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명나라 부사(副使)의 얼굴에서 핏기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빠져나갔다.

사신 황보 득은 정수리부터 얼음물이 쏟아진 듯 뻣뻣하게 굳어 제 부관을 돌아보았다. 부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허리춤의 붉은 비단 주머니를 감추려 했으나, 이미 편전 안의 모든 시선이 그 손바닥만 한 주머니에 고정된 뒤였다.

"그, 그것이 무슨……."

황보 득이 마른침을 삼키며 회유의 기색을 띠려 했지만, 유신우는 그 틈을 조금도 주지 않고 격렬하게 몰아쳤다. 신우는 단상 위의 지리 도면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그 가벼운 소리가 편전의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대감, 명나라 태조께서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기 위해 수만 명의 목을 베고 계신 작금의 상황을 내가 모를 줄 알았소? 황궁의 피바람을 피해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려는 해수(海壽) 가문이, 북방 여진의 거상 아라카와 손을 잡고 요동 뒤편의 밀무역로를 개척한 것쯤은 개경 저잣거리의 똥개도 냄새를 맡을 수준이외다."

신우는 품 안에서 묵직한 가죽 쌈지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갈가리 찢겨 숨겨져 있던 비단 밀지의 조각들이었다.

그것은 과거 개경 객잔에서 판관 기철민이 군사들을 이끌고 압수했던, 여진 밀무역 거상 아라카의 명나라 밀지 조각이었다. 세밀하게 그려진 지리 표식과 붉은 낙인이 황보 득의 부관이 차고 있는 비단 주머니의 자수 문양과 정확히 일치했다.

황보 득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 이것은 단지 요동 국경의 사소한 마찰을 피하기 위한 상인들의 사적인 교역로에 불과하오! 대명 제국의 공식적인 군사 행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단 말이오!"

"사적인 교역로라?"

신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 사적인 교역로를 위해, 도평의사사의 전(前) 영수 최영조 가문이 군량 수십만 석을 빼돌려 요동 서안으로 보냈단 말입니까?"

신우는 지체 없이 또 하나의 문서 더미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묵직한 가죽 표지의 서책이 쿵 소리를 내며 상 위에 떨어졌다.

그것은 은아랑이 벽란도 장강 상회의 비밀 창고에서 목숨을 걸고 회수해 온 최영조 가문의 비밀 장부였다. 원나라 공녀 파견 당시 누락되었던 세곡의 흐름과, 명나라 조정 내부의 한족 통역관이 원한을 품고 기록해 둔 군량 수급 조서가 그 안에 상세히 적혀 있었다. 최영조가 원나라와 밀통하는 동시에 명나라 해수 가문의 비공식 군대에게 고려의 군량을 바친 양면 배신의 결정적 증거였다.

"여진의 아라카가 확보한 우회로를 따라, 대명 제국의 정예 척후대 삼천 명이 요동 서쪽 경계를 넘어 고려의 의주 이북으로 잠입하려 했더군. 최영조가 제공한 군량을 먹으면서 말이오. 대감, 천자께서 허락지 않은 비공식 군사 행동을 요동의 장수들이 독단으로 벌였다는 사실이 남경의 황궁에 알려진다면…… 과연 누가 가장 먼저 효수되겠소?"

황보 득은 숨을 쉬는 법을 잊은 듯했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편전의 차가운 바닥 위로 툭툭 떨어졌다.

그가 요동 획정 협상에서 고려를 겁박하기 위해 준비했던 모든 군사적 카드가, 신우가 내민 단 몇 장의 종이 쪼가리 앞에서 완벽한 역모의 증거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극악무도한 의심증을 고려하면, 이 사실이 남경에 들어가는 순간 요동 사신단은 물론이고 그 배후에 있는 장수들의 삼족이 멸할 터였다.

"그대들이 요동 뒤쪽을 기습 선점하려 장치했던 그 우회 행군 계획 말입니다."

신우는 바둑판 위에 돌을 놓듯, 서경 이북의 요충지들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 나갔다.

"독로강(禿魯江) 초입, 압록강 지류의 여울목, 그리고 의주 동쪽의 계곡. 이 세 곳에 잠입한 대명의 무장 병력은 이미 고려의 법도를 어긴 무단 국경 침범자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우가 차가운 아우라를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어젯밤을 기해, 전원 고려군에 의해 무장 해제된 채 압송되는 중입니다."

"무, 무엇이라?! 그 장창병들을 고려의 오합지졸들이 어찌 감당했단 말인가!"

