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 나는 개경의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도평의사사 마당을 울린 전령의 비보는 조정의 공기를 순식간에 동결시켰다.
명나라 대제국의 초대 정식 외교 칙사, 황보 득(皇甫 得)이 이끄는 십만 대군이 요동 국경에 집결했다는 소식은 도성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최영조의 효수된 머리가 굴러떨어진 자리에 채 마르지 않은 피가 흥건하건만, 고려의 지배자들은 새로운 외세의 거대한 그림자 앞에서 다시금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크윽……."
유신우는 턱 끝으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혈흔을 거칠게 닦아냈다. 입안 가득 비린 맛이 고였다. 아카이브가 뇌리를 강타하며 제시한 경고창이 망막 위에서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경고: 역사 왜곡 동기화율 35.4% 돌파.] [인과율 환원 현상 진행: 좌측 상지 기능 마비 및 흉격 내출혈 심화. 무리한 정보 인출 시 말초 신경 괴사 영역이 확산됩니다.]
왼팔은 이미 어깨 밑으로 감각이 소실되어 가죽 부대처럼 덜렁거렸다. 손가락 끝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주먹조차 쥐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신우는 무너지려 하는 무릎을 곧추세웠다. 옆에서 은아랑이 사색이 되어 가녀린 어깨로 그의 몸을 부축하려 하자, 신우는 단호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흔들리지 마라. 적들의 눈이 도처에 있다."
그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낮고 무거웠으나,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지만 신우 공, 몸이 이 지경이신데 명국의 사신단이라니요! 저들은 최영조가 끌어들인 사병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황제의 정규군입니다. 당장 편전으로 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은아랑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벽란도의 온갖 풍파를 겪은 그녀로서도 대명 제국의 십만 대군이라는 실체적인 폭력 앞에서는 이성을 유지하기 힘든 법이었다. 판결청의 판관 기철민 역시 창백한 얼굴로 신우의 앞을 막아서며 조율을 건넸다.
"유 대감, 은 행수의 말이 옳소. 아직 도평의사사의 전령들이 군사를 온전히 수습하지 못했소. 최영조의 당여들을 척살하느라 개경의 방비는 구멍이 뚫린 상태요. 지금 명국의 사신을 대면하는 것은 호랑이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밀어 넣는 격입니다."
"틀렸소, 기 판관."
신우는 소매 속에 마비된 왼손을 밀어 넣고, 오른손으로 도평의사사의 최고 집무관인 수석 사관의 법복을 단정히 추슬렀다.
"저들이 국경에서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사신을 먼저 보냈다는 것은, 아직 판을 깨뜨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요. 군사적 위협은 외교적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가장 저렴한 수단일 뿐이지. 여기서 우리가 틈을 보이면, 요동뿐만 아니라 삼한의 사직 전체가 저들의 군홧발 아래 들어갈 것이오."
신우는 편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도평의사사 바닥에 점점이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으나, 그의 등은 추호의 굽힘도 없이 꼿꼿했다.
* * *
개경의 조용 편전(朝容便殿).
원래라면 고려의 왕과 고위 관료들이 국사를 논해야 할 장소는 이미 외국의 사절단에 의해 점거된 상태였다. 명나라의 초대 정식 외교 칙사 황보 득은 황금색 자수가 놓인 관복을 입고 오만한 자세로 상석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의 뒤로는 철갑을 두른 명나라 정예 호위병들이 삼엄하게 도열해 있었고, 편전의 조정 관료들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고려의 조정이 이토록 무질서할 줄이야. 도성 한복판에서 역신들의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니, 천자국의 사신으로서 참으로 개탄스럽도다."
황보 득은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불쾌하다는 듯 소매로 코를 가리며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의 시선이 편전 문을 열고 들어서는 유신우에게 닿았다. 옅은 핏자국이 남은 입술, 소매 속에 감춘 왼손, 그리고 병색이 완연한 안색. 황보 득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고려의 실권을 잡았다는 자가 고작 이런 애송이 서자 출신이라는 사실에 내심 안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대가 도평의사사를 장악했다는 유신우인가? 소문보다 훨씬 유약해 보이는구려."
