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명나라의 백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 네놈의 얄팍한 목숨은 물론이요 고려라는 사직 자체가 불바다가 될 것이다! 주원장 황제 폐하의 노여움을 정녕 감당할 수 있겠느냐!"

황보 득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의 보검을 움켜쥐었다. 사신의 직계를 상징하는 붉은 태슬이 그의 손끝목에서 미친 듯이 흔들렸다. 고려의 도평의사사 편전 안, 차가운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그 순간이었다.

신우는 은아랑의 급보를 전해 들은 직후였으나, 겉으로는 털끝만큼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아카이브에서 쏟아지는 역사 왜곡 동기화율의 반작용으로 왼팔 전체가 얼음 송곳에 찔린 듯 마비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는 척추를 꼿꼿이 세웠다.

쿵!

신우는 서안을 내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신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그의 걸음걸이는 거침이 없었다. 황보 득의 코앞까지 다가선 신우의 눈동자에는 지독할 정도의 살기가 서려 있었다.

"황제 폐하의 분노가 멀리 남경에 있다면, 이 유신우의 법과 지리는 바로 네놈의 목덜미에 닿아 있다."

신우의 낮은 목소리가 편전의 천장을 울렸다.

"압록강을 건넜다는 그 군대가 명나라의 공식 세조(世祖) 정벌군이라 믿는가? 허울 좋은 기만은 그쯤 해두어라. 그것은 남경의 조정이 공인하지 않은, 요동 군벌 해수 가문의 사병(私兵) 집단에 불과하다."

황보 득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신우는 확신했다. 지독한 두통과 함께 머릿속 아카이브가 실시간으로 분석해 낸 정밀 지리 데이터와 역사적 국경 조약문이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기철민이 지난번 개경 객잔에서 압수했던 여진 밀무역 거상 아라카의 명나라 밀지 조각. 신우는 소매 안에서 그을린 가죽 조각 하나를 꺼내 황보 득의 발밑에 던졌다.

"이 암호화된 표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녕 모른다 하진 않겠지. 요동 서쪽 경계에 대기 중이던 여진족 거상 아라카가 명나라 장수 해수와 주고받은 밀약서다. 공식 사신단을 미끼로 던져두고, 뒤로는 밀무역로를 통해 비공식 군대를 압록강 하구로 침투시키려 한 계책. 이것이 발각되는 순간, 남경의 주원장이 요동의 군벌 세력을 가만둘 것 같으냐?"

황보 득은 단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고려의 서자 나부랭이라 경멸했던 자가 대명 제국의 내부 군사 역학과 황실의 은밀한 갈등 구조까지 꿰뚫고 있었다.

"내 너희의 그 알량한 사병 무리를 요동의 흙먼지로 만들어 주마."

신우는 차갑게 선언하며 편전을 나섰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은아랑이 다급히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신우는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접근을 막았다.

"아랑, 지금 즉시 장강 상회의 가용 인력을 총동원해라. 전방 요동 관문으로 군수 물자를 보낸다."

"하지만 나으리, 도평의사사의 세무 규정상 전방으로 대량의 철강과 무기를 이동시키려면 호조와 통제사의 공식 승인이 필요합니다. 최영조의 잔당들이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법을 우회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때 어둠 속에서 기철민이 공문서 뭉치를 들고 걸어 나왔다. 그의 고지식한 얼굴에는 단호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고려 천자국의 구례(舊例) 중, 의종 연간에 제정된 '외적 침입 시 변방 군수 물자에 대한 임시 무세(無稅) 조항'을 찾아냈습니다. 도평의사사의 승인 없이도, 판결청의 직권으로 서경과 요동 경계에 한해 관세와 통행세를 면제하는 특별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이미 도장이 찍힌 공문입니다."

기철민이 내민 서류에는 고려 조정의 공식 옥새가 아닌, 판결청의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법의 허점을 합법적으로 해킹하는 신우의 수법을 이제 기철민도 완벽히 체득한 것이다.

"좋다. 철민은 개경의 세무 행정을 완벽히 통제하여 최영조 세력이 이 물자 흐름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차단해라."

신우는 지시를 내린 뒤, 이가온의 제련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련소는 거대한 용광로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현장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풀무질을 하던 장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안 됩니다! 고로의 온도가 너무 높아 벽돌이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고로 전체가 붕괴하고 제련소 사방이 불바다가 될 것입니다!"