황보 득의 부관이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명나라의 정예 전포병과 장창수들은 고려의 낙후된 철기 조제 기술로는 뚫을 수 없는 철갑을 두르고 있었다.

그 의문에 답한 것은 신우의 뒤에 서 있던 판관 기철민이었다. 기철민은 신우의 지시에 따라 미리 준비해 둔 관청의 보고서를 엄숙한 목소리로 낭독했다.

"서경 이북 철령위 진입로에서 대명 제국의 무단 침입 부대를 요격한 것은, 이가온 장인이 특수 제련한 탄소강 장창과 판갑으로 무장한 정예 선봉대다. 그 무기들은 과거 서경산 보라색 가마 내열 점토를 사용하여 고온의 고로에서 불순물을 완벽히 제거해 낸 극상의 철기로 조제되었다."

기철민의 목소리에는 자부심과 함께 깊은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과거 이가온이 실패하고 숨겨두었던 서경산 보라색 가마 내열 점토 도면. 신우는 그것을 찾아내 고온 제련 고로의 붕괴 위기를 막아냈고, 마침내 명나라의 두터운 철갑을 종잇장처럼 뚫어버릴 고탄소강 병기들을 양산해 냈다. 최영조가 사법 계엄을 선포하려 날뛰는 동안, 신우는 이미 법리적 차압으로 확보한 가마터 4곳에서 이 신형 무기들을 비밀리에 찍어내어 북방의 군대를 완전히 재무장시켰던 것이다.

기철민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판짜기란 말인가.'

최영조의 비리 폭로, 명나라 사신의 약점 장악, 여진족 거상과의 밀무역 차단, 그리고 신형 무기를 통한 실질적인 군사적 제압까지. 유신우라는 존재는 단순한 조정의 관료가 아니었다. 왕의 권위를 빌려 쓰고 있을 뿐, 이제 고려의 실질적인 영토와 법제, 그리고 군사 통수권을 양손에 쥔 진정한 철혈의 지배자였다.

그러나 그 순간, 신우의 시야가 급격히 흐려졌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정수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격통이 시작되었다. 귀청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주파의 이명이 귓가를 때렸다.

[경고: 역사 왜곡 동기화율이 80.0%에 도달했습니다.] [인과의 징벌이 육체로 환원됩니다. 말초 신경 마비 및 청각 인지 장애가 진행됩니다.]

'윽…….'

신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확 퍼졌다.

왼손은 이미 팔꿈치 너머 어깨 부근까지 감각이 사라져 완전히 돌처럼 굳어 있었다. 이제는 양쪽 귀마저 물속에 잠긴 것처럼 황보 득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잡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사라진 세계에서, 신우는 오직 상대의 입 모양과 눈빛의 흔들림만으로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정신의 끈을 조금이라도 놓으면 그 자리에서 각혈하며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신우는 허벅지를 오른손 손톱이 살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며 정신을 지탱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오만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명나라 사신단을 쏘아보았다.

그가 보여주는 비정상적인 침묵과 냉혹한 응시는, 황보 득에게 오히려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강자의 여유로 비쳤다.

황보 득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고려의 서자라고 얕보았던 사내는 명나라 내부의 파멸적인 권력 암투를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이미 요동의 선봉대를 생포하여 목줄을 쥐고 있었다.

"유, 유 대감……."

황보 득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정녕 이 일을 남경의 황궁으로 보내지 않고, 우리 조정과 협상할 용의가 있단 말이오?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오?"

신우는 마비되어 가는 청각 속에서도 상대의 굴복을 읽어냈다. 그는 준비해 둔 고려 완판의 요동 지도를 책상 위에 거칠게 펼쳤다.

"조건은 간단하오. 첫째, 명나라는 철령위(鐵嶺衛) 이북의 고려 영토에 대한 모든 소유권 주장과 관할권 설정을 영구히 포기한다. 둘째, 요동 서부의 밀무역과 군량 수급 조서에 언급된 명나라 해수 가문의 비공식 군대는 고려의 사법권 아래 통제되며, 이들의 생사는 오직 고려 도평의사사의 결정에 따른다. 셋째……."

신우는 황보 득의 얼굴 바로 앞까지 상체를 기울였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에, 오히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게 편전 바닥을 울렸다.

"요동 서경 지대의 공동 지배권을 고려에 양도한다는 명 태조 주원장의 친필 밀약을 받아오시오. 이것이 내가 대감의 목숨과 대명 제국 요동 군부의 파멸을 막아주는 대가요."

