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병원 이사회 회의실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정방형의 원목 테이블 위로 가죽 바인더 하나가 밀려옵니다. 바인더 내부, 만년필 서명란 바로 위에는 ‘세진의료원 신임 병원장 겸 의료혁신위원장 백강현’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습니다. 병원의 모든 기득권을 일망타진하고 거대 재단을 한 손에 쥐게 된 당신에게 이사회가 바치는 마지막 타협안이자 굴복의 증거입니다. 사시나무 떨듯 손을 떠는 임시 이사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당신의 눈치를 살핍니다.
당신은 가죽 바인더를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병원장이라는 자리는 달콤한 종착지처럼 보입니다. 병원 내의 모든 수술실을 직접 통제하고, 막강한 예산권을 쥐며, 의료계의 정점에 서서 법적 테두리 안의 완전한 면죄부를 스스로 부여할 수도 있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만년필을 집어 드는 대신, 정장을 가볍게 털며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병원장이란 자리는 결국 행정을 핑계로 메스를 놓게 만들더군요. 메스를 놓은 외과의는 환부의 썩은 냄새를 맡지 못합니다.”
당신의 건조하고 차가운 거절에 이사회 회의실이 얼어붙습니다. 미련 없이 회의실을 나서는 당신의 등 뒤로, 기득권의 상징 같던 거대한 유리 요새가 멀어집니다.
당신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화려한 대학병원의 탑이 아닌, 법원 인근 모퉁이에 위치한 메디컬 전문 법률 사무소 ‘강현’입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집무실 책상 위에는 두 개의 이질적인 오브제가 놓여 있습니다. 한쪽에는 대법원 판례집과 의료 소송 관련 조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다른 한쪽에는 스테인리스 트레이 위에 올린 10번 메스 블레이드와 헤가(Hegar) 지침기가 정밀하게 정렬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의자 뒤로 깊숙이 몸을 묻고, 익숙하게 나일론 4-0 봉합사를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립니다. 매끄럽고 차가운 실의 감촉이 지문 끝을 자극합니다. 병원 수뇌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법정에서 승리했지만, 그것은 수많은 부조리 중 단 하나의 악성 종양을 도려낸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수술실 장막 뒤에서는 무자격자의 대리 수술이 횡행하고, 차트 조작과 유령 수술로 환자들의 목숨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그 어둠을 가장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는 자는 오직 법률을 아는 집도의이자, 메스를 든 변호사인 당신뿐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병원이라는 거대한 권력의 톱니바퀴에 수동적인 부속품으로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사법과 의학의 경계에 서서, 메디컬 탑의 오만한 자들이 법을 어기거나 의사로서의 선서를 저버릴 때마다 그들의 숨통을 끊어놓을 냉혹한 사냥꾼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이 열립니다. 비서가 두꺼운 브리핑 자료를 들고 들어옵니다. 또다시 거대 대형병원의 의료 과실 은폐 정황이 포착된 새로운 사건의 조서입니다.
당신은 책상 위의 소장들을 가볍게 정리한 뒤, 정장 안주머니에 은밀히 숨겨진 티타늄 메스 케이스를 만져봅니다. 법전의 엄밀한 문장으로 피고인석의 가해자들을 구속하고, 날카로운 메스의 진실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권리를 복원하는 일. 그것이 당신이 선택한 영원한 전장입니다.
당신은 서류를 집어 들며 어두운 조명 아래로 걸어나갑니다. 부조리한 기득권을 언제든 도려낼 완벽한 준비를 마친 채, 법정의 의로운 감시자 백강현의 복수는 이제 변하지 않는 일상이 되어 계속됩니다.