 정황이 담겨 있습니다."
신우는 얇은 종이 조각을 집어 들었다. 종이 위에는 기묘한 암호화된 표식과 함께, 요동의 지정학적 경계선이 미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현대 외교부 아카이브의 데이터베이스가 머릿속에서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이 표식이 훗날 명나라 사신 해수 가문이 요동에 비공식 군대를 파견할 때 사용했던 군사 암호의 초기 형태임을 식별해 냈다.
'아라카…….'
신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최영조가 쥐고 있는 외교적 카드가 생각보다 넓고 정교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최영조의 목을 죌 수 있는 또 하나의 완벽한 덫이 될 수 있었다.
"은 행수, 이 밀지 조각은 내가 보관하겠소. 요동과의 거래 선로를 계속 주시하시오. 특히 아라카라는 인물의 움직임을 놓치지 마시오."
"예, 도련님. 장강 상회의 명운을 걸고 밀무역 선로를 감시하겠습니다."
은아랑은 고개를 숙이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녀는 이제 신우라는 거대한 장기판의 말판 위에서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
벽란도의 소동을 정리한 신우는 곧바로 도성 외곽에 위치한 이가온의 제련소로 향했다.
제련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매캐한 유황 냄새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가 신우의 폐부를 찔렀다.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벌겋게 달아오른 화덕 앞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이가온의 모습이 보였다.
"빌어먹을! 이딴 쓰레기 같은 흙으로는 도저히 용제 내부의 열기를 버틸 수가 없단 말이다!"
깡그랑!
이가온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집게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의 발밑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일그러지고 깨져버린 검은 점토 도가니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가온 대장. 진행 상황은 어찌 되었소?"
신우의 목소리에 이가온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검은 그을음과 분노로 엉망이었다.
"유 도련님! 오셨소? 내 똑똑히 말하는데, 도련님이 준 그 고온 송풍관 도면은 진짜 기적 같은 물건이오. 불길을 몰아치는 힘이 장난이 아니란 말이오. 하지만 문제는 이 도가니요!"
이가온은 깨진 도기를 가리키며 삭발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온도를 도면대로 올리려고 송풍을 시작하면, 도가니 자체가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융해되어 깨져버리오. 쇠가 녹기도 전에 그릇이 먼저 녹아내리는데 무슨 수로 탄소 함량을 조절한단 말이오? 개경의 가마터 네 곳에서 가져온 가장 단단하다는 찰흙을 다 섞어봤지만, 전부 무용지물이오!"
신우는 바닥에 떨어진 도가니 파편을 주워들었다.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표면이 유리처럼 매끄럽게 녹아내려 있었다. 내화 점토의 내열 한계 온도를 초과한 것이 분명했다. 현대의 고온 제련 공정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최소 1,500도 이상의 고온을 버틸 수 있는 특수한 내화 벽돌과 도가니가 필수적이었다. 낙후된 중세 고려의 기술 인프라가 가진 치명적인 한계였다.
"더 높은 온도를 버티는 흙이 필요하군."
신우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흙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흙은 이 고려 땅에 없소!"
이가온이 한숨을 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과거에…… 내 서경에서 한 번 귀신이 곡할 노릇 같은 흙을 본 적은 있소만……."
이가온의 눈에 잠시 아련한 빛이 스쳤다.
"서경산 보라색 가마에서 나오는 내열 점토인데, 그 흙으로 구운 벽돌은 서경 군부의 도가니에서도 결코 깨지지 않았소. 하지만 그 가마터는 이미 서경 군부와 최영조 일파가 장악하고 있고, 제조 비법도 그들이 독점하고 있어서 민간 장인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소. 내 그 점토의 배합 도면을 구해보려다 가문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지……."
신우의 머릿속 아카이브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이가온의 집 한구석에 숨겨져 있던 깨진 단지의 고령토 성분 분석 자료와 서경 가마터의 지질 도면이 뇌리에 스치듯 지나갔다.
'서경산 보라색 내열 점토…….'
신우는 주머니 속에서 유인선에게서 강탈했던 '서경 채굴권 및 가마터 양도 서약서'를 만지작거렸다. 최영조가 장악하고 있는 서경의 핵심 인프라를 무너뜨리고, 완벽한 탄소강 무기를 생산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 그곳에 있었다.
"가온 대장, 낙담하지 마시오. 그 보라색 흙은 머지않아 내가 그대의 제련소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아 줄 테니."
"정말이오? 도련님, 만약 그 흙만 있다면…… 내 평생의 역작을 만들어 바치겠소!"
이가온의 눈에 다시금 열정의 불꽃이 타올랐다. 신우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제련소를 빠져나왔다.
***
개경 저택으로 복귀하는 길, 사방은 이미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신우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피로에 지친 눈을 감았다. 도평의사사의 세제 공방부터 벽란도 봉쇄 해제, 그리고 제련소의 기술 빌드업까지. 단 사흘 동안 너무 많은 아카이브의 정보를 강제 인출해 낸 상태였다.
삐이이이이-.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이명이 머릿속을 때렸다.
[경고: 역사 왜곡 동기화율 29.5% 도달.] [누적된 물리적 인과 역행의 반작용이 신경계로 환원됩니다.]
"윽……!"
신우는 급격히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차가운 얼음 송곳이 온몸의 혈관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왼손은 이미 손가락 끝부터 팔꿈치 너머까지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채 굳어 있었다. 하지만 고통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비 증세가 가슴을 타고 내려가 오른쪽 다리와 척추를 타고 급격히 확산되었다.
"커흑……!"
신우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사지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며 온몸의 신경이 얼어붙는 감각에, 신우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마차 바닥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도련님?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났습니까?"
마차 밖에서 마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신우의 귓가에는 그 소리가 점차 멀어져만 갔다. 어둠 속에서 그의 호흡이 급격히 가빠지며, 몸이 딱딱하게 굳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