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모니터의 푸른 광선이 당신의 굳은 얼굴을 차갑게 비춘다. 화면을 가득 메운 것은 세진병원 기획조정실장 김태수의 친필 서명이 날인된 극비 임상시험 계획서와 가명 처리된 환자들의 은밀한 바이탈 시트다.

"TX-701. IRB(임상시험심사위원회) 미승인 표적항암제 불법 투여."

당신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린다. 그것은 간세포암 말기 환자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잔혹한 생체 실험의 증거였다. 임상 데이터의 수치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AST 4,200 U/L, ALT 3,850 U/L, 총 빌리루빈 22.4 mg/dL]. 약물의 치명적인 간 독성으로 인해 발생한 전격성 간부전(Fulminant hepatic failure)과 뒤이은 전신성 혈관내 응고장애(DIC). 환자들이 다장기 부전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김태수를 비롯한 병원 수뇌부는 '특이 체질에 의한 패혈증 소크'로 정교하게 조작해 왔다.

이것은 의학의 탈을 쓴 살인이다. 세진병원을 연구중심병원으로 도약시켜 막대한 정부 지원금과 특허권을 독점하겠다는 맹목적인 야망이 낳은 괴물. 김태수에게 환자는 존중받아야 할 생명이 아닌, 신약 개발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초석으로 쓸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데이터가 담긴 USB는 세진병원 수뇌부를 단숨에 침몰시킬 수 있는 어뢰와 같다. 하지만 그 파괴력만큼 반작용도 크다. 세진병원의 거대 재단과 배후의 정재계 인맥이 움직인다면, 당신은 진실을 밝히기도 전에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바로 그때, 책상 위에서 진동하던 대포폰의 화면이 밝아진다. 병원 내부 정보원의 가쁜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온다.

"백 변호사님, 큰일 났습니다. 불법 임상시험 대상자였던 환자 한 명이 방금 복강 내 대량 출혈로 응급실에 실려 왔습니다. 지금 5수술실로 올라갔는데, 김태수 실장 라인인 외과 과장이 일부러 손을 써서 테이블 데스(수술 중 사망)로 위장하려 합니다! 사인을 단순 패혈증으로 묻어버리려 고요!"

머릿속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혈관내 응고장애 상태에서의 복강 내 출혈. 지금 당장 수술실에서 지혈을 하지 않으면 환자는 30분 이내에 저혈량성 쇼크로 사망한다. 그 환자는 김태수의 범죄를 밝혀줄 유일한 살아있는 증거이자, 당신이 의사로서 살려야 할 목숨이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면허가 박탈된 변호사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순간 무면허 의료 행위로 형사 처벌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법적인 절차만 밟으며 시간을 지체하기엔, 환자의 바이탈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모니터 속 붉은 경고등처럼 깜빡이는 혈액 검사 수치들이 당신을 압박한다. 법정과 수술실, 두 개의 전장 중 당신이 먼저 검을 뽑아 들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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