이가온이 달아오른 쇠망치를 쥔 채 이마의 땀을 훔치며 소리쳤다. 고온 송풍관을 통해 유입되는 공기의 양이 너무 많아, 일반적인 진흙 벽돌로는 도가니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탄소 함량을 제어하기 위해 반드시 고온을 유지해야 했으나, 설비의 한계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신우는 머릿속 아카이브를 급박하게 가동했다. 뇌리를 때리는 격통과 함께 한 장의 오래된 도면이 눈앞에 가상 스크린처럼 펼쳐졌다.

'장인 이가온이 과거 실패하고 은닉했던 서경산 보라색 가마 내열 점토 도면.'

신우는 마비되어 가는 왼손을 억지로 움켜쥐며 이가온에게 다가갔다.

"가온, 네가 십 년 전 서경에서 실패하고 묻어두었던 그 보라색 점토를 기억하느냐?"

이가온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그걸 나으리가 어찌 아십니까? 그건 고열에는 견디지만 쉽게 깨져서 쓸모가 없다고 폐기한 가마터의 점토입니다!"

"바보 같은 소리. 그 점토는 단독으로 쓰면 깨지지만, 강가에서 채취한 고령토와 탄산칼슘 성분의 조개껍데기 가루를 3대 1의 비율로 배합해 구워내면 중세 어떤 벽돌보다 강한 고온 내열 벽돌이 된다. 당장 네 집 한구석에 숨겨둔 그 내열 점토 도면과 원석을 가져와라!"

이가온은 신우의 귀신 같은 통찰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즉시 수하들을 시켜 숨겨진 보라색 점토를 가져오게 했다. 신우가 제시한 정량적 배합 비율에 따라 급조된 내열 벽돌이 붕괴 직전의 고로 내벽에 덧대어졌다.

치이이익!

거진 폭발할 듯 요동치던 고로가 이내 안정을 찾으며 극도의 고온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을 띠는 액체 상태의 정밀 강철이 도가니를 타고 흘러내렸다.

"성공이다……! 탄소 함량이 정확히 0.8%에서 영수되는 최고의 강철이 만들어졌다!"

이가온이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신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명령했다.

"쉬지 말고 검과 갑옷을 찍어내라. 요동으로 보낸다."

* * *

사흘 뒤, 요동 초입의 험준한 독로강 고개.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계곡 사이로 명나라 해수 가문의 비공식 정예군 삼천 명이 조용히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려를 그저 손쉽게 짓밟을 수 있는 변방의 약소국으로 여겼다.

"고려의 방어선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압록강을 건너 개경까지 단숨에 진격한다!"

명나라 선봉장 주태가 환도를 치켜들며 외쳤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낡은 가죽 갑옷을 입은 고려의 민병대가 아니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은아랑이 이끄는 정예 경기병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착용한 갑옷은 햇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초정밀 경량 판갑이었다. 이가온의 제련소에서 보라색 내열 점토 고로를 통해 완성된 고탄소강 갑옷이었다.

"사격하라!"

주태의 명령에 따라 명나라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 올렸다. 하늘을 뒤덮은 화살비가 고려 경기병단의 갑옷에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깡! 까강!

금속성의 파열음과 함께 수백 발의 화살이 갑옷 표면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명나라 표준 철갑을 손쉽게 뚫던 화살촉들이 완전히 뭉개진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이게 무슨……! 저들의 갑옷이 어찌 저리 단단하단 말이냐!"

명나라 군사들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서려 들었다.

그 틈을 타 은아랑이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검 역시 이가온이 정밀 제련한 강철 특검이었다.

"고려의 땅에 발을 들인 대가를 치러라!"

고려 경기병단이 맹렬하게 대지를 박차고 돌격했다. 은아랑의 검이 명나라 선봉장의 환도와 맞부딪쳤다.

캉!

단 한 번의 격돌이었다. 명나라 군 장수들이 자랑하던 대명 제국의 표준 환도가 두 동강이 나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예리하게 단련된 고려의 강철 검은 명나라 군사들의 두꺼운 철갑을 종이 장처럼 찢어발겼다.

"괴물들이다! 고려 놈들의 무기가 우리 것보다 훨씬 강하다!"

"후퇴하라! 후퇴해!"

자신들이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에 서 있다고 믿었던 명나라 군대는, 오차 없이 벼려진 고려의 신형 무기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가시적인 무력의 격차 앞에서 대국의 자부심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요동의 험준한 고개는 명나라 군사들의 붉은 피로 물들었다.

