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의 시간은 개경 판결청의 차가운 바닥 위로 내려앉은 서리처럼 빠르게 흘렀다.
판결청 내부는 눅눅한 흙내와 오래된 한지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창호지를 흔들 때마다, 삐걱거리는 문틀 소리가 법정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유신우는 자신을 포박했던 밧줄이 남긴 손목의 붉은 낙인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사흘 전, 가문의 하당에서 적자 유인선의 면전에 던졌던 경고는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법도라는 거대한 그물망은 가장 정교한 매듭을 찾아내는 자의 손에서만 비로소 무기가 된다.
"피고인 서자 유신우는 들으라."
상석에 앉은 판관 기철민이 묵직한 목소리로 공문을 펼쳤다. 그의 목소리는 매끄럽게 다듬어진 먹색 돌처럼 건조하고 낮았다.
"원고 유인선이 제출한 고발장에 따르면, 피고는 가문의 사유 재산인 방적 대장(紡績大帳)을 위조하고, 이를 통해 벽란도 상인들과 결탁하여 가산의 일부를 사적으로 유용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 변명할 말이 있는가?"
유인선은 기철민의 좌측에 서서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단 도포를 차려입은 그의 어깨가 오만하게 들썩였다. 그는 관아의 판결이 나기도 전에 이미 유신우를 노비의 신분으로 떨어뜨려 가문 밖으로 내던질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판관 나리, 저 비천한 서자 놈은 가문의 법도를 어지럽히고 적통의 권리를 침해했습니다. 고려의 형률에 따라 즉시 장형에 처하고 가산에서 영구히 제명해야 마땅합니다!"
유인선의 목소리가 판결청의 높은 천장을 때렸다. 그러나 유신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기철민 판관이 들고 있는 고발장의 종이질과 서식에 고정되어 있었다.
"판관 어른."
신우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지만 명료하여, 소란스럽던 법정의 공기를 단숨에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원고가 제출한 고발장에는 중대한 법리적 모순이 존재합니다. 고려의 행정법과 관습법을 관장하는 도평의사사의 구례(舊例)를 정면으로 위배한 문서입니다."
"법리적 모순이라니?"
기철민이 붓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유인선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놈이 이제는 미쳐서 헛소리를 하는구나! 가문의 고발장에 무슨 모순이 있단 말이냐?"
"유인선, 네가 제출한 고발장의 작성 일자는 지난달 병인일(丙寅日)이다. 맞느냐?"
"그렇다. 네놈의 죄상을 명백히 밝혀 관아에 접수한 날이지."
신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현대 외교부에서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국제 조약문의 자구 하나로 강대국들의 군사 전개를 저지하던 감각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묻겠다. 고려 대동 세종 구례(大東世宗舊例) 제십사조에 명시된 세무 집행 시한과 가산 분쟁 접수 조항을 알고 있는가?"
유인선의 얼굴에 언뜻 당혹감이 스쳤다. 구례의 구체적인 조항 따위는 가문의 권세만 믿고 날뛰던 적자가 알 리 없는 영역이었다.
"그, 그게 무슨 상관이냐!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법이거늘!"
"대동 세종 구례에 따르면, 가문 내의 사유 재산 분쟁과 장부 위조 혐의는 당해 연도 추수 세금 납부 시한인 '상강(霜降) 후 십일 이내'에 관아에 정식 접수되어야만 법적 효력을 지닌다. 그러나 네가 고발장을 접수한 병인일은 상강으로부터 이미 이십삼 일이 지난 시점이다."
신우는 기철민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판관 어른, 도평의사사가 공표한 세무 집행 시한이 지난 고발장은 법적으로 '시한 도과에 따른 무효'에 해당합니다. 즉, 원고가 제출한 고발장 자체의 법적 효력이 소멸하였으므로, 본 송사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기철민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그는 급히 옆에 놓인 두꺼운 법전과 도평의사사의 세무 선례 서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종이 장을 넘기는 판관의 손끝이 빨라졌다.
"이, 이럴 수가……."
기철민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고려의 관습법은 성문법과 구례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관료들조차 이러한 시한 규정을 놓치기 일쑤였다. 신우는 현대의 분석력으로 그 허점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었다.
"이 천하의 비천한 서자 놈이 감히 어디서 사술을 부리느냐!"
유인선이 참지 못하고 법정의 규율을 깨뜨리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네놈은 유씨 가문의 피를 물려받은 서자일 뿐이다! 고려의 신분법에 따르면 서자는 가문의 적자에게 복종해야 하며, 적자가 가문의 재산을 처분하고 관리하는 일에 토를 달 수 없다! 판관 나리! 저놈은 신분 질서를 어지럽히는 대역죄인입니다!"
유인선의 악에 바친 외침이 판결청 내에 메아리쳤다. 유씨 가문의 권세와 엄격한 신분적 한계는 유신우가 넘을 수 없는 가장 단단한 벽처럼 보였다. 배후에서 지켜보던 관아의 서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유인선의 말에 동조하는 기색을 보였다.
기철민 판관 역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붓을 내려놓았다.
"피고 유신우. 원고의 말대로 고려의 가문 관습법상 서자의 재산권 주장은 한계가 명확하다. 고발장의 접수 시한이 지났다 한들, 가문 내에서의 징벌권은 여전히 적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선례다. 네가 방적 대장을 만졌다는 사실 자체가 가문의 재산 침해로 해석될 수 있단 말이다."
상황이 다시 유신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기철민의 냉정한 판결 궤적은 철저히 기득권의 논리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유신우의 입가에는 여전히 싸늘한 냉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자가 자신의 신분적 우위를 과신하며 덫으로 걸어 들어오기를.