"미, 미쳤소?! 요동의 지배권을 고려와 나누라니! 주원장 황제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당장 백만 대군을 몰고 와 고려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오!"

황보 득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쥐어짜며 소리쳤다. 그의 떨리는 손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의장용 검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대국의 권위를 모욕당한 사신의 분노이자,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새끼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황제 폐하의 분노가 두렵지 않단 말이오? 고려 전체가 피바다에 잠길 것이오!"

그 서슬 퍼런 위협에도 신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비된 왼팔을 넓은 도포 자락 속에 숨긴 채, 오직 오른손 하나로 책상을 짚고 황보 득을 내려다보았다.

"대감."

신우의 목소리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직 고려를 대제국으로 만들겠다는 철혈의 의지만이 그의 눈동자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남경에 계신 주원장 황제의 분노는 너무나 멀고, 대감의 목을 당장 벨 수 있는 고려 수장의 법과 지리는 이토록 가깝소."

신우는 황보 득이 쥐고 있던 검 자루 위로 자신의 오른손을 얹으며, 차갑게 속삭였다.

"검을 뽑아 보시오. 대감이 그 검을 반 치라도 뽑는 순간, 이곳 개경에서 대명 제국 사신단의 목이 가장 먼저 떨어질 것이고, 내일 아침 요동의 십만 대군은 천자를 배신한 역적의 무리가 되어 황제의 숙청 칼날 아래 먼저 스러질 것이오. 선택해 보시오."

황보 득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검을 쥔 그의 손가락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편전 안의 공기는 이제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무겁게 가라앉았다.

황보 득의 손끝이 검 자루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스스로 대명 제국의 전권 사신이라 자부하던 자의 손이 무참하게 꺾이는 순간이었다. 편전 바닥을 딛고 선 그의 무릎이 미세하게 꺾이며, 황보 득은 마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목석처럼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이제 백지장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 내 어찌 감히 황제 폐하의 밀약을 독단으로 약조할 수 있단 말이오. 그것은 사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오."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라면, 권한을 가진 자를 이곳으로 불러오면 될 일이지요."

신우는 황보 득을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의 시야는 이미 주변부부터 검게 타들어 가듯 좁아져 있었다. 이명은 이제 뇌수를 긁어대는 금속성 소음으로 변해, 기철민이 옆에서 숨을 들이쉬는 소리조차 완벽히 차단해 버렸다.

하지만 신우는 흐려지는 통각 속에서도 자신의 오른손 끝에 남아 있는 감각을 집중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요동 지도, 그 위에 놓인 명나라 사신단의 인장.

"대감의 직인이 찍힌 서한을 황제 폐하가 아닌, 요동을 실질적으로 관할하는 진군장군(鎭軍將軍)에게 보내시오. 대감이 여진의 아라카와 주고받았던 밀지, 그리고 최영조 가문이 제공한 군량 장부의 사본을 동봉해서 말이오."

신우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편전 안의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법적 구속력을 띠고 있었다.

"요동 서경의 공동 지배를 명문화하는 초안에 서명하고, 이를 요동 군부에 격문으로 띄우시오. 만약 요동의 장수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하고 싶다면, 천자에게 상소를 올려 고려와의 공동 관할을 건의하는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오. 사신 대감은 그저 그 징검다리가 되시면 됩니다."

황보 득은 신우의 제안에 담긴 지독한 계책을 깨닫고 몸서리를 쳤다.

이것은 단순한 영토 획정이 아니었다. 요동을 지키는 명나라의 변방 군부와 남경의 황궁 사이에 '의심'이라는 쐐기를 박아넣는 수법이었다. 요동의 장수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고려의 요구를 묵인하거나 오히려 천자에게 고려와의 연대를 건의하게 만든다. 그 순간, 요동은 대명 제국의 완벽한 영토가 아닌, 고려와 명나라 군부가 권력을 나누어 갖는 기묘한 완충지대로 변모할 터였다.

"그대…… 그대는 고려의 서자가 아니라, 천하를 도려내려는 악귀로군."

황보 득의 떨리는 음성이 웅웅거리는 이명을 뚫고 신우의 뇌리에 희미하게 닿았다.

신우는 대답 대신 묵묵히 붓을 들어 먹을 적셨다. 그리고 황보 득의 앞에 백지를 밀어 놓았다.

"쓰시오. 대감의 가문과 요동 십만 군부의 명줄이 이 붓끝에 달려 있소."

황보 득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붓을 쥐었다. 그가 한 자 한 자 초안을 써 내려가는 동안, 편전의 구석에 서 있던 기철민은 침을 삼키는 것조차 잊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명나라의 사신이…… 고려의 서자 앞에서 항복 문서를 쓰고 있다.'

