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도련님! 지금 벽란도 사천가에 큰일이 났습니다! 이가온 장인의 제련소에서 제련하던 신형 탄소강 무기들의 도면과 철강 원석들이…… 서경에서 내려온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강탈당했습니다! 은아랑 행수님께서 지금 제련소에서 그들을 막아서고 계시나, 무력 충돌이 일어날 위기입니다!”
판결청의 서늘한 공기 속으로 날아든 전령의 비명은 무거웠다. 승리의 말판을 거두려던 기철민의 손길이 허공에서 멈췄고, 바닥에 엎드려 굴욕을 삼키던 유인선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유인선의 입꼬리에 스친 찰나의 희열을, 유신우는 놓치지 않았다.
“서경의 사내들이라.”
신우는 기철민에게서 정식 주거권과 제련소 소유권이 명시된 주권 문서를 건네받아 품속에 밀어 넣었다. 종이의 서늘한 감촉이 품을 파고들었으나, 그의 머릿속은 이미 바쁘게 연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서경(西京). 고려의 서풍을 주도하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친원파 권문세족들의 사적 군사 기반이 도사린 곳이다. 이가온의 제련소에서 흘러나오는 신형 탄소강 무기의 소문이 벌써 그들의 귀에 들어갔다는 뜻이며, 사법적 판결로 제련소를 넘겨받자마자 그 실체를 가로채겠다는 노골적인 선전포고였다.
“판관 어른, 정식 문서의 효력은 즉시 발휘되는 것이겠지요.”
신우가 차분한 목소리로 묻자, 기철민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평의사사의 관인이 찍힌 이상, 이 시간부로 사천가 제련소의 모든 소유권과 관리 권한은 유신우, 네게 귀속된다. 만약 그곳에서 사적인 약탈이 자행된다면 이는 조정의 법도를 참칭하는 중죄다.”
“그렇다면 제 재산을 지키기 위해 가보아야겠습니다.”
신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판결청의 문턱을 넘어섰다. 유인선이 바닥을 긁으며 짓는 악에 받친 눈빛이 등 뒤에 닿았으나, 신우에게 그것은 고려라는 거대한 장기판 위의 사소한 변수에 불과했다.
***
말을 달려 도착한 벽란도 사천가는 가을바람에 실려 온 짠내와 타오르는 석탄 연기가 뒤섞여 기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가온의 제련소가 위치한 사천가 초입은 이미 활극의 전장과 다름없었다.
“이 비열한 도적 놈들이 어디라고 손을 대느냐! 이 철강 원석들은 우리 푸른 매화 상단이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하고 확보한 물품이다!”
은아랑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붉은 가마터의 열기 사이로 울려 퍼졌다. 그녀의 뒤로는 상단의 호위 무사 열댓 명이 무기를 뽑아 들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검은 가죽 갑옷을 느슨하게 걸친 굵직한 체구의 사내들이 수레를 가로막은 채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사내들의 중심에 선 외눈의 무장이 품에서 붉은 직인이 찍힌 문서를 꺼내 보였다.
“도령 행수, 목청만 높인다고 법이 네 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서경 도순문사(都巡問使)의 직인이 찍힌 군수 조달령이다. 서경의 방비를 위해 사천가의 철강과 도면을 징발하라는 상부의 명이 있으니, 일개 상단 따위가 조정의 군령을 막아서겠다는 게냐?”
조령(朝令)의 허울을 쓴 강탈이었다. 고려 후기, 지방의 도순문사들은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사적으로 군부를 운영하며 이처럼 벽란도의 상권을 수시로 강탈하곤 했다. 은아랑의 입술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이번 철강 수급과 신형 무기 제련이 실패한다면, 그녀의 상단은 도평의사사에 납부해야 할 연례 세금을 맞추지 못해 파산할 처지였다.
“군령이라 하셨소?”
군중을 헤치고 걸어 나오는 신우의 목소리는 낮고 명료했다. 은아랑의 시선이 신우에게 닿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의혹과 일말의 기대가 교차했다.
외눈의 무장이 신우를 훑어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서생 놈이냐? 꺼지지 않으면 이 칼날이 네 목청을 먼저 딸 것이다.”
신우는 한 걸음 더 다가서며 품에서 방금 기철민에게 받은 도평의사사 관인의 주권 문서를 펼쳐 보였다.
“고려 국법 제3조, 그리고 도평의사사 특별 구례에 따르면, 사천가 제련소는 개경 판결청의 판결에 따라 본인 유신우의 독점 주거 및 사유 자산으로 확정되었다. 지방의 도순문사는 개경 도성 내의 사유 자산에 대해 직접적인 징발권을 행사할 수 없다. 이는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침해하는 항명(抗命)이다.”
“뭐라?”
“또한, 당신들이 들고 있는 서경 도순문사의 조달령은 ‘서경 관내’의 물자에 한정된다고 명시되어 있을 터. 개경 벽란도는 도평의사사 직할 영지다. 관할을 넘어선 징발은 군령이 아니라 무단 약탈이며, 가담한 자들은 예외 없이 삼사(三司)의 국문을 거쳐 차형(車刑)에 처해진다. 내 말이 틀렸는가, 군관?”