황보 득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부관이 붉은 비단으로 감싼 조서를 받들어 상 위에 올려놓았다. 명 태조 주원장의 친필이 담긴 영토 양도 영장이었다.
"본국 황제 폐하의 칙서다. 원래 원나라가 관할하던 철령(鐵嶺) 이북의 땅은 이제 대명 제국의 영토로 귀속됨이 마땅하다. 고려는 지체 없이 철령 이북의 모든 군현에서 군사를 철수시키고, 관할권을 우리 명국에 인도하라. 만약 이를 거부할 시, 국경에 대기 중인 십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개경을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편전에 모인 고려의 대신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철령 이북은 고려의 북방 방어선이자 영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요충지였다. 그것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째로 넘겨달라는 요구는 국가의 주권을 포기하라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황보 득은 승리를 확신한 눈빛으로 신우를 내려다보았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천자국의 명분 앞에서는 그 어떤 간계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오만함이었다.
그러나 유신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황보 득의 조서를 꿰뚫어 보았다.
"칙사 대감의 기개가 참으로 하늘을 찌르는구려. 허나, 대명의 대제국이 이토록 허술한 법리와 궁색한 명분 위에 서 있는 줄은 내 미처 몰랐소."
"무엇이라? 네놈이 감히 천자의 조서를 모독하는 것이냐!"
황보 득이 탁자를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호위병들이 일제히 대도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편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얼음판으로 변했다.
신우는 천천히 소매에서 상소문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은아랑의 장강 상회를 통해 도평의사사 밀실에서 확보한 고려 태조 이래의 '고인 세종 경계령(高人 世宗 境界令)'과 정석 토지 령의 법적 사료였다.
"모독이라니요. 나는 오직 명백한 법리와 선례를 말하고 있을 뿐이오. 대명 제국이 주장하는 철령 이북의 귀속권은 '원나라가 관할하던 영토'라는 전제 하에 성립되오. 그러나 고려의 건국 초, 태조 성황제께서 세우신 정계비와 고려의 법전인 정석 토지 령의 '고인 세종 경계령'에 따르면, 철령은 본래 삼한의 고유 영토이자 고구려의 옛 땅임이 명시되어 있소."
신우의 목소리가 편전의 높은 천장을 때렸다.
"원나라가 무력으로 강탈했던 장소를, 그 원나라를 몰아낸 대명 제국이 다시금 무력으로 요구하는 것은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나라의 건국 이념인 흥한멸호(興漢滅胡)의 대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순이오. 대명은 스스로를 원나라의 약탈 행위를 계승하는 도적의 무리로 규정하려는 것인가?"
"이, 이 무례한 놈이……!"
황보 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려의 일개 관리 따위가 명나라의 건국 명분과 법리를 역이용해 자신을 압박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또한, 지리적으로도 그대들의 주장은 허무맹랑하오."
신우는 머릿속의 비밀 아카이브를 강하게 구동했다. 뇌를 찌르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두통이 밀려왔지만, 그의 망막 위로 요동 일대의 정밀한 지형도와 역사적 국경선 조약문들이 3차원 투사물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동기화율 36.1%로 상승. 경미한 시각 왜곡 발생.]
신우는 통증을 누르고, 아카이브가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수치와 지명을 거침없이 읊조렸다.
"황제께서 지목하신 철령위(鐵嶺衛)의 위치는 현재 요동의 봉집산(奉集山)과 백산(白山)의 경계선에 걸쳐 있소. 그곳은 험준한 산악 지대로, 연간 강수량이 극히 적고 토질이 척박하여 십만 대군이 주둔할 수 없는 황무지오. 설령 그곳에 위소를 설치한다 한들, 군량 수급을 위해선 서경과 압록강을 거쳐야만 하오. 대국이 이토록 군사적으로 무가치하고 보급이 불가능한 산간 요충지를 굳이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지리적 실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오직 백성들을 공갈 협박하기 위한 명분으로 지명을 도용한 것에 불과하지 않소!"
"네, 네놈이 요동의 지리를 어찌 그리 정밀하게 안단 말이냐!"
황보 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경악과 공포가 서렸다.
