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척추를 타고 올라온 한기가 뇌수를 얼려 버릴 듯 날카롭게 찔렀다.

숨을 들이쉬려 했으나 가슴팍에 가득 찬 압박감이 기도를 가로막았다. 뻑뻑하게 굳어 버린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기름때 묻은 흙바닥과 사정없이 흔들리는 횃불의 잔영이었다.

손목을 옥죄는 거친 삼밧줄의 감촉이 살을 파고들어 생생한 통증을 전했다. 팔과 다리는 단단한 참나무 형판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할 때마다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여기는 어디지?'

현대 외교부의 청사, 수석 전략가실의 대형 모니터 앞에서 밤을 새우며 중일 영토 분쟁 최종 보고서를 검토하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서늘한 냉기가 감도는 한옥의 하당(下堂)이었다. 사방에서 풍기는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거대한 이질감이 폭발했다.

웅성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망막 뒤편에서 푸르스름한 빛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뇌 중심부가 달아오른 인두로 지져지는 듯한 격통이 밀려왔다.

[경고: 대한민국 외교부 비밀 아카이브(Ministry of Foreign Affairs Secret Archive)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데이터베이스 접근 권한 확인: 수석 전략가 유신우.] [경고: 정사(正史)와의 시간선 괴리가 감지되었습니다. '역사 왜곡 동기화율'이 상승합니다.]

머릿속에 박혀 드는 활자들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외교부가 수십 년간 축적해 온 동아시아 국경 조약문, 영토 경계 사료, 그리고 중세의 지질학적 광맥 도면과 합금 제련 기술 문서들이 총망라된 절대적인 정보의 보고였다.

"아윽……!"

참지 못한 비명이 이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정보가 뇌신경 세포 하나하나에 강제로 이식되는 대가는 참혹했다.

명치끝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역류했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비릿한 액체가 거칠게 바닥으로 쏟아졌다. 검붉은 피였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바라보는 시야가 일순간 흐려졌다. 왼손 손끝이 급격히 굳어가며 감각이 마비되는 느낌이 전신을 타고 올라왔다. 아카이브에서 고가치의 기술 정보를 동기화하는 대가로, 원래 역사에서 고려가 멸망할 때 겪었던 물리적 붕괴의 반동이 육체로 고스란히 치환되어 돌아오는 비정상적인 등가교환이었다.

"서자 놈이 엄살은 풍년이구나. 겨우 결박 좀 당했다고 피를 토해?"

차가운 비웃음이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신우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비단으로 지은 화려한 호복을 입은 사내가 가죽 채찍을 손가락에 감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유인선. 이 몸의 아버지가 품은 적자이자, 평생 이 서자를 가문의 노비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며 멸시해 온 자였다. 그의 뒤에는 가문의 사정(私丁)들과 관아의 포졸 세 명이 험악한 얼굴로 버티고 있었다.

유인선이 다가와 신우의 턱단을 가죽신 끝으로 거칠게 걷어찼다. 고개가 꺾이며 입술 사이로 다시금 핏물이 배어 나왔다.

"네놈이 겁도 없이 가문의 내고(內庫)에 손을 대어 서책 인장을 훔쳐냈지. 그것도 모자라 벽란도 상인들과 결탁해 가문의 방적 대장을 위조했더구나. 네 놈의 그 미천한 서자 신분으로 감히 적장자의 권리에 손을 대?"

유인선은 품속에서 누런 종이 뭉치를 꺼내 신우의 얼굴 앞에 흔들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붉은색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유씨 가문의 정식 문장(紋章)이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네 놈의 가짜 날인이 찍힌 방적 대장이다. 이미 조종 관아에 이 대장을 제출하여 네 놈을 가산 절도 및 무단 침입죄로 고발했다. 관아의 판결이 떨어지는 즉시, 네 놈의 다리는 몽둥이질로 으스러질 것이고, 네 에미의 무덤은 가문의 선산에서 파헤쳐져 들개 먹이로 던져질 것이다."

유인선이 신우의 무릎뼈를 가죽 장화 굽으로 사정없이 짓밟았다.

"으윽……!"

신우의 이가 부딪히며 거친 신음이 터졌다. 뼈가 삐걱거리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그의 머리는 차갑게 식어 내렸다.

현대 외교부에서 각국의 온갖 기만술과 외교적 덫을 파헤쳐 온 감각이 깨어났다. 가문의 내고는 서자가 접근할 수 없는 삼중 자물쇠로 잠겨 있다. 인장을 도용했다는 주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유인선이 자신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고, 서자인 자신을 합법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가짜 장부를 조작해 들이민 것이 분명했다.

고려의 가문 법상, 적자의 증언과 물증이 있으면 서자는 특별한 재판 절차 없이도 현장에서 즉시 장형(杖刑)을 선고받고 투옥될 수 있었다. 법은 언제나 권력을 쥔 자들의 편이었다.

포졸 한 명이 허리춤에서 굵직한 물푸레나무 곤장을 꺼내 들며 신우의 등 뒤로 다가왔다.

"도련님, 이놈의 장형을 지금 집행할깝쇼? 관아로 압송하기 전에 버릇부터 고쳐 놓는 것이 상책입니다."

유인선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쳐라. 뼈가 드러날 때까지 때려라. 가문의 영을 어긴 서자 놈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포졸이 곤장을 높이 치켜들었다. 바람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가 하당의 적막을 깼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신우의 머릿속에서 아카이브가 급박하게 점멸했다.

