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당장 의원을 불러라! 아무도 없느냐!"
은아랑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문틈을 넘어 칠흑 같은 개경의 밤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책상 위에 놓인 등잔불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유신우의 얼굴에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고개는 기이한 각도로 꺾여 있었고,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검붉은 피는 탁자 위에 넓게 펼쳐진 요동 승전 보고서의 여백을 빠르게 적셔 나갔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감각이 사라진 왼팔은 이미 어깨뼈 부근까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고,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찌르는 듯한 통증이 뇌수를 헤집었다.
[경고: 역사 왜곡 동기화율 42.8% 돌파.] [경고: 인과율의 반작용으로 인한 영구적 말초 신경 괴사 및 척수 마비 진행 중.]
머릿속에서 울리는 아카이브의 경고음은 이성이 아닌 기계적인 낙인처럼 차가웠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고려의 대승, 그리고 명나라의 회군을 억지로 끌어낸 대가는 신우의 육체를 밑바닥부터 파괴하고 있었다.
"나으리,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이리 가시면 안 됩니다!"
은아랑이 무릎을 꿇으며 그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벽란도를 주무르던 대행수의 대담함은 온데간데없고, 눈앞의 남자가 이대로 바스러질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만이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했다.
그때, 집무실의 덧문이 무겁게 열리며 거친 발소리가 들이닥쳤다. 판결청의 판관 기철민이었다. 그는 품에 가득 안은 도평의사사의 긴급 서류들을 책상 위에 내던지며 신우의 처참한 몰골을 확인하고는 안색을 굳혔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수상 나으리!"
"판관 나으리,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은아랑이 날카롭게 기철민을 제지하며 문밖을 경계했다.
"지금 최영조의 잔당들이 도성 안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수상 나으리께서 쓰러지셨다는 소문이 한 치라도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저들은 요동의 승전보가 조정에 정식으로 보고되기도 전에 사법 계엄을 빌미로 군사를 움직일 것입니다."
기철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의원도 부르지 않고 둘 수는 없지 않소! 나으리의 숨결이 이리 가쁜데!"
신우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두 사람의 논쟁을 들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핏덩이를 삼키며, 그는 뇌리 속 비밀 아카이브의 심부로 의식을 강제로 밀어 넣었다.
'아카이브. 동기화율 일시 고정 및 육체 회생 프로토콜 가동.'
[선택: 역사 왜곡 동기화율의 추가 상승을 담보로 한 30분간의 신경 일시 복구 제안.] [대가: 시술 즉시 동기화율 3.5% 추가 누적. 누적 후 동기화율 46.3%.]
몸이 무너져 내리더라도 지금 이 판을 끝내야 했다. 최영조가 옥중에서 가문의 마지막 사병들을 움직여 반정을 꾀하기 전에, 합법적인 법리의 칼날로 그들의 숨통을 끊어 놓아야만 고려의 대권이 완성된다.
'승인한다. 인출해라.'
순간, 척추를 관통하는 극심한 고열과 함께 굳어 있던 오른팔과 목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쳤다.
"컥……!"
신우가 한 차례 굵은 피침을 쏟아내며 상체를 앞으로 꺾었다. 은아랑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신우는 강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서슬 퍼런 이성이 다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의원은 필요 없다."
쇳소리가 섞인 음성이었으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호한 어조였다. 신우는 아직 마비가 풀리지 않은 왼손을 품속에 고정시킨 채, 오른손으로 붓을 쥐었다.
"나으리……!"
"기 판관, 서둘러라. 지금 최영조의 잔존 세력들이 서경의 군부와 연계해 도성 사법권을 찬탈하려 움직이고 있다. 옥중의 최영조가 보낸 밀지가 이미 도성 밖 성균관 유생들과 사병들에게 넘어갔을 터."
신우는 탁자 위에 놓인 빈 고발장과 영장 서식들을 앞으로 당겼다.
"최영조 가문의 완전한 몰수를 위한 영장을 집행한다. 명목은 '역모 및 공공 비자금 은닉 죄', 그리고 '적국과의 밀통 혐의'다."
기철민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으리, 그것을 입증할 명확한 법적 물증이 도평의사사 정식 합의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대간들의 반발이 거셀 것입니다."
"물증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신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은아랑을 바라보았다. 은아랑은 즉시 품속에서 낡고 묵직한 가죽 서책과 부서진 금속 조각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에 있습니다."
은아랑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실렸다.