요동의 상세한 지형과 보급로의 취약점은 명나라 군부 내에서도 극비 중의 극비였다. 고려의 일개 서자가 명나라의 고위 장수들조차 헷갈려하는 철령위의 정밀한 위치와 지리적 한계를 정량적인 수치까지 들이대며 논파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修辭)가 아니라, 전장을 손바닥 보듯 꿰뚫어 보는 전략가의 안목이었다.
* * *
잠시 정회된 편전의 뒤편, 음침한 복도에서 기철민과 은아랑이 신우를 둘러쌌다.
"대단하십니다, 신우 공. 명국의 사신이 저토록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은아랑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기철민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유 대감, 말로는 저들을 이겼을지언정 국경의 십만 대군은 현실이오. 저들이 명분을 잃었다 하여 군사를 물리겠소? 명나라 군부가 무력으로 밀어붙인다면 고려는 단 사흘도 버티지 못할 것이오."
신우는 마비되어 굳어버린 왼손을 오른손으로 주무르며 냉소했다.
"기 판관, 군대는 밥을 먹는 유기체요. 명나라 군부가 요동에 십만 대군을 집결시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재정적 재앙을 의미하오. 더구나 저들은 지금 요동을 온전히 지배하지 못하고 있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요동 서쪽 경계에는 여진의 세력가 아라카와 나하추의 잔존 세력이 여전히 명나라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소. 명나라 군부는 고려를 치기 위해 군력을 소모할 여유가 없소. 만약 고려와 장기전에 돌입하는 순간, 여진족들이 명나라의 배후를 들이칠 것이오. 저들이 원하는 것은 실전이 아니라, 고려를 겁박해 손쉽게 요동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오."
신우는 은아랑을 돌아보았다.
"은 행수, 내가 지난번 벽란도에서 준비하라고 했던 이가온의 물건은 어찌 되었소?"
은아랑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장인 이가온이 과거 실패하고 숨겨두었던 서경산 보라색 가마 내열 점토 도면을 완전히 회수했습니다. 그 고령토를 배합하여 만든 내열 벽돌로 제련소의 고로를 개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고로가 무너지지 않고 고온의 송풍을 견뎌내어, 하루에 수백 자루의 탄소강 장창과 갑주용 철판을 찍어내고 있습니다. 서경의 점토가 가마의 열기를 가두어 준 덕분에 제련 효율이 이전의 세 배에 달합니다."
"훌륭하군."
신우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이것으로 우리의 군사적 실체는 완성되었다. 도망친 최영조의 사병들을 흡수하고 이가온의 고탄소강 무기로 무장한 아군의 정예병들이 국경에 배치된다면, 명나라도 결코 전면전을 선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들의 숨통을 끊어놓을 결정적인 목줄이 내 손에 있소."
신우는 품 속에서 오래된 서책 한 권을 꺼냈다. 은아랑이 목숨을 걸고 원나라 서안 상가에서 회수했던 비밀 서책이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기철민이 묻자, 신우가 책장을 가볍게 넘기며 답했다.
"과거 원나라 기 황후 세력에게 공녀를 파견할 당시 누락되었던 최영조 가문의 비밀 장부와, 당시 군량 수급을 담당했던 한족 통역관의 원한 섞인 군량 수급 서책이오. 여기에는 최영조가 명나라의 건국 공신이자 현재 사신단에 포함된 해수 가문의 장수들과 밀통하여 요동의 군량을 조직적으로 횡령하고 밀무역을 자행한 정황이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소."
신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저들이 대국의 정의를 부르짖으며 우리를 압박할 때, 자신들의 가장 추악한 비리가 천하에 공개된다면 주원장의 서슬 퍼런 숙청의 칼날이 어디로 향하겠소? 사신 황보 득은 물론이고, 그의 배후에 있는 명나라 군부 전체가 목이 날아갈 판이오."
* * *
다시 시작된 조용 편전의 협상 테이블.
황보 득은 한층 차분해진 태도로 신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신우의 지리적 공세에 밀려 전면전의 명분이 약해지자, 교묘한 회유책으로 노선을 변경하려 했다.