[고려 법제 및 관습법 데이터베이스 검색 완료.] [검색어: 서자, 가산 획정, 가내 형벌, 구례(舊例).] [출처: 고려 의종 12년(1158년) '서자 가산 획정 처결 구례' 및 공민왕 5년 '도평의사사 형명사목'.]

신우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입가에 묻은 피를 혀끝으로 훔치며, 그는 곤장이 내리치기 직전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멈추어라."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극도로 건조하고 명확하여, 묵직한 힘으로 하당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곤장을 내리치려던 포졸이 자신도 모르게 동작을 멈췄다. 그의 눈에 비친 서자의 눈빛은 방금 전까지 고통에 신음하던 미천한 자의 것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권력의 최정상에서 타인을 부려온 제국의 외교관이 가진 오만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무엇 하느냐! 저 미친놈의 주둥이를 찢어놓지 않고!"

유인선이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신우는 포졸들을 무시한 채, 유인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조근조근 말을 이어갔다. 그의 어조에는 감정적인 분노도, 억울함도 없었다. 오직 서늘한 법리적 수치와 선례만이 존재했다.

"고려 의종 12년 무인년에 도평의사사의 전신인 중서문하성에서 발한 '서자 가산 획정 처결 구례'에 따르면, 가내의 사유 재산 분쟁에 있어 서자라 할지라도 독자적인 호적(戶籍)에 등재된 자는 가주(家主)의 직접적인 서명이 담긴 공문 없이는 사적인 형벌을 가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유인선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네놈은 이 가문의 노비나 다름없는 서자다!"

"내 어머니는 양인(良人) 신분으로 아버님과 정식으로 혼인 서약을 맺은 첩실이셨다. 나는 도평의사사 호부의 대장에 엄연히 유씨 가문의 서자로 등록되어 있으며, 독자적인 자산을 일부 소유할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았다. 또한, 공민왕 5년에 개정된 '도평의사사 형명사목' 제3조에 의하면, 관아의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가문 내에서 사사로이 장형을 가해 신체를 훼손할 경우, 이를 주도한 자는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가내 사형(私刑) 금지령' 위반으로 장 백 대에 처해지며, 그 가문의 이권은 도평의사사에 의해 일시 동결된다."

신우의 목소리가 점점 하당 전체를 울렸다.

"포졸들이여."

신우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겨누고 있는 관아의 포졸들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주는 압박감에 포졸들은 침을 삼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너희는 조종 관아의 녹을 먹는 공형(公兄)들이다. 이곳은 유씨 가문의 사유지이나, 너희가 든 곤장은 고려 조정의 법을 집행하는 도구다. 가주인 아버님의 서명도 없고, 판관의 정식 형장(刑狀)도 발부되지 않은 상태에서 적자의 사적인 사주만 받고 나를 타격한다면, 너희는 단순한 형 집행자가 아니라 조정의 관습법을 어긴 공범이 된다. 도평의사사의 감찰 탄핵이 두렵지 않은가?"

포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들은 권문세족의 집안 싸움에 끼어들어 적당히 용돈이나 챙기려 했을 뿐, 도평의사사의 탄핵이라는 무시무시한 법적 책임까지 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공민왕 치세 이후 사법 기강을 잡겠다며 도평의사사의 감찰관들이 개경 요지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는 소문은 포졸들도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 이봐 도련님…… 정식 형장이 없으면 우리도 곤란하오. 송사일이 사흘 뒤인데, 법대로 판관 나리의 판결이 나온 후에 치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소?"

포졸 하나가 곤장을 슬그머니 내리며 유인선의 눈치를 보았다.

"이 미련한 것들이 감히 뉘 앞이라고 주둥이를 놀리느냐! 내가 돈을 준 이유가 무엇인데!"

유인선이 분통을 터뜨리며 포졸의 멱살을 잡으려 했으나, 포졸들은 이미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법도라는 것은 본래 가진 자들의 방패막이지만, 그 틈새를 정밀하게 파고들면 가장 날카로운 창이 된다. 유신우는 현대 외교부에서 조약의 자구 하나를 가지고 강대국들의 군사 행동을 묶어두던 전략가였다. 고려의 허술하고 복잡한 관습법 뒤에 숨겨진 맹점을 찾아내는 것쯤은 그에게 유치원생의 장난감 블록을 맞추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신우는 자신을 결박한 삼밧줄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거친 밧줄이 손목의 피부를 긁어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오히려 싸늘한 냉소가 걸려 있었다.

"유인선."

신우가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자가 적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유인선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네놈이 미쳤구나! 감히 내 이름을 불러?"

"이 방적 대장의 위조 혐의를 들고 나를 관아에 고발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신우는 머릿속 아카이브에서 흘러나오는 또 다른 정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씨 가문이 벽란도의 독점 무역권을 유지하기 위해 도평의사사의 친원파 실세인 최영조에게 바쳤던 뇌물 장부의 누락된 세무 기록이었다.

"사흘 뒤, 관아의 송사일이 되면 너는 깨닫게 될 것이다. 네가 내 목을 조르기 위해 던진 그 가짜 장부가, 실은 유씨 가문 전체의 숨통을 끊어놓을 합법적인 올가미가 되어 돌아왔음을."

신우는 유인선을 꿰뚫어 볼 듯한 시선으로 쏘아보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내 목숨을 판돈으로 걸었으니, 네놈은 가문 전체의 이권을 판돈으로 내놓아야 할 것이다. 법정에서 보자꾸나, 형님."

하당을 가득 채운 침묵 속에서, 유인선은 차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주먹만 부르르 떨었다. 신우의 눈빛에 담긴 기이한 확신과 거대한 압박감이 그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