정교하게 짜인 법리적 압박에 외눈 무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우는 현대 외교부에서 수없이 다루었던 영토 관할권 조약의 허점을 다루듯, 고려의 행정 구역 관할법을 정확히 찌르고 들어갔다.
“이, 이놈이 감히 서경의 군부를 협박하려 드는구나!”
무장이 칼자루를 쥐는 순간, 신우의 뒤편에서 판결청의 관군들을 이끌고 기철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철민의 등장은 서경 사내들에게 결정타였다.
“도성 내에서 사사로이 무력을 행사하려는 자들은 누구냐! 당장 검을 거두지 않으면 도평의사사의 군령으로 즉시 체포하겠다!”
기철민의 엄포에 외눈 무장은 이를 갈았다. 판세가 완전히 기울었음을 직감한 것이다.
“유신우라고 했나…… 똑똑히 기억해 두마. 서경의 불길은 개경의 법도 따위로 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수레에 실려 있던 철강 원석 중 일부만을 챙긴 채, 침을 뱉으며 황급히 현장을 이탈했다.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으나, 핵심 기술의 도면과 제련소의 뼈대는 지켜낸 셈이었다.
***
상황이 정리되자, 은아랑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신우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도와준 것은 고마우나, 유씨 가문의 서자 눈에 우리가 그리 만만해 보였나 보군요. 법전 몇 구절로 저들을 쫓아냈다고 해서 이 제련소가 당신의 것이 될 줄 알았습니까?”
그녀의 말투는 차가웠다. 벽란도에서 뼈가 굵은 그녀는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은 행수, 나는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닙니다. 동업자로서 내 자산을 지킨 것뿐이지.”
“동업자?”
은아랑이 코웃음을 쳤다.
“허황된 소리 마십시오. 당신은 가문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서자일 뿐입니다. 우리 상단은 지금 도평의사사에 바칠 공물 대납 기한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가져간 원석과 망가진 가마로는 기한 내에 세금을 맞출 수 없어요. 파산이 코앞인데 무슨 동업을 논한단 말입니까?”
그녀의 비아냥거림에도 신우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제련소 내부의 낡은 가마터로 걸어 들어갔다. 석탄 가루와 철 찌꺼기가 굴러다니는 바닥, 그리고 불이 꺼져 차갑게 식어버린 고로가 보였다.
신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푸른빛의 스펙트럼이 펼쳐지며 ‘외교부 비밀 아카이브’가 개방되었다.
[역사 왜곡 동기화율: 4.2%] [경고: 고부가가치 기술 정보 인출 시 동기화율이 상승하며, 신체 마비 증상이 동반될 수 있습니다.]
신우는 개의치 않고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했다. ‘14세기 말 동아시아 제련 기술 - 수평 송풍식 고탄소강 도가니 공정 도면.’
순간, 뇌리를 찌르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왼쪽 손가락 끝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가는 감각이 엄습했다. 이가 시릴 정도의 통증이었으나, 신우는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고 아카이브 속 도면을 종이 위에 옮겨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굳어가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붙잡으며, 붓끝을 정밀하게 움직였다.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은 기존의 수직형 가마가 아니었다. 공기의 흐름을 수평으로 유도하여 가마 내부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탄소 함량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개량형 수평 송풍 구조 도면이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은아랑이 다가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서서히 경악으로 넓어졌다. 상단을 이끌며 수많은 제련 도면을 보아왔던 그녀였기에, 이 도면이 가진 기하학적 정밀함과 공학적 혁신성을 대번에 알아본 것이다.
“사철(沙鐵)을 녹여 무쇠를 만들 때, 가장 큰 문제는 탄소의 불균일성입니다. 탄소가 너무 많으면 유리처럼 깨지고, 너무 적으면 연철이 되어 휘어지지요. 이 수평 송풍 공법을 사용하면 온도 조절을 통해 불순물을 완벽히 정화하고, 기존 제련법보다 두 배 이상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탄소강을 절반의 시간 만에 생산할 수 있습니다.”
신우의 정량적 분석에 은아랑은 침묵했다. 신우는 쐐기를 박듯 말을 이어갔다.
“이 도면의 가치는 은 행수가 도평의사사에 바쳐야 할 세금의 열 배가 넘을 것입니다. 어때요, 이래도 내가 허황된 서자로 보입니까?”
은아랑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이성이 이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제안에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사흘 뒤에 들이닥칠 세리(稅吏)들은 이 도면을 세금으로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장 눈앞의 은자나 공물을 원해요.”
“그 세금 문제라면, 내가 해결해 드리지요.”
신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
다음 날 아침, 사천가 푸른 매화 상단 지부 앞에는 호사스러운 가마와 함께 도평의사사 소속의 세무 관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선두에는 권문세족 최영조의 가신이자 세금 징수 책임자인 황 도령이 서 있었다.
“은 행수! 기한이 되었거늘 어찌 공물 수송선이 출발하지 않는 게냐! 도평의사사를 기만하려는 속셈이냐!”