"원나라 공녀 파견 당시 누락되었던 최영조 가문의 진짜 비밀 장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한족 통역관이 최영조에게 군량을 빼앗기고 원한을 품어 작성한 군량 수급 비망록이지요. 최영조가 원나라 기 황후 세력에게 고려의 군량 수만 석을 밀수출하고 그 대가로 사패지를 하사받았다는 증좌가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기철민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이, 이것이 실재했단 말인가? 최영조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가문의 치부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신우가 오른손 끝으로 탁자 위의 금속 조각을 가리켰다. 그것은 지난날 개경 객잔에서 기철민이 밀무역 거상들에게서 압수했던 여진족 아라카의 명나라 밀지 조각이었다.
"이 밀지 조각에 새겨진 특수 표식은 명나라 장수 해수의 사적인 가문 문양과 일치한다. 최영조는 원나라에 군량을 바치는 동시에, 여진 거상 아라카를 통해 명나라 군부와도 비공식 영토 할양 거래를 시도했다. 양다리를 걸치며 사직을 팔아넘기려 한 명백한 역적의 증거지."
신우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관인에 붉은 인도를 묻혔다. 그리고 온 힘을 쥐어짜 내어 최영조 가문 전원 압송 및 가산 압류 영장 위에 도장을 찍었다.
쿵.
무거운 인장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 법적 영장은 태조 개태 연간의 '대역무도죄 및 사직참칭법'에 근거한다. 도평의사사의 합의 없이도 판결청 수석 판관의 직권으로 즉시 집행이 가능하다. 기 판관, 당장 관병들을 이끌고 최영조의 사가로 가라."
"알겠습니다! 즉시 집행하겠습니다!"
기철민이 영장을 품에 안고 경례를 올린 뒤 신속하게 방을 나섰다.
이때,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 구석의 어둠 속에서 거친 기침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대장장이 이가온이었다. 그의 얼굴은 검은 그을음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손에는 가죽으로 감싼 도면 뭉치가 들려 있었다.
"나으리, 몸뚱이가 그 지경이 되어서도 법리 타령이오?"
이가온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그는 신우의 마비된 왼팔과 핏기 없는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가온, 제련소의 상황은 어찌 되었나. 서경 세력의 습격으로 탈취당했던 고탄소강 도면의 회수는?"
신우가 묻자, 이가온은 코방귀를 뀌며 품속의 도면을 팽개치듯 탁자 위에 던졌다.
"그 도둑놈들이 가져간 도면은 애당초 미완성본이었소. 진짜 핵심은 여기 있지. 나으리가 주신 송풍관 도면대로 고로를 아무리 개량해도, 고려의 진흙으로는 그 엄청난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고로가 다 깨져나가더란 말이오. 그래서 내가……."
이가온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서경에서 점토 채굴을 하다가 실패하고 숨겨두었던 '서경산 보라색 가마 내열 점토 도면'을 꺼냈소. 그 보라색 고령토를 섞어 구운 내열 벽돌로 고로 내벽을 감싸니, 마침내 도가니가 깨지지 않고 초고온을 버텨내더군. 이제 백련강을 넘어서는 진짜 철혈창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소."
3화에서 이가온의 집 구석에 숨겨져 있던 그 깨진 단지의 정체, 서경산 보라색 점토의 비밀이 마침내 풀린 순간이었다.
신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훌륭하군. 이가온, 그 내열 도면과 제련 공식을 조정의 군기시(軍器寺) 공식 법안으로 등록해라. 이제 고려의 모든 제련소는 사적인 가문 자산이 아닌, 도평의사사의 직속 통제를 받는 국유 시설로 전환된다."
"나으리다운 계산법이구려. 장인들의 밥줄을 합법적으로 국가에 묶어버리시다니."
이가온이 혀를 내두르면서도, 자신의 기술이 역사적인 국법으로 공인된다는 사실에 가슴을 펴며 물러났다.
* * *
같은 시각, 개경의 최영조 사가.
"무엇이라? 유신우가 쓰러졌다고?"
옥중에서 은밀히 풀려나 사가에 은신해 있던 친원파 거두 최영조는 심복의 보고를 받으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오만한 서자 놈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더니, 기어코 천벌을 받았구나! 예로부터 무리하게 법을 뜯어고치려던 자들의 말로는 늘 급사(急死)였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유인선이 흥분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숙부님, 지금이 기회입니다! 유신우가 거동 불능인 틈을 타, 옥중의 군사들과 서경의 잔당들을 깨워 도평의사사를 점거해야 합니다. 요동의 승전보는 조작된 것이라 선동하면 유생들도 우리 편에 설 것입니다!"
"오냐. 내 당장 도성 밖의 사병들을……."
콰앙!
최영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가의 대문이 무참히 부서지며 쇠갑옷을 입은 판결청 관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선두에는 차가운 표정의 기철민이 서 있었다.
"무슨 무례냐!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리 난입하는가!"
최영조가 호통을 쳤으나, 기철민은 흔들림 없이 품속에서 붉은 직인이 찍힌 영장을 펼쳐 보였다.