이것은 고려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외교적 대첩이었다. 무력으로 대국을 꺾은 것이 아니었다. 대국 내부의 권력 역학 관계, 황제의 잔혹한 성정, 그리고 국경 지대의 밀무역이라는 미시적인 정보 조각들을 엮어 거대한 그물을 짜낸 결과였다. 기철민은 유신우라는 사내의 존재 자체에 깊은 경외감과 함께, 등등한 공포를 느꼈다. 이 사내의 손에 고려의 사직이 들려 있었다.

사신 황보 득이 마침내 서명을 마치고 개인 인장을 찍었다. 붉은 인경이 백지 위에 선명하게 박히는 순간, 신우는 지체 없이 그 문서를 거두어들였다.

"기 판관."

"예, 예! 대감!"

기철민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이 서한을 즉시 벽란도의 은아랑에게 전달하시오. 은 행수에게 장강 상회의 비밀 전령을 통해 요동 지휘부로 격송하라 이르시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할 것이오."

"명령대로 거행하겠나이다."

기철민이 문서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신속하게 편전을 빠져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순간, 신우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극심한 오한과 함께, 목구멍 끝까지 뜨거운 핏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신우는 황급히 도포 소맷자락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소매 안쪽이 순식간에 검붉은 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경고: 역사 왜곡 동기화율 81.5%.] [말초 신경 마비가 상반신 전체로 확산됩니다. 호흡 근육의 일시적 경직이 발생합니다.]

달아오른 인과의 대가가 육체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원래 역사 속에서 고려가 명나라의 압박에 굴해 철령위 이북을 빼앗기고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던 인과가, 신우가 강제로 국경을 뒤틀어버린 반작용으로 돌아온 것이다.

왼팔은 이제 완전히 감각이 없어 대리석 조각처럼 매달려 있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이명은 이제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뇌를 뒤흔드는 진동이 되어 신우의 균형 감각을 무너뜨렸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아직…… 마지막 패를 완전히 쥐지 못했다.'

신우는 입안에 고인 피를 억지로 삼키며, 주저앉아 있는 황보 득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대감은 요동의 밀약이 이행될 때까지 개경의 영빈관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을 것이오. 대감의 호위 무사들은 이미 고려 순군만호부에 의해 무장 해제되었으니, 헛된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외다."

황보 득은 부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고, 그의 부관 역시 넋이 나간 채 바닥만 바라보았다.

신우는 벽을 짚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며 천천히 편전의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바닥에서부터 찌릿한 마비가 올라왔으나, 겉으로는 완벽하게 품위를 유지하는 걸음걸이였다.

편전의 무거운 나무 문이 열리고, 차가운 가을바람이 신우의 얼굴을 때렸다.

그 바람을 맞으며 신우는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문밖의 회랑을 지나 정원으로 들어선 순간,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소리 없이 나타나 신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은아랑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 대신, 극도의 긴장감과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신우의 소맷자락에 묻은 붉은 피와, 부자연스럽게 늘어진 그의 왼팔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나으리…… 몸이 어찌 된 것입니까? 정녕 그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입니까?"

신우는 마비된 청각 탓에 그녀의 목소리를 정확히 듣지 못했다. 하지만 입 모양과 다급한 눈빛만으로도 그녀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신우는 차갑게 대꾸하며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은아랑은 신우의 앞을 단단히 막아서며, 품 안에서 붉은 낙인이 찍힌 또 다른 밀지를 꺼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요동에서 방금 장강 상회의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보낸 척후선이 압록강 하구에서 명나라의 공식 사신단이 아닌, '또 다른 명나라 대군'의 깃발을 포착했다고 합니다."

은아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보 득이 이끄는 사신단은 미끼에 불과했습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파견한 진짜 정벌군이, 이미 고려가 요동의 척후대를 격파하기 전부터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는 전령입니다. 이대로라면 우리가 압송하는 명나라 포로들의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개경이 대국의 대군에게 포위될 것입니다!"

신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카이브의 연산조차 예측하지 못했던, 원래 역사적 흐름의 거대한 관성이 명나라의 진짜 대군이라는 형태로 고려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었다.

마비된 몸을 이끌고 대국의 사신을 무릎 꿇린 바로 그 순간, 고려의 국경 너머에서 진짜 파멸의 군대가 진격해 오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지는 극심한 불통 속에서, 신우는 밀지를 든 은아랑의 손끝을 바라보며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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