* * *

같은 시각, 개경 도성의 한 음침한 객잔.

최영조의 잔존 세력인 가신들과 유인선이 은밀히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명나라 사절단의 부관이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유신우 그 서자 놈만 제거한다면, 우리 가문이 명나라에 요동의 지배권을 완전히 양도하는 조약에 서명하겠소. 그놈의 목을 가져다주시오."

유인선이 충혈된 눈으로 이빨을 갈며 속삭였다. 최영조가 실각할 위기에 처하자, 마지막 발악으로 나라를 팔아넘겨서라도 유신우를 암살하려 모의하는 현장이었다. 명나라 부관 역시 황보 득의 굴욕을 설복하기 위해 이 위험한 제안을 받아들이려던 찰나였다.

쾅!

객잔의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기철민이 이끄는 판결청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모두 꼼짝 마라! 역모 죄인들을 체포한다!"

유인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판관 따위가 어느 안전이라고 무엄하게 구느냐! 최영조 대감의 가신들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기철민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두꺼운 장부 한 권을 꺼내 들어 바닥에 던졌다. 그것은 먼지 쌓인 냄새가 나는, 원나라 기 황후 세력과의 밀통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비밀 장부였다.

"이것은 원나라 공녀 파견 당시에 누락되었던 최영조 가문의 비밀 세무 장부와, 원나라 한족 통역관이 원한을 품고 작성했던 군량 수급 서책이다. 은아랑 상주가 원나라 서안 상가에서 목숨을 걸고 회수한 진본이지."

기철민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타협도 없었다.

"너희 가문이 원나라에 군량을 밀수출하며 국가의 세를 포탈하고, 이제는 명나라 사절단과 결탁해 국경을 팔아넘기려 한 구체적인 물증이 여기 있다. 유인선, 그리고 최영조의 가신들아. 너희는 사법적으로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 전원 압송하라!"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그 장부가 왜 저자들의 손에……!"

유인선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모든 권력과 가문의 영광이, 유신우가 짜놓은 철저한 법리적 덫과 은아랑이 가져온 결정적 물증 앞에 단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며 그는 절망의 비명을 질렀다.

최영조 세력의 마지막 발악은 그렇게 시작되기도 전에 완벽하게 진압되었다.

* * *

늦은 밤.

요동 전선에서 명나라 대군을 완벽히 격퇴하고 국경을 사수했다는 전령이 개경 조정에 도착했다. 도평의사사는 물론 온 도성이 고려의 위대한 승리와 철혈 수상 유신우의 치세에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은아랑은 승전 보고서와 명나라 장수 해수의 항복 문서 사본을 품에 안은 채, 흥분된 걸음걸이로 신우의 처소로 향했다.

"나으리! 승전입니다! 요동의 평정이 끝났습니다! 명나라의 군대가 완전히 회군하였고, 황보 득은 이제 우리의 조건을 전면 수용하겠다고 서명했습니다!"

그녀는 기쁨에 겨워 신우의 집무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으리……?"

그러나 방 안의 풍경은 그녀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책상 위에 켜진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가운데, 유신우는 의자에 앉은 채 기이한 자세로 굳어 있었다. 그의 왼팔은 검게 변색되어 부자연스럽게 비틀려 있었고, 그의 입술 끝에서는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려 서안 위에 놓인 서류들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나, 나으리! 몸이 어찌 된 것입니까!"

은아랑이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신우는 그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으나,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 머릿속 아카이브가 미친 듯이 경고음을 울려대고 있었다.

[경고: 역사 왜곡 동기화율 42.8% 돌파.] [경고: 인과율의 반작용으로 인한 영구적 말초 신경 괴사 및 척수 마비 진행 중.]

그의 눈동자만이 겨우 움직여 은아랑을 향했다.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새어 나왔으나, 혀가 굳어 단 한 마디의 음절도 뱉어낼 수 없었다. 손가락 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 참혹한 거동 불능 상태.

동방의 대제국을 완성하기 위해 역사의 바퀴를 억지로 돌린 대가가, 마침내 그의 육체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의원! 당장 의원을 불러라! 아무도 없느냐!"

은아랑의 절규가 칠흑 같은 개경의 밤공기를 찢으며 울려 퍼졌다. 신우의 시야가 서서히 암전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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