"역적 최영조, 그리고 유인선. 너희를 사직참칭 및 국가 기밀 유출 죄로 즉시 체포한다."
"법적 근거도 없이 감히 권문세족의 수장을 연행하려 드느냐! 도평의사사의 동의는 받았는가!"
최영조가 소리치자, 기철민은 냉소하며 영장 밑에 첨부된 서류들을 바닥에 뿌렸다. 그것은 최영조의 군량 밀수 비밀 장부와 여진 거상 아라카의 명나라 밀지 조각 사본이었다.
"태조 개태 연간의 구례(舊例)에 따르면, 외세와 내통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한 자는 도평의사사의 심의 없이 판결청 수석 판관의 권한으로 가산을 즉시 압류하고 삼족을 멸하게 되어 있다. 최영조, 네놈이 원나라 기 황후와 명나라 장수 해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고려의 군량을 팔아넘긴 증좌가 여기 실재하거늘, 더 무슨 법리를 논하겠느냐!"
"이, 이것이 어찌……!"
바닥에 떨어진 비밀 장부를 확인한 최영조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유인선은 다시 한번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원 압송하라! 그리고 최씨 가문의 모든 가산과 사패지를 국고로 환수한다!"
기철민의 서슬 퍼런 명령과 함께 관병들이 최영조와 유인선의 목에 무거운 칼을 씌웠다.
약점을 잡았다고 믿으며 마지막 반정을 꿈꾸던 권문세족의 거두들은, 자신들이 쳐놓은 법리의 그물망에 걸려 단 한 번의 칼부림도 해보지 못한 채 완벽하게 멸망했다. 그들의 가산은 전부 몰수되었고, 최영조 세력 전원은 하루아침에 개경에서 쫓겨나 함경도 변방의 귀양길로 오르게 되었다.
그들이 도성을 벗어나기도 전에, 유신우가 보낸 비밀 자객들에 의해 귀양길 객사로 위장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운명이었다.
* * *
이튿날 아침.
개경 조정의 도평의사사 대회당.
어스름한 새벽빛이 격자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운데, 조정의 모든 대간들과 신진사대부들이 숨을 죽인 채 정면의 상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최영조가 앉았던, 고려 최고의 권력을 상징하는 도평의사사 최고 수석 재상인 '수상(首相)'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수상 나으리께서 드십니다!"
전령의 외침과 함께 회당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유신우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의 왼팔은 여전히 비단 옷소매 속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고, 안색은 창백했으나 그의 걸음걸이에는 범접할 수 없는 철혈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대간들은 그가 마비되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이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단상 위에 올라선 신우는 수상의 자리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문의 서자로 태어나 온갖 멸시를 받던 신세에서, 법도라는 칼날 하나로 권문세족을 고사시키고 마침내 고려 조정의 유일무이한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른 것이다.
가문의 굴레는 완전히 부서졌고,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고려를 원·명 교체기의 대혼란을 집어삼킬 동방의 대제국으로 재창조하는 것뿐이었다.
신우는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이제 시작이다.'
그는 즉시 도평의사사 첫 명령을 하달했다.
"요동의 국경 획정을 위한 최종 회담을 거행한다. 본직이 직접 요동 전선으로 갈 것이다."
* * *
사흘 뒤, 요동 전선의 경계선에 세워진 거대한 군막 안.
차가운 북풍이 천막의 가죽을 사정없이 때리며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군막 내부의 분위기는 얼어붙을 듯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는 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두 거대한 제국의 전권 대표들이 앉아 있었다.
좌측에는 원나라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는 철갑의 장수들이, 우측에는 신흥 명나라의 기세를 업고 요동을 삼키려는 명나라 전권 사신 황보 득과 장수 해수가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서로를 찢어 죽일 듯한 살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의 한가운데, 고려의 수석 수상 유신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보 득이 먼저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고려의 수상 유신우! 감히 일개 제후국이 요동의 영토 획정 조약에 주권자로 참여하려 드는가! 이곳은 대명 천자국의 땅이다!"
원나라의 장수 역시 붉은 눈으로 신우를 쏘아보았다.
"북원의 영토를 더럽히는 고려 놈들에게 줄 땅은 단 한 치도 없다!"
양대 제국의 원수들이 내뿜는 압도적인 살기가 군막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나 유신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마비된 왼손 대신 오른손으로 아카이브에서 인출한 미래의 요동 영토 조약문을 천천히 탁자 위에 펼쳤다.
"너희 둘 모두, 착각하지 마라."
신우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울려 퍼졌다.
"이 요동의 땅에서, 누구를 살려두고 누구를 몰아낼지는 이제 이 유신우가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