"유 대감의 박식함에는 본 칙사도 깊은 감명을 받았소. 허나 대국과 소국의 이치는 변하지 않는 법. 우리 명나라가 요동의 일부 영토를 양보받는 대신, 고려에 제공할 수 있는 혜택도 무궁무진하오. 황제 폐하께 상소를 올려 조공의 액수를 감면해주고, 고려의 왕실을 대명 제국의 이름으로 보장해주겠소. 군신(君臣)의 예만 올바르게 갖춘다면, 서로 피를 흘릴 필요는 없지 않겠소?"
황보 득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타협안을 제시했다. 고려의 나약한 사대부들이라면 넙죽 절하며 받아들였을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유신우는 황보 득의 말을 들으며 실소를 참지 않았다. 그의 웃음소리가 편전 가득 차갑게 울려 퍼졌다.
"하하하…… 참으로 관대하신 제안이구려, 황보 대감."
"무엇이 우스운가?"
"대국이 소국을 배려하는 척 가면을 쓰고 있으나, 그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한 썩은 내가 여기까지 진동하기 때문이오."
신우가 오른손으로 최영조의 비밀 장부와 한족 통역관의 군량 수급 서책을 황보 득의 앞에 거칠게 던졌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서책이 상 위로 미끄러져 황보 득의 손끝에 닿았다.
"이것을 보시오."
황보 득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책의 첫 장을 넘겼다. 이내 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색은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고, 서책을 쥔 그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이, 이것이 어찌하여 네놈의 손에……!"
"최영조가 원나라와 밀통하는 과정에서 명나라 군부의 해수 가문과 결탁해 요동의 군량 수만 석을 밀무역으로 빼돌린 상세한 장부요. 한족 통역관이 원한을 품고 기록한 이 수치들은 명나라 조정의 사정 기관인 도찰원(都察院)이 그토록 찾고 싶어 하던 증거들이지. 명 태조 주원장 황제께서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감이 더 잘 아실 터."
신우는 상 위로 몸을 기울이며 황보 득의 귓가에 저승사자의 음성처럼 속삭였다.
"만약 이 장부와 밀지들이 남경의 황궁으로 직송된다면, 대감과 대감의 가문은 물론이고 요동에 집결한 십만 대군의 수뇌부 중 몇 명의 목이 보존되겠소? 황제의 불같은 진노 아래, 구족(九族)이 멸하는 화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소?"
황보 득은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처럼 턱을 벌린 채 신우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고려 서자는 더 이상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었다. 명나라 조정의 가장 은밀하고 치명적인 치부를 움켜쥐고 흔드는 괴물이었다. 대국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거대한 몽둥이가, 신우가 쥔 단 한 권의 장부 앞에서 종이호랑이로 전락해 버렸다.
"그, 그대가 정녕…… 대명 제국과 파국을 원하는가?"
황보 득의 목소리는 이제 애원에 가까웠다.
신우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황보 득의 절망을 즐겼다.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저 오만한 대국의 칙사를 완벽하게 무릎 꿇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신우는 황보 득의 뒤에 서 있는 부관의 품속에서 살짝 흘러나온 붉은 비단 주머니의 문양을 포착했다.
그것은 아라카와 명나라 해수 가문이 비밀리에 주고받던 밀무역의 암호 표식이었다. 개경 객잔에서 기철민이 압수했던 바로 그 밀지의 조각과 완벽히 일치하는 형태였다.
명나라 사신단의 핵심 인물이 단순히 영토 획정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여진족 거상 아라카와 결탁해 고려 내부에서 비공식 밀수 주단을 운영하며 무언가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신우의 눈빛이 극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파국을 원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대감의 내부에 있는 쥐새끼들인 것 같구려."
신우는 가볍게 조소를 흘리며, 황보 득의 부관이 차고 있는 비단 주머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감의 바로 등 뒤에, 천자를 배신하고 여진의 거상 아라카와 밀통하여 고려의 국경을 통째로 팔아넘기려는 비공식 밀수 주단이 잠입해 있다는 사실을…… 대감께선 정녕 모르고 계셨소?"
그 순간, 편전 안의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황보 득의 부관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고, 황보 득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새로운 반전이자, 명나라 사신단을 파멸로 몰고 갈 치명적인 덫이 편전 한복판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