황 도령은 거드름을 피우며 상단 마당으로 들어섰다. 평소 한미한 상인이라며 은아랑을 조롱하던 그였다. 이번 기회에 세금 미납을 빌미로 상단의 벽란도 독점권을 빼앗아 최영조 대감에게 바치려는 계산이 서 있었다.
은아랑이 초조한 기색으로 나섰으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유신우였다.
“황 관원, 도평의사사의 세법 조항을 제대로 읽고 오신 것인지 의심스럽군요.”
신우가 관공서의 공식 세무 장부를 펼쳐 들며 차갑게 말했다.
“무슨 개소리냐! 세금 미납은 즉시 자산 압류 대상이다!”
“고려 건국 초기의 구례(舊例)이자, 현행 세법 제14조 ‘천재지변 및 군사 징발에 따른 조세 이월조’에 따르면, 관할 군부의 공인된 군수 징발이 발생했을 경우 해당 상단의 세금 납부는 최대 석 달간 조건 없이 유예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신우가 어제 기철민에게 정식으로 받아낸 ‘서경 군부의 무단 징발 시도 전말서’를 황 도령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어제 서경 도순문사의 군관들이 이 제련소를 습격하여 원석을 강탈해 간 사실이 판결청 관군에 의해 공식 문서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군사적 강탈이며, 따라서 현행법상 푸른 매화 상단의 세금 납부는 이월 대상입니다. 법대로 하셔야지요, 황 관원.”
황 도령의 얼굴이 붉다 못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깟 편법이 통할 줄 아느냐! 도평의사사의 최영조 대감께서 직접……”
“최영조 대감께서 직접 국법을 어기라 명하셨습니까?”
신우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매섭게 내리쳤다.
“만약 그렇다면 이 전말서와 함께 도평의사사 감찰부에 정식으로 상소를 올리겠습니다. 최 대감께서 일개 세리의 미숙한 행정 처리 때문에 국법을 어겼다는 탄핵을 받으시면, 그 뒷감당은 황 관원, 당신이 하실 수 있겠습니까?”
주변에 모여든 벽란도 상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권문세족의 권세를 믿고 상인들을 수탈하던 세리들이, 법리적 완벽함 앞에 말 한마디 못 하고 벌벌 기는 모습은 그야말로 짜릿한 광경이었다.
황 도령은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석 달이다. 석 달 뒤에도 이월 핑계를 대면 그땐 상단 전체를 국유화할 것이다!”
황 도령 일행이 꼬리를 내리고 황급히 물러나자, 마당을 가득 채웠던 긴장감이 일순간 경탄으로 바뀌었다. 은아랑은 신우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 유 도련님. 법을 칼날처럼 쓰시는군요.”
“이것이 내가 깨고자 하는 고려의 규칙입니다, 은 행수.”
신우는 담담하게 답했다.
***
그날 밤, 신우와 은아랑, 그리고 제련의 대가 이가온은 사천가 깊숙한 곳에 숨겨진 폐쇄된 거대 고로 앞에 모였다. 이곳은 이가온이 과거 대장간의 실패를 겪고 봉인해 두었던 비밀 가마터였다.
신우는 가마터 구석에 쌓인 서책 더미를 뒤적이다가, 낡은 가죽 지도를 발견했다. 지도의 구석에는 붉은색으로 정밀하게 표시된 광산 지대와 함께 ‘서경산 보라색 가마 내열 점토 도면’(★복선 1)이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이 이가온이 숨겨둔 비기인가.’
신우는 지도를 조용히 덮어 원래 자리에 두었다. 아직은 이 카드를 꺼낼 때가 아니었다. 탄소강 제련이 궤도에 오르고, 더 높은 온도의 고로가 필요할 때 비로소 이 점토의 가치가 빛을 발할 것이다.
“유 도령, 정말 이 도면대로 바람을 불어넣으면 쇠가 깨지지 않고 질겨진단 말이지?”
이가온이 불신과 기대가 섞인 눈빛으로 신우가 설계한 수평 송풍구를 조립하며 물었다.
“장인의 기술과 이 도면의 과학이 합쳐진다면, 고려에 없던 명검과 철갑이 탄생할 것입니다. 불을 당기십시오.”
신우의 명령에 이가온이 화덕에 횃불을 던졌다.
화르륵!
거대한 고로 내부에서 첫 석탄 불꽃이 당겨졌다. 개량된 송풍구를 통해 흘러 들어간 공기가 불길을 자극하자, 가마터 내부가 순식간에 노랗고 붉은 열기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열풍이 신우의 얼굴을 달구었고, 은아랑의 눈동자에도 붉은 갈망의 빛이 비쳤다.
새로운 철강 제국의 기틀이 이곳 벽란도의 붉은 도가니 속에서 끓어오르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가마터 지붕의 깨진 틈새로 차가운 가을바람과 함께 낯선 살기(殺氣)가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스릉, 하는 미세한 쇠붙이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신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유인선이 사주한 사가(私家)의 자객들이 마침내 냄새를 맡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