신우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외교부 비밀 아카이브'를 향해 의식을 집중했다.
*계약 승인: 고려 초기 사법 판례 및 가산 분배 구례 검색.*
순간,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유신우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눈앞이 붉게 물들며, 뇌세포 하나하나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동시에 그의 왼손 끝이 감각을 잃고 굳어지기 시작했다. 원래 역사에서 고려가 멸망하며 흘렸던 피의 대가, 역사 왜곡 동기화율이 상승하는 지독한 반작용이었다.
신우는 입안으로 차오르는 비릿한 피를 삼켰다. 겉으로는 단 한 번의 신음도 흘리지 않은 채, 아카이브가 제시한 정밀한 텍스트를 머릿속에서 읽어 내려갔다.
"판관 어른."
신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차가운 얼음송곳처럼 빛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신성대왕(神聖大王) 치세인 개태(開泰) 연간에 제정된 '사족 서얼 재산 분배권 평결문'을 기억하십니까?"
기철민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개태 연간의 평결문이라니……? 그것은 백 년도 더 전에 사라진 구례가 아니더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조정의 태만으로 잊혔을 뿐입니다."
신우는 아카이브가 제공한 사료의 자구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구술하기 시작했다.
"『태조 개태 삼년, 사족의 서얼이라 할지라도 가문의 공업(工業)에 기여한 바가 명백하고, 적자가 가문의 가산을 현저히 훼손하거나 유용하려 할 때에는, 관아의 허락하에 서얼에게도 가산의 독자적 관리권 및 주거 독립권을 부여한다.』 이는 고려 천자국의 엄연한 법제이며, 도평의사사의 그 어떤 가문 관습법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국법입니다."
판결청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기철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서고로 향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한참을 서고 구석에서 먼지 쌓인 궤짝을 뒤적이던 기철민이 마침내 빛바랜 가죽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것을 펼쳐 읽는 판관의 눈동자가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 이것이 어찌 여기에……."
그것은 유신우가 암송한 구절과 단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성종조의 공식 판결문 사본이었다.
"원고 유인선."
기철민의 목소리가 전보다 훨씬 서늘해졌다.
"너는 피고가 가산의 방적 대장을 위조했다고 주장했으나, 본 판관이 사흘간 가문의 세무 기록을 정밀히 조사한 결과, 오히려 적자인 네가 벽란도의 사천가 상인들과 결탁하여 가문의 방적 원자재 대금을 부풀려 청구하고, 그 차액을 사적으로 착복한 정황이 드러났다."
"예?!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판관 나리!"
유인선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피고 유신우는 위조를 행한 것이 아니라, 네가 착복하려던 가문의 이권을 방적 대장의 정상화를 통해 방어하려 한 것이다. 이는 개태 연간의 평결문에 명시된 '적자의 가산 훼손을 방지한 서얼의 공로'에 정확히 부합한다."
기철민이 붓을 들어 판결문에 힘차게 서명했다. 먹물이 종이 위로 무겁게 번져 나갔다.
"판결하노라! 원고 유인선의 고발은 무고이며, 가산 훼손의 혐의가 명백하므로 송사를 기각한다. 아울러 피고 유신우에게는 가문의 가산 중 이가온의 제련소를 포함한 공업 자산 일체의 독자적 관리권을 부여하며, 가문과의 사법적 분리를 보장하는 정식 주거권(住居權)을 승인한다!"
"판관 나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저 천한 서자 놈에게 가문의 제련소를 넘기다니요!"
유인선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기철민의 시선은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조정을 기만하고 법정을 어지럽힌 죄, 결코 가볍지 않다. 유인선, 너는 지금 당장 피고 유신우에게 가해진 무고에 대해 머리를 숙여 사죄하라. 그리하지 않으면 가문 전체의 세무 조사를 도평의사사에 정식 의뢰할 것이다."
그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가문의 뇌물 장부가 도평의사사에 통째로 넘어간다면 유씨 가문은 공중분해 될 터였다.
유인선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의 오만한 자존심이 밑바닥까지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믿었던 서자 유신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 내가 경솔했다. 사죄하마."
굴욕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유신우는 그런 유인선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침묵으로 일관했다. 감정적인 분노도, 승리의 희열도 없었다. 오직 철저한 손익계산 속에서 적대자를 완벽하게 무력화했다는 이성적인 만족감만이 그의 가슴속에 머물렀다.
기철민이 유신우에게 다가와 정식 주거권과 제련소 소유권이 명시된 주권 문서를 건넸다.
"유신우. 네 법리적 식견에는 경탄을 금할 길이 없구나. 가문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한다."
"판관 어른의 공명정대한 판결에 감사드립니다."
신우가 문서를 받아 드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판결청의 무거운 목조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을 부술 듯이 밀치고 들어온 것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청년이었다. 그의 옷자락에는 벽란도 최고의 대부 상인, 은아랑의 가문을 상징하는 푸른 매화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판, 판관 나리! 급보입니다!"
시종은 숨이 턱 끝까지 찬 채 유신우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유 도련님! 지금 벽란도 사천가에 큰일이 났습니다! 이가온 장인의 제련소에서 제련하던 신형 탄소강 무기들의 도면과 철강 원석들이…… 서경에서 내려온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강탈당했습니다! 은아랑 행수님께서 지금 제련소에서 그들을 막아서고 계시나, 무력 충돌이 일어날 위기입니다!"
유신우의 눈동자가 급격히 굳어졌다. 이제 막 손에 넣은 제련소와 무기 기술의 핵심이 통째로 날아갈 위기였다. 신우는 품에 넣었던 문서를 움켜쥐며 판결청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먹구름이 개경의 하늘을 무겁게 뒤덮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