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단속 봉합(Interrupted suture)이 아니었습니다. 피고는 수술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장관 문합부에 무리하게 연속 봉합(Continuous suture)을 시행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법정의 공기를 날카롭게 가른다. 실물 크기로 제작된 소장 모형 위로 당신의 길고 정교한 손가락이 미끄러진다. 의료용 봉합사를 쥐어짜듯 당기자, 괴사된 조직을 모사한 고무 막 사이로 서서히 틈이 벌어진다.

"연동 운동을 하는 장관에 가해지는 장력을 무시한 채 연속 봉합을 고집하는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환자 배 속에 남겨두는 것과 같습니다. 집도의 이태훈 교수가 수술 기록지에 '이중 단속 봉합을 통한 완벽한 재건'이라고 적어 넣은 것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물리적 결과입니다."

피고석의 이태훈 교수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한다. 그의 변호를 맡은 대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안절부절못하고, 재판장의 시선은 당신이 제시한 3D 재현 화면과 메디컬 일러스트에 고정된다. 기록지 조작의 냄새를 눈치챈 법정 안이 웅성거림으로 가득 찬다. 당신의 메스 같은 반박이 세진병원의 철옹성 같던 논리를 완벽히 베어낸 순간이다.

오후 재판이 휴정되자마자, 상대 측 대리인이 다급하게 당신의 소매를 이끈다. 법원 지하의 밀폐된 컨퍼런스룸. 테이블 위에는 채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가 풍기는 백색 서류봉투가 놓여 있다.

"백강현 변호사. 아니, 백강현 선생."

세진병원 기획조정실장이 잔뜩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밀어 보낸다. 서류의 첫 페이지, 합의금 란에 적힌 숫자는 무려 30억 원.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은밀하고도 매혹적인 단서 조항이 첨부되어 있다. '세진병원 산하 의료재단 기금을 통한 메디컬 센터 복직 지원, 및 보건복지부 면허 재교부 행정 처분 지원.'

"의사 면허를 다시 쥐어드리겠다는 소리입니다. 백 선생도 결국 변호사 배지 세탁해서 다시 수술실로 돌아가고 싶은 거 아닙니까? 이쯤에서 합의하고 서로 윈-윈(Win-win) 합시다. 잃어버린 메스를 다시 잡을 기회입니다."

눈앞의 숫자가 아른거린다. 박탈당했던 천재 외과의로서의 삶, 심장을 뛰게 하던 수술실의 무영등이 손 끝에 닿을 듯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합의에 서명하면 세진병원의 조직적 범죄는 덮이겠지만, 당신은 합법적으로 복귀해 칼을 쥘 수 있다. 반대로 이 거액의 제안을 걷어찬다면, 당신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더욱 외롭고 가혹한 법정 투쟁을 이어가야 한다.

완벽한 퇴로와 끝을 알 수 없는 복수. 당신의 시선이 백색 합의서의 서명란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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